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완서가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마지막 이야기 - 작가 호원숙
작가로서 ‘박완서’라는 이름이 가지는 힘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최근 출간된 고인의 유고산문집은 작가의 지난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작가가 머물렀던 아치울 마을 자택에서 어머니의 유지를 이어가고 있는 호원숙 작가와 마주했다.
글ㆍ사진 황정호
2012.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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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울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느껴지는 청량감과 고요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과의 경계를 느끼게 했다.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가 고즈넉한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생전 작가가 삶을 영위했던 마을이라고 생각하니 새삼 경건함이 마음에 자리 잡았다. 이윽고 자택에 들어서자 평소 글을 통해서 아낌없는 애정을 드러냈던 작가의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진 않지만 소중한 마음이 깃들어 있는 곳……. 그 딸이자 어머니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호원숙 작가는 생전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편안한 미소로 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지난 6월 영인문학관에서 작가의 1주기 전시회가 열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출간 된 박완서 작가의 유고산문집 『세상에 예쁜 것』은 작가를 그리워했던 많은 이들에게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유족들이 우연찮게 발견한 작가의 글 묶음이 한권의 책으로 다시 세상에 나오기까지 과정에는 적잖은 고민이 필요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쓰시던 노트북 바탕화면에 떠 있던 글이 두 편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내신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출간 이후에 쓰신 글이었습니다. 두 편의 글은 마치 어머니의 유언과 같아서 우선 동생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그 두 편의 글로 책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고 그냥 소중히 가족만의 것으로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1주기도 지나 어머니의 책상 서랍에서 어떤 산문집에도 들어가지 않은 글을 잘 정리하여 모아놓으신 묶음을 발견했습니다. 평소 컴퓨터에 저장된 것은 믿을 수 없다며 종이의 정직함을 믿으신 어머니가 A4 용지로 프린트해놓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반가움과 기쁨을 주었다기 보다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마음이 저려왔습니다.”
- 『세상에 예쁜 것』 호원숙 작가의 ‘책을 내면서’ 中

어머니의 흔적을 발견하고……

질문

지난 6월 30일까지 영인문학관에서 어머님의 1주기 전시회를 치러내셨습니다. 어떠한 마음이셨는지요.

답변

‘엄마의 말뚝’이라는 제목으로 치른 1주기였어요. 어머니의 물건 중에서 문학적 작품의 소재가 됐던 물건들을 내놨고, 또 저희들이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편지와 메모도 공개했죠. 편지는 외국에 있던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들이고, 메모들은 작품을 쓰면서 갑자기 외출하셨을 때 부탁하셨던 것들이었어요. 그런 것이 굉장히 생동감 있게 어머니를 느끼게 했죠. 저희들 입장에서는 어머니 목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것 같아 좋았어요.

질문

어머님의 유품을 다시 정리한다는 것은 옛 생각에 웃음 짓게 하면서도 어쩌면 또 한 번의 슬픔을 겪어야 했던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답변

주로 어머니 사랑이 녹아 있는 것들이었고, 작지만 어머니 생활에 느낌이 담겨 있는 것들이었죠. 좋은 옷이 아니더라도 즐겨 입었던 옷이라던가, 외할머니가 남기신 마고자라던가. 그런 것을 어머니는 생전에 깊숙이 넣어 보관하셨더라고요. 물론 어머니의 글도 있었고요. 그런 것이 굉장히 슬프면서도 아름답고, 또 거기에 저희들이 받은 사랑이 깃들어 있는 듯했어요.

질문

박완서 선생님의 유고 산문집인 『세상에 예쁜 것』 뒷부분에 책상서랍에서 글 묶음을 발견했을 당시의 심정을 담으셨습니다. 책으로 낼 결심을 하기까지, 또 글을 선별하는데도 고심을 많이 하셨을 듯 합니다.

