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모두 죽을 거야.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자” - 연극 <러브, 러브, 러브>
누구도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누구도 나의 삶을 살아본 사람이 없다는 전제 하에 우리는 배우고 귀 기울이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러브, 러브, 러브> 같은 연극을 함께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이 연극은 우리가 인간답게 어울려 살기 위해서 얼마나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지 보여주니까 말이다.
2013.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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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world, 세상이 변하기 시작한 그때
이선균, 전혜진 부부가 출연하는 연극 <러브, 러브, 러브>라고 하면, 아마도 당신은 부부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 무대를 떠올리겠지만, 그건 절반만 맞는 얘기다. 제목인 ‘러브러브러브’는 비틀즈의 노래 ‘All you need is love'의 도입부 ‘love~love~love’에서 따왔다. 여기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 노래는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7년 6월 25일 BBC가 야심차게 준비한 전 세계 최초 위성 생중계 프로그램를 위해 만든 노래다. (극이 시작하기 전에 커튼 위로 보이는 영상이자, 막이 오르면 케네스가 보고 있는 영상이다)
Our world! 전 세계 사람들은 한날한시에 이 프로그램을 봤다. 우리는 하나! 세계는 이제 정말 하나! All you need is love! 비틀즈의 노래는 세계가 변하고 있다는 신호탄처럼 전 세계 31개국에 울려 퍼졌다. 그러니까 바로 이 역사적인 날, 케네스(이선균 분)와 산드라(전혜진 분)는 TV에서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사랑을 나눈다.
여기에도 조금 배경 설명이 필요하겠다. 옥스퍼드 출신인 케네스는 부모님의 잔소리를 피해 런던에 있는 형네 집에 잠복해있는 고학력 ‘잉여’다. 산드라는 형 헨리의 여자친구인데 (술이나 약에 취해있기 일쑤지만) ‘얼굴도 죽여주고, 몸매는 더 죽여주는’ 패셔니스타다. 여성운동, 정치운동에 목소리를 높이는 그녀 역시 옥스퍼드 출신으로, 이날 헨리네 집에 놀러 왔다가 단숨에 캔과 샌디는 눈이 맞아 버린다. “근데 형도 있는데, 우리 이러면 안 되지 않을까?”
망설이는 케네스에게 산드라는 몽롱한 눈빛으로 말한다. “우린 모두 죽을 거야.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자. 우린 매일 매일 늙어. 그러니까 오늘 할 수 있는 모든 사고를 치자.” 자유로운 영혼 산드라의 말은 옳았다. 시간은 흐르고 그들은 나이 들어간다. 시대는 변하고, 상황도 변하고, 그 둘에게는 자녀도 생겼는데, 이 철없고 즉흥적이고 이기적일 정도로 자기 자신의 충실한 두 사람의 성격만큼은 변함이 없다.
저항의 상징, 로망 있던 대학시절, 80년대 민주화 운동 겪은 그 세대
연극 <러브, 러브, 러브>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3막으로 구성됐다. 두 사람이 열아홉이었던 1960년대, 40대인 두 사람이 가족이 되어 함께 살고 있는 1980년대, 이후 이혼을 하고 각자 살다 60이 돼서 다시 만나게 된 2000년대가 3막의 배경이 된다.
배경은 런던이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케네스과 산드라는 저항의 상징이었던 68세대이자 전쟁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세대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6.25를 겪은 부모님 아래서 자라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직접 겪은 세대인 셈이다.
‘우리 땐, 취직 같은 거 걱정 안 했어. 그보다 더 중요한 것, 자유, 평화, 이런 걸 위해서 싸웠지.’라던, 386세대 어른들의 이야기와 겹치는 구석이 많다. 영국의 밴드 더 후(The Who)가 ‘늙기 전에 죽고 싶어’라고 외치며 무대 위에서 기타를 부숴대던 1965년, 소위 68세대는 X세대, 신세대 등으로 불리며, 그들은 자신들이 부모와는 다른 시대 아이들임을 천명했다. 술 먹고 마약 하고 성생활에서도 자유로움을 이들은 상징적으로 여겼다.
