음식, 그냥 먹지 말고 생각하며 먹자 - 『식탁 위의 세계사』 이영숙
이영숙 작가와 독자의 만남에는 김육훈 교사도 함께했다. 그는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와 세계사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작가 역시도 고등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는 전직 국어 교사다. 사랑하는 학생들의 곁을 떠나 문학이 아닌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을 내기까지, 『식탁 위의 세계사』의 탄생 비화가 궁금하다.
2012.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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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의 기록이지만 그것을 조명하는 목적은 현재와 미래에 있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자 지도로써 기능한다. 새로운 세대의 보다 나은 시대를 꿈꾼다면 역사 안의 수많은 선례들에 대한 이해가 밑바탕 되어 있어야 한다. 이영숙 작가의 『식탁 위의 세계사』가 반가운 이유다.
작가는 감자와 빵, 소금과 후추 같은 식탁 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음식들을 통해 세계 역사를 이야기한다. 교과서 안의 박제된 역사가 아닌 일상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역사를 들려줌으로써,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소재뿐만 아니라 시각 역시 새롭다. 강대국과 승자의 시각에서 쓰여진 역사서에서는 알 수 없었던 사건과 인물의 이면에 대해 들려준다. 하지만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함께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그리하여 출판사 창비에서는 『식탁 위의 세계사』를 ‘제2회 창비 청소년 도서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며 다음과 같이 평했다.
『식탁 위의 세계사』, 딸에게만 주기는 아깝더라구요.
이영숙 작가와 독자의 만남에는 김육훈 교사도 함께했다. 그는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와 세계사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작가 역시도 고등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는 전직 국어 교사다. 사랑하는 학생들의 곁을 떠나 문학이 아닌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을 내기까지, 『식탁 위의 세계사』의 탄생 비화가 궁금하다.
“저희 집에 초등학교 6학년인 작은 딸이 있는데 외교관이 꿈이에요. 세계사 이야기를 참 즐겨듣곤 했었죠. 처음에는 그 애 생일날 선물로 주려고 쓰기 시작했어요. 한 달 반 정도 써서 완성을 한 다음에 가만히 생각하니까 딸아이만을 위해서 주기에는 아깝더라구요. 혹시 다른 학생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처음엔 출간 의뢰를 할 생각이었다. 출판사 창비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방문했을 때 청소년 도서상 공고를 보게 되어 응모했고, 수상작에 선정되면서 『식탁 위의 세계사』는 세상으로 나왔다. 엄마의 편지를 읽는 듯 애정이 듬뿍 담긴 친숙한 말투도, 이해하기 쉽게 쓰여진 내용들도 그래서 가능했다. 여러모로 ‘자와할라 네루’의 『세계사 편력』을 떠올리게 한다. 『세계사 편력』은 인도의 독립영웅 자와할라 네루가 자신의 딸에게 보낸 옥중 편지 196편을 엮은 책이다. 단 한명의 독자, 사랑하는 딸을 위해 쓰여졌다는 점 외에도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세계 역사를 바라보도록 한다는 점에서 『식탁 위의 세계사』와 닮아 있다.
‘조금 더 일찍 이 재미를 발견했으면 좋았을 것을….’
김육훈 교사는 『식탁 위의 세계사』를 읽으며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딸아이의 꿈을 응원하는 엄마의 사랑,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쉽게 역사를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스며들어 있는 까닭이었다. 애정이 있다 한들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 작가가, 세계 역사라는 방대한 내용과 그 안의 사건?인물들의 면면에 대해 한 권의 책을 쓴다는 것은 간단치 않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속에 담긴 작가의 세계사적 지식과 그것을 이해하는 시각은 역사 교사인 김육훈이 보기에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언제부터 세계사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게 되었는지, 김육훈 교사가 물었다.
“6년 전 쯤에 암 선고를 받았어요.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미안했지만 교단을 떠나야 했고 수술을 받았죠. 그 후에는 저희 아이들과 함께 필리핀으로 가서 2년 반 정도 요양 생활을 했어요. 그곳에서 책을 읽으려고 하니까 한글로 된 책이 없는 거에요. 한국에서 가지고 갔던 책은 이미 다 읽은 뒤였고, 주변에는 영어나 타갈로그어로 된 책들뿐이었어요. 영어로 쓰여진 책을 읽으려는데 문학은 은유나 비유, 상징이 많아서 읽기 힘들었어요. 그런데 세계사 책은 수사법이 많지 않고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으니까 읽을 만하더라구요.”