답변

사실은 처음에는 책을 낼 생각이 아니었어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보니 두 개의 원고가 컴퓨터 화면에 있었어요. 그 전에는 어머니만이 사용하셨던 컴퓨터였죠. 편찮으시기 직전까지 쓴 글이었어요. 그 원고가 너무 소중해서 가족끼리 돌려보며 ‘어머니가 마지막 쓰신 글이 두 개가 남았구나’ 그랬었어요. 그리고 직전에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책이 나왔기 때문에 거기에 모든 원고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가 어머니 글이 더 많이 남은 것을 알게 됐죠. 오래전부터 여러 크고 작은 매체를 통해서 발표하신 것들이었어요. 단지 책으로 묶으시지 않은 것이었죠.

어머니는 원고 청탁이 왔을 때 거절을 못하셨어요. 작은 매체는 작은 곳이라서 거절을 못하시고, 또 간곡하게 부탁하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써주시곤 했어요. 쓸 때는 귀찮아하시면서 ‘전화를 왜 바꿔줬니’ 그러시는데(웃음), 승낙하신 후에 원고를 쓸 때는 모든 마음을 모아쓰시곤 했죠. 그걸 보며 ‘작가로서 한편의 글조차 소홀하게 쓰시지 않았구나’를 느끼게 되더군요.

질문

지난 여름 나무 밑에 검은 고양이가 죽어있는 것을 보신 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시며 쓰신 ‘어머니가 그리울 때’라는 글을 봤습니다. 지금도 일상에서 불현듯 어머니를 기억나게 하는 일들이 많으실 듯 하네요.

답변

그렇죠. 마당에 꽃이 올라오면 그렇고요. 오늘도 날씨가 쌀쌀한데도 어머니께서 평소 아끼셨던 수련이 폈더라고요. 어머니가 계시면 꼭 이야기하셨을 텐데……. 제가 어머니와 마당을 가꿨기 때문에 잘 알죠. 어머니는 저와 꽃 시장에 가는 것이 즐거움이셨어요. 꽃을 사다가 와서 심곤 했던 지난 일상이 떠오르죠.


어머니의 뜻을 기리는 문학관

지난해 박완서 작가가 세상을 떠난 후 구리시는 ‘박완서 문학마을’ 조성 계획을 밝혔다. 작가가 생전에 작품을 구상하며 산책하던 토평동 장자호수공원과 교문동 아차산 고구려 보루 등을 잇는 둘레길을 조성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했다. 아치울 마을 인근 도서관에 들어선다는 문학관은 그렇게 작가의 정신을 이어갈 듯하다.

질문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선생님은 전원주택에 사는 기쁨을 고백하셨습니다. 『세상에 예쁜 것』에서도 정원을 가꾸는 것을 ‘사서하는 고생’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박완서 문학마을’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뜻 깊은 것 같습니다.

답변

구리시에서 도서관을 중심으로 해서 어머니의 생전에 문학자료관을 만들어놓았어요. 그때도 제가 자료를 많이 제공을 해주고 자문을 했죠. 그것이 초석이 돼서 문학관으로 발전하게 된 거라고 봐요. 구리시에서 도서관을 중심으로 문학관을 조성하는 데는 가족들도 반대하지 않아요. 잘 진행되리라 믿습니다.

질문

선생님께서는 생전에 아치울 마을을 고향 개성을 닮았다고 하셨습니다. 말년에 그리움이 더 하셨던 것 같은데요.

답변

책에 글들을 읽어보면서 굉장히 마음에 아파했어요. 어머니는 고향에 갈 수 있겠다고 생각을 하셨는데 끝내 가지 못하셨죠.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굉장히 그리워하셨고 한 번 자유롭게 땅을 밟아봤으면 하는 바람이 크셨죠.

질문

그런 의미에서 이 지역이 선생님에게 대체되는 공간으로 여겨지셨을 텐데, 문학관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는지요.

답변

저희가 생각하는 좋은 방향으로 된 것 같아요. 어머니는 죽은 공간을 싫어하셨어요. 문학관이라고 해놓고 한 두 사람 올까 말까한 썰렁한 공간 보다 아이들이나 학생들이 부모와 함께 편하게 오고 즐길 수 있고 하는 공간이 됐으면 했어요. 그런 마음이 많이 전달된 것 같아요. 그렇게 자유로우면서도 열린 공간이 됐으면 합니다.


