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소설가의 유일한 장점? 놀고 있어도 놀고 있는 게 아니다”
지난 8월 5일, 신간 『안녕, 내 모든 것』으로 독자들을 찾아온 작가 정이현을 만나는 특별한 자리가 있었다. 어두컴컴한 하늘에 소나기가 오고 가는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많은 독자들이 향긋한 북살롱을 찾았다. 정이현 작가는 날씨 탓에 우울할 독자들을 위해 평소 입지 않는 분홍 원피스를 입었다는 말로 반가운 인사를 대신했다.
2013.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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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등단작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부터 그녀는 한 사회가 인간과 감정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예리한 시선을 유지해 왔다. 신작 『안녕, 내 모든 것』은 ‘김정일이 죽은’ 바로 그 시기에 시작된다. 90년대에 성장기를 보낸 주인공들이 이별해야 했던 ‘모든 것들’은 우리 사회가 ‘무너진 삼풍백화점’을 짊어지고 바쁘게 통과해온 시간들과 맞닿아 있다. 이날 향긋한 북살롱에서는 거짓말 같이 달콤하고 아릿한 청춘의 이야기가 독자들을 만났다.
허희 문학평론가(사회) : 책이 출간 된지 한 달 정도 지났다.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나?
정이현 :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고 지냈다. 작품 하나와 일 년 정도 깊게 사귀다 해어진 것 같다. 사실 예전에는 이런 우울함을 잘 모르고 나가서 놀거나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 그런데 십 년 차가 넘으니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이었다. 최근 비슷한 시기에 작품을 낸 동년배 작가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분도 그렇다고 했다. 슬퍼서 그런 것 같다. 자기 손으로 만든 세계를 자기 손으로 부수고 이별하는 시간이라 그렇다. 말하자면, 지금은 애도의 기간이다. 연애가 끝나면 지금까지 시간을 반추하고 기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나. 누군가와 뜨겁게 사랑을 하고 어쩔 수 없이 헤어진 느낌, 혹은 한 때 친했지만 시간이 지나 이제는 헤어진 사이 같다.
허희 : 소설 속 주인공들을 고등학생으로 설정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정이현 : 그 시기가 사람들의 열정과 에너지가 가장 높은 시기 같다. 그런데 대부분의 10대가 좁은 교실에서 갇혀 시간을 보낸다. 언제나 그 풍경을 써보고 싶었다. 도시락 통에 눌려 있지만 부글부글 끓고 있는 시간들 말이다.
허희 : 소설 속 세 인물들은 1997년에 스무 살이 된다. IMF와도 마주치는 시기다. 풍요로운 고등학생 시절을 보내 자들이 성인이 되고 몰락을 맞는 것으로 읽힌다.
정이현 : 물론, 시기는 의도적이었다. 그렇게 읽힐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거다.
허희 : 요즘, 청춘에 대한 담론이 많다. 이 책을 보면 작가가 바라보는 청춘이 드러난다고 생각된다.
정이현 : 청춘은 생물학적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마음에 예민한 각이 서 있을 때가 청춘인 것 같다. 마음에 굳은살이 박히면 나이가 드는 듯하다.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저 삶에 다른 여지가 끼어들면 그때부터 청춘에서 멀어지는 게 아닐까. 언제나 청춘인 사람은 멋지지만 닮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일상인으로 ‘먹고사니즘’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언젠가 팟캐스트에서 청춘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물었다. 미안하다고 대답했다. 멘토로 한 마디 해달라는 말은 무섭다. 멘토라는 말이 그렇다. 나 역시 여전히 불완전하고 미숙하다. 어떻게 감히 충고를 하겠나. 70년대 초반 생으로 겪은 청춘은 IMF 이전 시대였다. 현재 젊은 친구들과는 경제적 조건이 너무 다르다. 거기에는 어른인 내 책임도 있는 것 같다.
허희 : 멘토가 싫다고 하셨지만 정이현 작가를 롤 모델로 삼는 여성들이 많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 이후로 그런 현상이 생긴 것 같다. 젊은 여성들에게 한 마디 해 달라.