일자리도 많았고, 돈 벌 기회도 많았다. 젊음을 제 방식대로 실컷 즐긴 68세대는, 케네지와 산드라처럼 이내 자리 잡아, 집도 사고 돈도 모아간다. 그렇게 서서히 늙어가고, 서서히 보수화되어 간다. 어떤 이들은 혼돈의 역사를 스스로 뚫고 나왔다는 성취감에 도취해, (이전 세대와는 달리)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잔소리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른바 ‘내가 해봐서 아는데’ 식의 레퍼토리로 말이다. 세대가 어떻든 부모들은, 이렇게 닮아간다.
하여간 엄마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망하는 지름길?
그야말로 ‘꼴리는 대로’ 살아왔고, 그것을 훈장처럼 여기는 케네지와 산드라는, 아이들에게도 ‘너도 맘대로 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획득한 ‘자유’와, 아직 어떤 억압도 자유도 제대로 경험해 보지 않은 아이들에게 던져진 ‘자유’가 같은 의미일까?
‘네 멋대로 살아라!’는 말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일단 ‘내 멋’이 무엇인지, ‘멋대로 산다’는 건 또 무엇인지 알 때만 가능하다. 최소한 케네지와 산드라의 ‘꼴리는 대로’ 살았던 삶은, ‘아빠 엄마 말 잘 들으며 착실하게 지루한 삶을 견뎌왔는데, 이건 좀 아니잖아? 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겠어’하는 각성에서 비롯되었기에 다른 삶으로의 탈주가 가능했던 것이었다.
자기 탐구도, 자유로운 삶에 관한 감각도 없이 ‘내 멋대로 살아라’는 얼마나 공허한 말인가. 뭘? 어떻게 하라고? 그들의 딸 로지는,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케네지와 산드라가 그저 “그래, 잘한다. 니 맘대로 해.”라고 응원해주는 대로, 끌려 다닌다.
삶은 예술처럼, 좋은 것-나쁜 것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다만, 비교를 통해 나에게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은 존재한다. 더 좋은 것을 갖고 싶다면?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느끼면서 지금 이것보다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을 찾아 나서야 한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더 좋은 음악, 더 좋은 이야기, 더 좋은 영화를 발견해나간다.
삶의 방식도 마찬가지다. 얼마만큼 다른 삶을 경험할 수 있는지, 그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만의 삶의 방식, 삶의 스타일이 나온다. 엄마 말만 듣거나, 그저 제 멋대로 산다고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다른 것보다 그렇게 사는 게 나아서 선택한 것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무조건, 맹목적으로, 이것밖에 대안이 없는 것처럼 ‘엄마 말 잘 들어라’ 혹은 ‘제발 눈치 보지 말고 네 맘대로 좀 하라’고 삶의 방식이 강요된다면, 이때는 엄마 말을 잘 듣든, 멋대로 살든 이 둘이 망하는 지름길에서 올라서는 건 똑같다.
그러니까 케네지와 산드라의 딸 로지처럼 이런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다. “내 인생 완전히 망했어. 다 아빠, 엄마 때문이야.”
언제나 ‘우린 각자 가는 거다. 혼자 사는 거야’를 모토로 독립적인 삶을 꾸려온 엄마, ‘네가 하고 싶은 것만 해. 네가 좋아하는 것만 하라’고 참견도 하지 않았지만, 관심도 갖지 않았던 아빠. 로지는 그런 부모 아래서 컸다. 주체적으로 키우겠다는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로지의 삶은 원칙도 체계도 확신도 없고, 사랑과 관심이 부족해 자존감도 자신감도 없는 서른일곱이 되어 버렸다.