생전의 기억

불혹의 나이에 『나목』으로 등단한 작가의 이력은 생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어떻게 결혼을 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왔던 작가가 그러한 작품을 써내려갈 수 있었을까. 『나목』을 쓸 당시도 가족들에게 숨겨가며 몰래 작업을 했다는 작가는 이후 40년 동안 참았던 열정을 쏟아내듯 수많은 작품을 세상에 내 놓았다. 작가로서 그 삶을 누구보다 곁에서 지켜봐왔던 딸은 어머니의 지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존경스러움을 느낀다.

질문

박완서 선생님의 젊은 시절, 자녀분들이 커갈 당시의 기억이 궁금합니다. 돌이켜봤을 때 어떤 어머니였다고 생각되시는지요.

답변

저희 어머니가 책상을 가지시게 된 것은 사실 등단하신 뒤에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어요. 항상 안방에 앉아 작은 소반위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글을 쓰셨죠. 서재라던가, 글을 쓰기 위한 작가로서 어머니만의 공간이 없었어요. 안방에서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이뤄졌죠. 밥을 먹고 자녀들과 이야기하고, 거기서 어머니는 재봉틀로 옷도 만드셨고요. 밤이면 두런두런 이야기하면서 잠들었죠. 보통 어머니들과 다르지 않으셨어요.

질문

다 쓴 원고를 출판사에 보낼 때 따님을 통해 보내셨다고 하셨는데, 선생님이 셨나요. 이번 유고집 글 중에 박완서 선생님께서 ‘중간에 원고를 딸이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상상만 해도 식은땀이 난다’고 고백하셨던 부분이 기억납니다.

답변

네(웃음), 제가 다닌 고등학교가 광화문 쪽이었어요. 그때 신문사도 다 광화문에 있었고 출판사도 그 근처에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항상 학교 갈 때 어머니가 원고를 챙겨 보내셨죠. 당시 전 원고를 갖다 줄 때까지 한 번도 들춰보지 않았어요. 그러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그것이 저한테는 굉장히 숭고한 일이었죠.






박완서 작가는 어린 시절 전쟁으로 인해 문학의 길을 오랫동안 보류해야했다. 이후 작가의 삶을 시작했을 때에도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그러한 아픔을 작가는 문학으로 승화하며 어렵사리 남은 가족을 위한 삶을 이어나갔다.

질문

선생님의 인생은 참 굴곡이 많으셨던 것으로 압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던 당시 슬픔을 어떤 식으로 극복하셨는지요.

답변

어머니는 참 힘들어 하셨어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살아있는 가족들, 남은 가족들도 중요하다’ 그런 생각으로 일어나신 것 같아요. 당시 작품도 쓰시다만 연재소설이 있었거든요. 그것을 중단한 다는 것은 소설 속에 살아있는 인물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열심히 쓰셨죠. 정말 훌륭하게 이겨내셨어요.

질문

어머니에게서 이어진 삶의 교훈과 정신, 그리고 이야기가 있는 가풍은 다시 딸들에게 또 그 자녀들에게 이어졌을 듯 합니다.

답변

어머니께서는 항상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주셨어요. 제가 사춘기 이후 성장했을 때는 종종 어떤 작품을 읽으라며 중요한 장면들을 이야기해주시곤 하셨어요. 그러면 저는 그 장면들이 나오는 것을 보기 위해서 다시 책을 보게 됐죠. 굉장히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해주셨어요(웃음). 예를 들어 안나카레리나 마지막을 이야기해 주시면 전 그걸 느끼기 위해 책을 읽곤 했죠. 책을 보고 나면 마치 숙제를 마친 것 같았어요. 결국 그러면서 성장한 것 같아요. 어머니에게 문학은 생활이었고 따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이야기였던 거죠.

질문

선생님은 고교시절부터 은사였던 소설가 박노갑 선생님을 비롯해 박경리 선생님 등 많은 분들과 다양한 인연을 이어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답변

박노갑 선생님에 대한 것은 어머니가 저희한테 이야기를 해주시기도 했고 글로도 그분이 어떻게 문학을 가르쳐주셨는지를 쓰시기도 했어요. 이 책에서 나온 것은 박노갑 선생님의 부인께서 운명하셨을 때 안 계신 스승을 떠올리며 부음을 받고 가셨던 사연을 쓰신 거죠. 또 이병주 선생님 같은 경우 저희 어머니 아니면 그 작가의 일상적인 모습을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에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는 그분들과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과 글을 통해 보이는 모습은 다르더라고요. 김수환 추기경님에 대한 글을 장례를 마치고 쓰신 글이에요. 그것 역시 또 시각이 다르더라고요.