우연히 시작한 세계사 공부에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딸들의 뜨거운 반응이었다. 엄마와 함께 필리핀에 머물며 국제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이 방과후에 집으로 돌아오면 작가는 하루 동안 읽었던 책 속의 세계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특히 외교관을 꿈꾸는 작은 딸아이는 큰 재미를 느꼈다. 다음날이면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모아놓고 전날 들은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들려주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땐 새로운 이야기들을 또 들려달라고 기대에 찬 눈망울로 작가를 채근했다. 그렇게 모녀가 함께 나눈 세계사 이야기들이 『식탁 위의 세계사』의 출발이었다.
작가 역시 세계사를 공부하는 새로운 재미에 빠져들었다.
“세계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는 게, 예전에는 몰랐던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는 부분들이 있더라구요. 인생의 갈 길을 밝혀주는 내용들이 많다는 생각들이 들면서 ‘조금 더 일찍 이 재미를 발견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살아가는 지혜 같은 게 역사적인 사실 속에서 굉장히 많았던 것 같아요.”
고민 끝에 선택한 당의정, 음식
『식탁 위의 세계사』라는 책 제목을 두고 음식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 아닐까, 짐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책 속에는 그 음식을 처음 먹기 시작한 곳은 어디인지, 언제 어떠한 계기로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는지 등에 관한 이야기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음식은 이 책의 조연이다. 주연은 세계사다. 세계사 이야기라고 하면 아이들이 재미를 느끼지 못하거나 거리감을 두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딱딱하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선택한 ‘당의정’이 음식이었다. 쓴 약의 표면에 달콤한 꿀물이나 설탕을 발라 아이들에게 먹이는 것처럼 음식으로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유인하려는 ‘고도의 전략’인 셈이다.
하루는 작가가 슈퍼마켓에서 포도를 샀는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 칠레산이었다고 한다. 일상 속에서 흔하게 마주하는 이 순간이 작가에게는 ‘당의정’의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었다고 하는데, 칠레산 포도를 통해 어떻게 세계사를 이야기한다는 것일까.
포도라는 하나의 과일만을 가지고도 작가는 ‘우리나라와 칠레의 자유무역 협정(FTA) 체결’의 역사뿐만 아니라, 샴페인 관련 조항이 포함되어 있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바르샤바 조약, 나아가 와인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역사까지도 들려준다. 실제로 자신의 아이들과 칠레산 포도를 먹으며 나누었던 이야기들이라고 하니,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따라가게 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일랜드와 영국의 역사를 보노라면
마치 우리나라와 일본 같아서…
『식탁 위의 세계사』가 반가운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새로운 시각과 입장에서 세계사를 들려준다는 점이다. 강대국 중심으로 짜여진 힘의 질서와 그것이 반영된 역사인식에 익숙해질 아이들에게 작가는 반대편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감자를 통해 아일랜드와 영국의 오랜 반목의 역사를 설명하는가 하면, <바나나> 편에서는 바나나를 판매하는 다국적 기업들의 억압과 착취의 역사를 들려준다.
아일랜드는 수 백 년 동안이나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그 기간 안에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 사건이 발생해 백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굶어 죽었지만 영국인 지주들은 곡물 공출에 열을 올릴 뿐이었다. ‘바나나 공화국’이라고 불리는 중앙아메리카의 몇몇 나라들은 돌(Dole), 델몬트(Delmont), 치키타(Chiquita) 같은 대형 다국적 기업들의 플랜테이션 농업에 의존하고 있다. 이들 기업들의 국가 내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바나나 공화국의 국민들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국가가 나서서 다국적 기업들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사살하는 데 군사력을 동원한다.
이처럼 『식탁 위의 세계사』에는 능동적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고는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작은 목소리의 역사들이 담겨 있다. 소외된 역사들을 많이 다룬 것 같다는 김육훈 교사의 이야기에 이영숙 작가는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영숙 : 소외된 자들의 입장에서 쓰겠다는 거창한 생각을 하면서 썼던 건 아니에요. 굳이 세계사가 아니더라도 더 나은 세상, 평화로운 세상을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김육훈 : 아이들에게 균형 잡힌 역사를 가르쳐야죠. 그런데 사실 지금까지 그러지 못한 것 같아요. 세계사는 주로 서양 중심으로 가르쳐 왔고, 아일랜드 보다는 영구에 초점을 맞춰 왔고, 남미나 중미보다는 미국의 시선에 의해서 라틴아메리카를 봐 왔죠. 그렇다 보니까 『식탁 위의 세계사』에서 세계사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반가운 거죠. 세계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분들이 이렇게 다루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다 평화롭고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강연회를 마무리하며 작가는 학생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을 전했다.