“아빠, 엄마 때문에 망했어” VS “우린 그런 삶을 살지 아니하였다”
그뿐이랴. 장성한 딸, 로지에게는 이제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남자도 없다. 부모님도? 없다. 원래 있으나 마나했던 존재였으니까. 로지는 처음으로 케네지와 산드라를 호출해, 이렇게 청구한다. “아빠, 엄마 때문에 망했으니까, 나 집 사줘. 그 정도는 해줘야 해.” 이런 말에 호락호락 오냐오냐할 케네지와 산드라가 아니다. (이들은 60년대를 스스로 헤쳐 나온 주역 아닌가. 우린, 그런 삶을 살지 아니하였다. 내 딸을, 이렇게 나약(!)하게 키우지 않았다.)
“어디서 투정이야?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 아빠, 엄마 말 듣지 말았어야지. 젊은이는 반항했어야지. 누구한테 책임을 물어? 인생 혼자 사는 거야.”
개인의 독립심과 자존감이 이기심과 무책임으로 돌변하는 건 한순간이다. 지난날, 기득권 권리에 맞서 싸우던, 저항과 반항의 아이들은 사라졌다. 적당한 직장 구해서, 적당한 월급 받으며, 적당한 가정을 꾸려, 자신의 재산을 불려줄 보수당에 표를 던지는 케네디와 산드라는 과거의 자신들보다 그들의 부모 모습을 닮아있다.
반면, 극단적인 빈부격차, 극단적인 경쟁사회, 극단적인 계급사회에서 출발을 시작한 다음 세대의 가난과 비극은 과연 누구 탓인가? 시대 탓인가? 나약한 탓인가? 사회구조 탓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로지처럼 집을 사달라고 할 그런 부유한 부모조차 없을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영국의 젊은 극작가 마이클 바틀릿은 어느 세대 입장도 편들지 않고, 그들이 닥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부모가, 혹은 자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이만큼씩이다
연극은, 여기서부터 시작하자고 말한다. ‘아빠, 엄마 시대와 우리 시대는 다르다.’ 서로 이걸 인정하고 나서 얘기해보자고 말이다. ‘왜 우리 같이 행동하지 않느냐’고, 혹은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이야기를 꺼내서는 불통의 평행선을 달리게 될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뿐이다. 먼저 경험한 사람들은 다음 사람들에게 정답이 아닌, 좋은 질문을 제시할 수 있다. 우리는 부모나 선생님, 혹은 멘토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던져주는 인생의 답안지를 넙죽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 시대는 빠르게 바뀌고 있고, 그들과 우리는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구도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누구도 나의 삶을 살아본 사람이 없다는 전제 하에 우리는 배우고 귀 기울이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러브, 러브, 러브> 같은 연극을 함께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이 연극은 우리가 인간답게 어울려 살기 위해서 얼마나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지 보여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이 연극은 때때로 우리 삶에는 좋은 순간이 얼마나 많으냐며 우리를 웃게 한다.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서로 다르지만,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 불안전하다는 걸 연극은 보여준다. 우리가 이 전제조건만 충분히 이해한다면, 할아버지든 아버지든 누구랑 대화하든, 이전처럼 벽을 두고 떠드는 기분은 들지 않을 테다.
많은 관객이 기대하는 이선균, 전혜진 부부의 호흡이 역시나 좋다. TV나 영화 속에서처럼 능청스러운 일상 연기를 보여주는 이선균도 매력적이지만, 특히 3년 만에 무대에 복귀하는 전혜진은 눈에 띄는 존재감을 드러낸다.
세 막이 흐르는 동안, 이선균은 흰머리나 옷차림으로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지만, 한결 같이 화려한 패션을 고수하는 전혜진은 연기만으로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산드라라는 자유롭고 자유분방한 캐릭터가 그녀의 이미지와 절묘하게 어울리는 것도 그녀가 돋보인 이유일 테다.