질문

투병을 하실 당시에 선생님께서 자녀분들에게 남긴 말씀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특별한 유언이 있으셨는지?

답변

어머니는 사실 투병하시다 가셨지만 돌아가실 때는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가셨고, 유언이라고 따로 하신 것은 없었어요. 항상 일상적으로 대화하고, 투병 중에 특히 딸들과 가깝게 지내셨죠. 사실 저희가 어머니와 물리적으로 가깝게 지낸 적은 별로 없었어요. 어머니는 항상 혼자 일하시고 우린 결혼해서 살고 했으니까요. 어머니가 편찮으시면서 함께 피부를 맞대고 생활을 하게 됐죠. 그때 어머니가 딸들에 대해서도 ‘너는 이런 면이 있구나, 너무 사랑스럽구나’ 하시면서 마치 새로 발견한 것처럼 ‘내 자식이지만 같이 있어보니 좋은 면이 있었다. 몰랐다’ 그런 이야기를 해주셔서 그게 저희한테는 굉장히 따뜻하게 마음으로 남아 있어요.


어머니의 이름으로

생전 박완서 작가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는 딸의 눈에 간간이 이슬이 맺혔다. 호원숙 작가에게 어머니는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었다. 어머니와 같은 작가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호원숙 작가는 그 유지를 이어가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이야기한다.

질문

박완서 선생님은 호원숙 선생님께 어머니를 넘어 인생, 문학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머님께서 호원숙 선생님께 남긴 유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답변

어머니는 삶과 문학이 분리된 분이 아니셨어요. 항상 일치됐고, 삶에 뿌리두지 않은 문학은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삶이 충실해야지 문학도 충실하게 된다는 것을 교훈으로 주셨죠. 그런 면에서는 엄격하셨어요.

질문

선생님께서 책을 통해 젊은 시절 에피소드를 털어놓으신 것 중에 당신의 어머니께서 본인의 작품을 보는 것을 꺼리셨다는 부분을 보고 미소를 지었는데, 호원숙 작가님의 경우는 어떠신지요. 작가로서 ‘어머니를 뛰어넘어보겠다’고 생각하신 적은 없으신지?

답변

(웃음). 저는 뭐 어머니와 비교할 순 없어요. 어머니가 글을 쓰시면서 또 그 이전부터 얼마나 모든 것을 쏟아서 살아가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히 미치지 못하리라 생각해요. 단지 어머니와 저는 세계가 다르다고 생각할 뿐이지 넘어서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저 역시도 어머니가 젊으셨을 때 외할머니께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책이 나오기 전에는 보여드리지 않았어요. 그래도 어머니는 제 글을 좋아하셨죠. 편찮으실 때는 제 글을 읽어드리기도 하곤 했어요.






질문

박완서 선생님께서 세상에 남기신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답변

어머니를 기리시는 것은 문학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생전에도 스스로 ‘나는 책으로 남는다’ 고 항상 말씀하셨거든요. 요즘에는 어머니 작품이 여러 나라 말로 번역이 많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작업은 계속 되리라고 생각해요. 어머니는 문학을 통해서 자존감을 이야기하셨어요. ‘가난해도 자존심이 있으면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부자라도 자존감이 없으면 가치가 없다’고 하셨죠. 항상 균형감각을 유지하시면서 세상이나 사람에 대해서 한 번도 치우치지 않으셨어요. 평정을 유지하셨던 삶이었죠.

질문

독자 분들에게 어머니 대신해서 마지막 당부를 하신다면?

답변

이 책은 저희 어머니가 남기신 글 중에서 마치 세상에다 어른으로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 , 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책을 내놓고 보니 더 그러네요. 여기에 작가 박완서라는 사람의 지혜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천천히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생전 어머니께서도 하나하나 정말 심혈을 기울여 마음을 다해 쓰신 거니까요. 아무리 작은 매체를 통해서도 전달하고자하는 생각이 있으셨거든요. 자부심을 가지면서 베풀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열심히 하셨어요. 그런 것을 많은 사람들이 느꼈으면 합니다.