“세계사를 공부하는 목적을 시험이나 입시에만 두고, 그것을 통과할 수 있는 만큼만 공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접근하면 지엽적인 지식밖에 얻을 수 없죠. 조금 더 깊이 있게 애정을 가지고 사건이나 현상을 들여다보면, 지식에 머무르지 않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소금>편에 소개된 ‘간디의 소금 행진’을 예로 들었다. ‘영국의 소금법에 저항하기 위해 간디가 1930년에 26일 동안 370킬로미터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만 알아도 시험 문제를 푸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딱 그만큼만 아는 데에서 만족한다면 지엽적인 지식을 얻는 것에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간디가 소금 행진을 했던 3월에서 4월 사이의 기온은 40도에 육박했고, 그의 몸은 체포?수감과 단식 투쟁을 반복하며 매우 야위어 있는 상태였으며, 예순이 넘은 나이에 서울~부산 보다 더 먼 거리를 걸었다는 사실들을 통해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를 위해서 애정 어린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영숙 작가는 1년 동안 필리핀의 국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쳤다. 당시 학교의 교육 목표 중 한 구절을 보았을 때, 그는 가슴 속에 뜨겁게 벅차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고 했다. ‘보다 평화롭고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아마도 이 한 줄의 문장은 『식탁 위의 세계사』에 반영된 작가의 세계사적 관점일 것이고, 독자들에게 전하고픈 단 하나의 메시지일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식탁 위의 세계사』를 통해 작가와 같은 꿈을 꾼다면, 정말 세상은 조금 더 평화롭고 나아질 것만 같다.
작가는 감자와 빵, 소금과 후추 같은 식탁 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음식들을 통해 세계 역사를 이야기한다. 교과서 안의 박제된 역사가 아닌 일상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역사를 들려줌으로써,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소재뿐만 아니라 시각 역시 새롭다. 강대국과 승자의 시각에서 쓰여진 역사서에서는 알 수 없었던 사건과 인물의 이면에 대해 들려준다. 하지만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함께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그리하여 출판사 창비에서는 『식탁 위의 세계사』를 ‘제2회 창비 청소년 도서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며 다음과 같이 평했다.
후추, 소금 등 소소한 음식을 통해 세계사의 의미를 알아보는 시도는 청소년 도서로는 처음이다. 또한 역사의 주류가 아닌, 소외된 자들의 눈으로 세계사를 살펴본다는 점 역시 인상적이다. 길게 사랑받는 책이 될 것이다. (심사평 중에서) | ||
『식탁 위의 세계사』, 딸에게만 주기는 아깝더라구요.
“저희 집에 초등학교 6학년인 작은 딸이 있는데 외교관이 꿈이에요. 세계사 이야기를 참 즐겨듣곤 했었죠. 처음에는 그 애 생일날 선물로 주려고 쓰기 시작했어요. 한 달 반 정도 써서 완성을 한 다음에 가만히 생각하니까 딸아이만을 위해서 주기에는 아깝더라구요. 혹시 다른 학생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처음엔 출간 의뢰를 할 생각이었다. 출판사 창비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방문했을 때 청소년 도서상 공고를 보게 되어 응모했고, 수상작에 선정되면서 『식탁 위의 세계사』는 세상으로 나왔다. 엄마의 편지를 읽는 듯 애정이 듬뿍 담긴 친숙한 말투도, 이해하기 쉽게 쓰여진 내용들도 그래서 가능했다. 여러모로 ‘자와할라 네루’의 『세계사 편력』을 떠올리게 한다. 『세계사 편력』은 인도의 독립영웅 자와할라 네루가 자신의 딸에게 보낸 옥중 편지 196편을 엮은 책이다. 단 한명의 독자, 사랑하는 딸을 위해 쓰여졌다는 점 외에도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세계 역사를 바라보도록 한다는 점에서 『식탁 위의 세계사』와 닮아 있다.
‘조금 더 일찍 이 재미를 발견했으면 좋았을 것을….’