<러브, 러브, 러브>는 4월 21일까지 명동 예술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제목이야 <러브, 러브, 러브>지만, 부모님과 함께, 친구들과 함께 관람해도 굉장히 흥미로울 작품이다.
이선균, 전혜진 부부가 출연하는 연극 <러브, 러브, 러브>라고 하면, 아마도 당신은 부부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 무대를 떠올리겠지만, 그건 절반만 맞는 얘기다. 제목인 ‘러브러브러브’는 비틀즈의 노래 ‘All you need is love'의 도입부 ‘love~love~love’에서 따왔다. 여기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 노래는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7년 6월 25일 BBC가 야심차게 준비한 전 세계 최초 위성 생중계 프로그램
Our world! 전 세계 사람들은 한날한시에 이 프로그램을 봤다. 우리는 하나! 세계는 이제 정말 하나! All you need is love! 비틀즈의 노래는 세계가 변하고 있다는 신호탄처럼 전 세계 31개국에 울려 퍼졌다. 그러니까 바로 이 역사적인 날, 케네스(이선균 분)와 산드라(전혜진 분)는 TV에서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사랑을 나눈다.
여기에도 조금 배경 설명이 필요하겠다. 옥스퍼드 출신인 케네스는 부모님의 잔소리를 피해 런던에 있는 형네 집에 잠복해있는 고학력 ‘잉여’다. 산드라는 형 헨리의 여자친구인데 (술이나 약에 취해있기 일쑤지만) ‘얼굴도 죽여주고, 몸매는 더 죽여주는’ 패셔니스타다. 여성운동, 정치운동에 목소리를 높이는 그녀 역시 옥스퍼드 출신으로, 이날 헨리네 집에 놀러 왔다가 단숨에 캔과 샌디는 눈이 맞아 버린다. “근데 형도 있는데, 우리 이러면 안 되지 않을까?”
망설이는 케네스에게 산드라는 몽롱한 눈빛으로 말한다. “우린 모두 죽을 거야.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자. 우린 매일 매일 늙어. 그러니까 오늘 할 수 있는 모든 사고를 치자.” 자유로운 영혼 산드라의 말은 옳았다. 시간은 흐르고 그들은 나이 들어간다. 시대는 변하고, 상황도 변하고, 그 둘에게는 자녀도 생겼는데, 이 철없고 즉흥적이고 이기적일 정도로 자기 자신의 충실한 두 사람의 성격만큼은 변함이 없다.
저항의 상징, 로망 있던 대학시절, 80년대 민주화 운동 겪은 그 세대
연극 <러브, 러브, 러브>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3막으로 구성됐다. 두 사람이 열아홉이었던 1960년대, 40대인 두 사람이 가족이 되어 함께 살고 있는 1980년대, 이후 이혼을 하고 각자 살다 60이 돼서 다시 만나게 된 2000년대가 3막의 배경이 된다.
배경은 런던이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케네스과 산드라는 저항의 상징이었던 68세대이자 전쟁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세대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6.25를 겪은 부모님 아래서 자라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직접 겪은 세대인 셈이다.
‘우리 땐, 취직 같은 거 걱정 안 했어. 그보다 더 중요한 것, 자유, 평화, 이런 걸 위해서 싸웠지.’라던, 386세대 어른들의 이야기와 겹치는 구석이 많다. 영국의 밴드 더 후(The Who)가 ‘늙기 전에 죽고 싶어’라고 외치며 무대 위에서 기타를 부숴대던 1965년, 소위 68세대는 X세대, 신세대 등으로 불리며, 그들은 자신들이 부모와는 다른 시대 아이들임을 천명했다. 술 먹고 마약 하고 성생활에서도 자유로움을 이들은 상징적으로 여겼다.