※ 박완서 작가가 생전에 쓰던 서재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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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예쁜 것
박완서 저 | 마음산책
박완서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세상에 예쁜 것』이 출간되었다. 그간 어느 책에도 실리지 않은 미출간 원고 중 2000년 이후 기고한 38편을 추려 묶은 책이다. 작가가 손수 모아둔 소중한 글이자, 여든 해 가까운 삶을 돌아보며 얻은 깨달음과 결코 늙지 않는 감수성으로 포착한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게다가 여기에는 생전에 쓴 마지막 글이 들어 있어 마치 유언과도 같은 울림을 준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박완서 #호원숙 #세상에 예쁜 것 #나목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엄마의 말뚝
1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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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4.03.25

마당에 꽃이 올라오면 그렇고요. 오늘도 날씨가 쌀쌀한데도 어머니께서 평소 아끼셨던 수련이 폈더라고요. 어머니가 계시면 꼭 이야기하셨을 텐데……. 박완서 작가님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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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er08

2012.11.26

고 박완서 씨의 문학을 통해 앞으로 제 삶에서 있을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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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d1318

2012.11.10

인터뷰 내용 중에 "자존감이 있으면 어려움도 잘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기억에 남아요. 삶과 문학이 일치하셨고, 삶을 충실히 살아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는 박완서 선생님. 많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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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호

최선을 다해서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언제나 꿈꾸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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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원숙