김육훈 교사는 『식탁 위의 세계사』를 읽으며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딸아이의 꿈을 응원하는 엄마의 사랑,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쉽게 역사를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스며들어 있는 까닭이었다. 애정이 있다 한들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 작가가, 세계 역사라는 방대한 내용과 그 안의 사건?인물들의 면면에 대해 한 권의 책을 쓴다는 것은 간단치 않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속에 담긴 작가의 세계사적 지식과 그것을 이해하는 시각은 역사 교사인 김육훈이 보기에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언제부터 세계사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게 되었는지, 김육훈 교사가 물었다.
“6년 전 쯤에 암 선고를 받았어요.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미안했지만 교단을 떠나야 했고 수술을 받았죠. 그 후에는 저희 아이들과 함께 필리핀으로 가서 2년 반 정도 요양 생활을 했어요. 그곳에서 책을 읽으려고 하니까 한글로 된 책이 없는 거에요. 한국에서 가지고 갔던 책은 이미 다 읽은 뒤였고, 주변에는 영어나 타갈로그어로 된 책들뿐이었어요. 영어로 쓰여진 책을 읽으려는데 문학은 은유나 비유, 상징이 많아서 읽기 힘들었어요. 그런데 세계사 책은 수사법이 많지 않고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으니까 읽을 만하더라구요.”
우연히 시작한 세계사 공부에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딸들의 뜨거운 반응이었다. 엄마와 함께 필리핀에 머물며 국제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이 방과후에 집으로 돌아오면 작가는 하루 동안 읽었던 책 속의 세계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특히 외교관을 꿈꾸는 작은 딸아이는 큰 재미를 느꼈다. 다음날이면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모아놓고 전날 들은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들려주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땐 새로운 이야기들을 또 들려달라고 기대에 찬 눈망울로 작가를 채근했다. 그렇게 모녀가 함께 나눈 세계사 이야기들이 『식탁 위의 세계사』의 출발이었다.
작가 역시 세계사를 공부하는 새로운 재미에 빠져들었다.
“세계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는 게, 예전에는 몰랐던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는 부분들이 있더라구요. 인생의 갈 길을 밝혀주는 내용들이 많다는 생각들이 들면서 ‘조금 더 일찍 이 재미를 발견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살아가는 지혜 같은 게 역사적인 사실 속에서 굉장히 많았던 것 같아요.”
고민 끝에 선택한 당의정, 음식
『식탁 위의 세계사』라는 책 제목을 두고 음식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 아닐까, 짐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책 속에는 그 음식을 처음 먹기 시작한 곳은 어디인지, 언제 어떠한 계기로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는지 등에 관한 이야기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음식은 이 책의 조연이다. 주연은 세계사다. 세계사 이야기라고 하면 아이들이 재미를 느끼지 못하거나 거리감을 두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딱딱하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선택한 ‘당의정’이 음식이었다. 쓴 약의 표면에 달콤한 꿀물이나 설탕을 발라 아이들에게 먹이는 것처럼 음식으로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유인하려는 ‘고도의 전략’인 셈이다.
하루는 작가가 슈퍼마켓에서 포도를 샀는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 칠레산이었다고 한다. 일상 속에서 흔하게 마주하는 이 순간이 작가에게는 ‘당의정’의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었다고 하는데, 칠레산 포도를 통해 어떻게 세계사를 이야기한다는 것일까.
…포도는 여름에 익어서 가을에 주로 수확하는 과일이라는 걸 알 수 있지. 그런데 요즘은 가을이 아니어도 언제든지 쉽게 포도를 먹을 수 있어. 온실에서 키운 거냐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다른 큰 이유가 있어. (중략) 우리나라에서 시작해서 지구의 한가운데를 꼬치 꿰듯 뚫고 나가는 선을 상상해 봐. 그렇게 빠져나간 우리나라의 지구 정반대편은 우루과이의 남동쪽 바다 위래. 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 대륙에 위치한 나라잖아. 칠레도 그 부근에 있어. (중략) 그런데 칠레는 남반구에 있으니까 우리와 계절이 반대인 거야. 우리가 겨울일 때 그곳은 여름이고 우리가 봄일 때 그곳은 가을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포도가 귀할 때 칠레는 본격적인 포도 수확기에 접어드는 거지. (p. 157~158) | ||
포도라는 하나의 과일만을 가지고도 작가는 ‘우리나라와 칠레의 자유무역 협정(FTA) 체결’의 역사뿐만 아니라, 샴페인 관련 조항이 포함되어 있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바르샤바 조약, 나아가 와인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역사까지도 들려준다. 실제로 자신의 아이들과 칠레산 포도를 먹으며 나누었던 이야기들이라고 하니,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따라가게 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아일랜드와 영국의 역사를 보노라면
마치 우리나라와 일본 같아서…
『식탁 위의 세계사』가 반가운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새로운 시각과 입장에서 세계사를 들려준다는 점이다. 강대국 중심으로 짜여진 힘의 질서와 그것이 반영된 역사인식에 익숙해질 아이들에게 작가는 반대편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감자를 통해 아일랜드와 영국의 오랜 반목의 역사를 설명하는가 하면, <바나나> 편에서는 바나나를 판매하는 다국적 기업들의 억압과 착취의 역사를 들려준다.