일자리도 많았고, 돈 벌 기회도 많았다. 젊음을 제 방식대로 실컷 즐긴 68세대는, 케네지와 산드라처럼 이내 자리 잡아, 집도 사고 돈도 모아간다. 그렇게 서서히 늙어가고, 서서히 보수화되어 간다. 어떤 이들은 혼돈의 역사를 스스로 뚫고 나왔다는 성취감에 도취해, (이전 세대와는 달리)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잔소리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른바 ‘내가 해봐서 아는데’ 식의 레퍼토리로 말이다. 세대가 어떻든 부모들은, 이렇게 닮아간다.
하여간 엄마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망하는 지름길?
그야말로 ‘꼴리는 대로’ 살아왔고, 그것을 훈장처럼 여기는 케네지와 산드라는, 아이들에게도 ‘너도 맘대로 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획득한 ‘자유’와, 아직 어떤 억압도 자유도 제대로 경험해 보지 않은 아이들에게 던져진 ‘자유’가 같은 의미일까?
‘네 멋대로 살아라!’는 말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일단 ‘내 멋’이 무엇인지, ‘멋대로 산다’는 건 또 무엇인지 알 때만 가능하다. 최소한 케네지와 산드라의 ‘꼴리는 대로’ 살았던 삶은, ‘아빠 엄마 말 잘 들으며 착실하게 지루한 삶을 견뎌왔는데, 이건 좀 아니잖아? 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겠어’하는 각성에서 비롯되었기에 다른 삶으로의 탈주가 가능했던 것이었다.
자기 탐구도, 자유로운 삶에 관한 감각도 없이 ‘내 멋대로 살아라’는 얼마나 공허한 말인가. 뭘? 어떻게 하라고? 그들의 딸 로지는,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고,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케네지와 산드라가 그저 “그래, 잘한다. 니 맘대로 해.”라고 응원해주는 대로, 끌려 다닌다.
삶은 예술처럼, 좋은 것-나쁜 것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다만, 비교를 통해 나에게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은 존재한다. 더 좋은 것을 갖고 싶다면?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느끼면서 지금 이것보다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을 찾아 나서야 한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더 좋은 음악, 더 좋은 이야기, 더 좋은 영화를 발견해나간다.
삶의 방식도 마찬가지다. 얼마만큼 다른 삶을 경험할 수 있는지, 그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만의 삶의 방식, 삶의 스타일이 나온다. 엄마 말만 듣거나, 그저 제 멋대로 산다고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다른 것보다 그렇게 사는 게 나아서 선택한 것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무조건, 맹목적으로, 이것밖에 대안이 없는 것처럼 ‘엄마 말 잘 들어라’ 혹은 ‘제발 눈치 보지 말고 네 맘대로 좀 하라’고 삶의 방식이 강요된다면, 이때는 엄마 말을 잘 듣든, 멋대로 살든 이 둘이 망하는 지름길에서 올라서는 건 똑같다.
그러니까 케네지와 산드라의 딸 로지처럼 이런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다. “내 인생 완전히 망했어. 다 아빠, 엄마 때문이야.”
언제나 ‘우린 각자 가는 거다. 혼자 사는 거야’를 모토로 독립적인 삶을 꾸려온 엄마, ‘네가 하고 싶은 것만 해. 네가 좋아하는 것만 하라’고 참견도 하지 않았지만, 관심도 갖지 않았던 아빠. 로지는 그런 부모 아래서 컸다. 주체적으로 키우겠다는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로지의 삶은 원칙도 체계도 확신도 없고, 사랑과 관심이 부족해 자존감도 자신감도 없는 서른일곱이 되어 버렸다.
“아빠, 엄마 때문에 망했어” VS “우린 그런 삶을 살지 아니하였다”
그뿐이랴. 장성한 딸, 로지에게는 이제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남자도 없다. 부모님도? 없다. 원래 있으나 마나했던 존재였으니까. 로지는 처음으로 케네지와 산드라를 호출해, 이렇게 청구한다. “아빠, 엄마 때문에 망했으니까, 나 집 사줘. 그 정도는 해줘야 해.” 이런 말에 호락호락 오냐오냐할 케네지와 산드라가 아니다. (이들은 60년대를 스스로 헤쳐 나온 주역 아닌가. 우린, 그런 삶을 살지 아니하였다. 내 딸을, 이렇게 나약(!)하게 키우지 않았다.)