어머니 박완서와 아버지 호영진의 맏딸로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여고와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나왔다. 『뿌리 깊은 나무』의 편집 기자로 일했고, 첫아이를 갖고부터 전업주부로 살다가 1992년에는 박완서의 일대기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을 썼다. 현재는 모교의 경운박물관 운영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월간 『샘터』의 에세이 필자 중 한 사람이다. 언젠가부터 그는 자신이 떠올렸던 것과 똑같은 구절을 다른 사람들의 글에서 발견할 때마다 ‘이제는 망설이지 말고 네가 먼저 써보라고’ 하는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터넷 한쪽에서 ‘아침 산책’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2011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치울에 머물며 『박완서 소설 전집』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등을 출간하는 데 관여했으며, 박완서 대담집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박완서의 말』을 엮었다. 일상에서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해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 할 수 있는 것 자체로도 큰 기쁨을 느낀 그는 2006년 첫 산문집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를 통해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마련해 준 세계 문학 전집을 보았을 때부터 꿈꾸고 그리워했던 문학에 한 발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 밖에 쓴 책으로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그리운 곳이 생겼다』 등이 있다. 띵 시리즈에 「엄마 박완서의 부엌」으로 참여했으며 '보신탕'을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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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경기도 개풍(현 황해북도 개풍군) 출생으로,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로 이주했다. 1944년 숙명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교사였던 소설가 박노갑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작가 한말숙과 동창이다. 1950년 서울대학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전쟁으로 중퇴하게 되었다. 개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박완서에게 한국전쟁은 평생 잊을 수 없을 없는 기억이다.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부상을 입고 거의 폐인이 되어 돌아온 `똑똑했던` 오빠가 `이제는 배부른 돼지로 살겠다`던 다짐을 뒤로 하고 여덟 달 만에 죽음을 맞이하고, 그후 그의 가족은 남의 물건에까지 손을 대게 되는 등 심각한 가난을 겪는다. 그후 미8군의 PX 초상화부에 취직하여 일하다가 그곳에서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된다. 1953년 직장에서 만난 호영진과 결혼하고 살림에 묻혀 지내다가 훗날 1970년 불혹의 나이가 되던 해에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裸木)』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 이후 우리의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까지 뼈아프게 드러내는 소설들을 발표하며 한국 문학의 한 획을 긋고 있다. 박완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에 적절한 서사적 리듬과 입체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다채로우면서도 품격 높은 문학적 결정체를 탄생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작가는 우리 문학사에서 그 유례가 없을 만큼 풍요로운 언어의 보고를 쌓아올리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그녀는 능란한 이야기꾼이자 뛰어난 풍속화가로서 시대의 거울 역할을 충실히 해왔을 뿐 아니라 삶의 비의를 향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구도자의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 한국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다룬 데뷔작 『나목』과 『목마른 계절』,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아저씨의 훈장』, 『겨울 나들이』,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을 비롯하여 70년대 당시의 사회적 풍경을 그린 『도둑맞은 가난』, 『도시의 흉년』, 『휘청거리는 오후』까지 저자는 사회적 아픔에 주목하여 글을 썼다. 『살아있는 날의 시작』부터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작가는 행복한 결혼은 어떤 형태인가를 되묻게 하는 소설인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 점점 독특한 시각으로 여성문제를 조명하기 시작한다. 또 장편 『미망』,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에서는 개인사와 가족사를 치밀하게 조명하여 사회를 재조명하기도 한다. 『배반의 여름』은 1975년 9월에서 1978년 9월까지 발표했던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조그만 체험기」, 「흑과부黑寡婦」,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등에서 볼 수 있듯이 박완서가 그리는 모성의 힘은 실로 놀랍다. 성균관대에서 열린 ‘2006 호암상 수상자(예술상) 초청 강연회’에서 박완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 문학의 뿌리는 어머니”라고. 박완서 특유의 수다스러움으로 풀어내는 모성의 힘은 힘센 것들만이 권력을 쥐고 판을 치는 현대산업사회에서 뒤로 처진 자들의 아픔을 진정으로 위무해준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는 1987년 1월에서 1994년 4월까지 발표되었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가족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 네 개나 있는데 그중「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남편의 죽음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아들의 죽음을 담고 있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특이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체로 되어 있는데 담담하게 이어가는 주인공의 목소리에서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을 느낄 수 있다. 『저녁의 해후』에는 1984년 1월부터 1986년 8월까지 발표했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 「해산바가지」, 「애 보기가 쉽다고?」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여기에서 나타나는 하층민들의 인간애는 가진 자들의 야만성과 대비되어 더욱 빛을 발한다. 『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은 1979년 3월에서부터 1983년 8월까지 발표한 작품들을 수록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속물성과 위선이 난무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진다. 젊은 것들의 무관심과 조롱 속에서 외롭게 늙어가는 노인들의 모습을 담아낸 「황혼」, 「천변풍경泉邊風景」과, 출세한 자들의 허위를 그린 「내가 놓친 화합(和合)」, 「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 등이 그것이다. 『미망』은 조선조 말기에서 6ㆍ25 전쟁 직후까지 그 파란만장했던 시대를 한 개성 상인의 가족사를 통하여 재창조한 대하소설이다. 민족의 수난사와 더불어 고난과 격동의 시대를 험준한 산을 넘듯 숨가쁘게 살아온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박완서 소설 문체가 도달한 궁극적인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작가는 사람과 자연을 한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느낀 기쁨과 경탄, 감사와 애정을 담아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펴냈다. 「친절한 책읽기」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연재했던 글도 함께 실어 노작가의 연륜과 성찰이 돋보이는 글을 선보였다. 1993년부터 국제연합아동기금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1994년부터 공연윤리위원회 위원, 1988년부터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그 가을의 사흘 동안』으로 한국문학작가상, 『엄마의 말뚝』으로 제5회 이상문학상, 『미망』으로 대한민국문학과 제3회 이상문학상, 『꿈꾸는 인큐베이터』로 제38회 현대문학상 등을 받았다. 2006년, 문화예술인으로서 처음이자 여성으로서도 처음으로 서울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평소 입버릇처럼 "전쟁의 상처로 작가가 됐다."고 고백해왔던 그녀는 전쟁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은 경험으로 글을 써왔다. 여러 편의 장편소설과 수필집, 동화집을 발표하고, 2010년 8월 수필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마지막으로 2011년 1월 22일, 담낭암 투병 중 별세했다. 경기 구리시에는 '박완서 문학마을'이 조성될 예정이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대산문학상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했고, 2006년 서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타계 이후 문학적 업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그 외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소설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친절한 복희씨』,『기나긴 하루』,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한 길 사람 속』,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