아일랜드는 수 백 년 동안이나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그 기간 안에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 사건이 발생해 백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굶어 죽었지만 영국인 지주들은 곡물 공출에 열을 올릴 뿐이었다. ‘바나나 공화국’이라고 불리는 중앙아메리카의 몇몇 나라들은 돌(Dole), 델몬트(Delmont), 치키타(Chiquita) 같은 대형 다국적 기업들의 플랜테이션 농업에 의존하고 있다. 이들 기업들의 국가 내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바나나 공화국의 국민들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국가가 나서서 다국적 기업들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사살하는 데 군사력을 동원한다.
이처럼 『식탁 위의 세계사』에는 능동적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고는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작은 목소리의 역사들이 담겨 있다. 소외된 역사들을 많이 다룬 것 같다는 김육훈 교사의 이야기에 이영숙 작가는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영숙 : 소외된 자들의 입장에서 쓰겠다는 거창한 생각을 하면서 썼던 건 아니에요. 굳이 세계사가 아니더라도 더 나은 세상, 평화로운 세상을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김육훈 : 아이들에게 균형 잡힌 역사를 가르쳐야죠. 그런데 사실 지금까지 그러지 못한 것 같아요. 세계사는 주로 서양 중심으로 가르쳐 왔고, 아일랜드 보다는 영구에 초점을 맞춰 왔고, 남미나 중미보다는 미국의 시선에 의해서 라틴아메리카를 봐 왔죠. 그렇다 보니까 『식탁 위의 세계사』에서 세계사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반가운 거죠. 세계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분들이 이렇게 다루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다 평화롭고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강연회를 마무리하며 작가는 학생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을 전했다.
“세계사를 공부하는 목적을 시험이나 입시에만 두고, 그것을 통과할 수 있는 만큼만 공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접근하면 지엽적인 지식밖에 얻을 수 없죠. 조금 더 깊이 있게 애정을 가지고 사건이나 현상을 들여다보면, 지식에 머무르지 않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소금>편에 소개된 ‘간디의 소금 행진’을 예로 들었다. ‘영국의 소금법에 저항하기 위해 간디가 1930년에 26일 동안 370킬로미터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만 알아도 시험 문제를 푸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딱 그만큼만 아는 데에서 만족한다면 지엽적인 지식을 얻는 것에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간디가 소금 행진을 했던 3월에서 4월 사이의 기온은 40도에 육박했고, 그의 몸은 체포?수감과 단식 투쟁을 반복하며 매우 야위어 있는 상태였으며, 예순이 넘은 나이에 서울~부산 보다 더 먼 거리를 걸었다는 사실들을 통해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를 위해서 애정 어린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영숙 작가는 1년 동안 필리핀의 국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쳤다. 당시 학교의 교육 목표 중 한 구절을 보았을 때, 그는 가슴 속에 뜨겁게 벅차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고 했다. ‘보다 평화롭고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아마도 이 한 줄의 문장은 『식탁 위의 세계사』에 반영된 작가의 세계사적 관점일 것이고, 독자들에게 전하고픈 단 하나의 메시지일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식탁 위의 세계사』를 통해 작가와 같은 꿈을 꾼다면, 정말 세상은 조금 더 평화롭고 나아질 것만 같다.
- 식탁 위의 세계사 이영숙 저 | 창비
제2회 창비청소년도서상 교양 부문 대상 수상작. 『식탁 위의 세계사』는 소금, 후추 같은 우리 곁의 친근한 먹을거리를 통해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들과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로 안내하는 흥미로운 청소년 교양서다. 엄마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부담스럽지 않고, 고대사부터 시작하는 뻔한 연대기가 아니라서 지루할 틈이 없다. 책은 감자에서 비롯한 아일랜드 대기근부터 옥수수에 대한 러시아 지도자 흐루쇼프의 열정, 소금법에 저항한 간디의 소금 행진 등 식재료에 관계된 열 가지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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