“어디서 투정이야?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 아빠, 엄마 말 듣지 말았어야지. 젊은이는 반항했어야지. 누구한테 책임을 물어? 인생 혼자 사는 거야.”
개인의 독립심과 자존감이 이기심과 무책임으로 돌변하는 건 한순간이다. 지난날, 기득권 권리에 맞서 싸우던, 저항과 반항의 아이들은 사라졌다. 적당한 직장 구해서, 적당한 월급 받으며, 적당한 가정을 꾸려, 자신의 재산을 불려줄 보수당에 표를 던지는 케네디와 산드라는 과거의 자신들보다 그들의 부모 모습을 닮아있다.
반면, 극단적인 빈부격차, 극단적인 경쟁사회, 극단적인 계급사회에서 출발을 시작한 다음 세대의 가난과 비극은 과연 누구 탓인가? 시대 탓인가? 나약한 탓인가? 사회구조 탓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로지처럼 집을 사달라고 할 그런 부유한 부모조차 없을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영국의 젊은 극작가 마이클 바틀릿은 어느 세대 입장도 편들지 않고, 그들이 닥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부모가, 혹은 자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이만큼씩이다
연극은, 여기서부터 시작하자고 말한다. ‘아빠, 엄마 시대와 우리 시대는 다르다.’ 서로 이걸 인정하고 나서 얘기해보자고 말이다. ‘왜 우리 같이 행동하지 않느냐’고, 혹은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이야기를 꺼내서는 불통의 평행선을 달리게 될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뿐이다. 먼저 경험한 사람들은 다음 사람들에게 정답이 아닌, 좋은 질문을 제시할 수 있다. 우리는 부모나 선생님, 혹은 멘토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던져주는 인생의 답안지를 넙죽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 시대는 빠르게 바뀌고 있고, 그들과 우리는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구도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누구도 나의 삶을 살아본 사람이 없다는 전제 하에 우리는 배우고 귀 기울이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러브, 러브, 러브> 같은 연극을 함께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이 연극은 우리가 인간답게 어울려 살기 위해서 얼마나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지 보여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이 연극은 때때로 우리 삶에는 좋은 순간이 얼마나 많으냐며 우리를 웃게 한다.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서로 다르지만,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 불안전하다는 걸 연극은 보여준다. 우리가 이 전제조건만 충분히 이해한다면, 할아버지든 아버지든 누구랑 대화하든, 이전처럼 벽을 두고 떠드는 기분은 들지 않을 테다.
많은 관객이 기대하는 이선균, 전혜진 부부의 호흡이 역시나 좋다. TV나 영화 속에서처럼 능청스러운 일상 연기를 보여주는 이선균도 매력적이지만, 특히 3년 만에 무대에 복귀하는 전혜진은 눈에 띄는 존재감을 드러낸다.
세 막이 흐르는 동안, 이선균은 흰머리나 옷차림으로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지만, 한결 같이 화려한 패션을 고수하는 전혜진은 연기만으로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산드라라는 자유롭고 자유분방한 캐릭터가 그녀의 이미지와 절묘하게 어울리는 것도 그녀가 돋보인 이유일 테다.
<러브, 러브, 러브>는 4월 21일까지 명동 예술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제목이야 <러브, 러브, 러브>지만, 부모님과 함께, 친구들과 함께 관람해도 굉장히 흥미로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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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댓글
필자
김수영
summer2277@naver.com
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연답게 잘, 헤쳐나가고자 합니다.
tvfxqlove74
2013.05.11
브루스
2013.04.30
rostw
2013.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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