정이현 : 이런 말을 들으면 답답한 마음이 앞선다. 그게 10년 전 작품인데 아직도 달라진 게 없구나 싶어서다. 시간이 지나도 20대 여성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유리를 닮은 여자들이 한국을 유령처럼 걸어나고 있다면 그건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다른 식으로 고민해봐야 한다는 거였다. 20대 여성들이 나이에 굉장히 민감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스물넷이나 스물 여덞이나 똑같다. 내가 처음 소설을 쓴 나이가 스물아홉이다. 인생을 몇 번이나 바꿀 수 있는 나이인데 세상이 정한 커트라인에 너무 매이는 것 같다.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는 것, 그래도 계속해서 나는 나라는 것을 모두 기억해주면 좋겠다.
허희 :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고 이 작가는 결혼을 안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 소설을 쓰시고 어떻게 결혼을 하셨나?
정이현 : 뭐, 그래서인지 결혼을 많이 늦게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작가 정이현과 개인으로서의 내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예민한 시선이야 없지 않겠지만 생활인의 모습이 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요즘, 일상인으로 사는 시간이 많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한테 속상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이 언젠가 작품에 힘을 줄 거라 믿으며 오늘도 열심히 아이를 보고 있다.
허희 : 육아와 연재를 병행하기 힘드셨을 것 같다.
정이현 : 계간 연재는 처음이다. 세 달 정도 시간이 있는데 한 달 정도만 일하게 된다. 급하게 마감을 하다 보니 몸이 너무 힘들다. 여유시간이 없으니 더욱 그랬다. 덕분에 작업실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글만 썼다.
허희 : 소설 속 인물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은 누구인가?
정이현 : 고모가 제일 좋다. 제일 인간적이기도 하고 불완전하고 깨지기 쉬운 사람이라 더 매력적인 거 같다. 나주에 고모의 이야기만 따로 떼서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개인적으로 닮았다고 생각하는 건 지혜다. 부모에게 냉소적이고 반항하고 싶지만 부모를 실망시킬까 불안해하는 부분이 닮았다.
허희 : 어린 시절 약간의 틱 증후군이 있었다고 들었다.
정이현 : 장애라고 호명하니까 놀랍게 들리는데, 사실 그때는 틱이라는 말도 몰랐다. 눈을 깜빡이고 말하기 전에 음음, 소리를 내는 버릇이 있었다. 열살 쯤이었다. 사람들이 눈 좀 깜빡이지마, 하면 그때부터 심하게 깜빡였다. 엄마 친구 분 소개로 병원에 갔다. 거기서 준모한테 한 것과 같은 질문을 들었다. 싫어요, 하고 대답했더니 하고 싶은 게 뭔지 물었다. 그래서 독방을 쓰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 독방을 쓰게 됐다. 천천히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돌아보면 처음으로 세상과 자아의 불안, 긴장감을 표현한 것 같다. 마음으로 다독이지 못하니까 그렇게 표현된 거다. 준모도 마찬가지다. 연약한 영혼을 가진 아이다. 다른 사람들은 흘려 보내지만, 이 아이는 그걸 못한다. 소설 속에서 가장 미안한 인물이다.
허희 : 개인적으로는 ‘충동의 논리’로 작품을 읽었다. 나는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하는 상황을 말하는데, 이 책의 인물들이 그렇다. 준모는 욕을 하기 싫지만 해야 하고, 세미는 조부모와 살고 싶지 않지만 살아야 하고, 지혜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해야 한다. 청소년이라는 시기는 욕망보다 충동의 영역에 발을 딛고 있는 시기인 것 같다.
정이현 작가가 작품의 한 구절을 낭독했다.
모두들 할머니가 제 발로 집을 나갔다고 믿었다. 집 안의 금품이 없어지지도 않았고, 납치범의 협박전화 같은 것도 전혀 걸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신이 온전치 않으셔서.” 아빠가 남들 앞에서 말하는 걸 들으면 가슴이 아팠다.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정신이 온전치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 잘못이야. 이 집을 떠나야 하는 걸 못 받아들이신 거야.” 고모는 할머니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이사를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약서라는 게 그렇게 만만한 건 줄 아느냐고 고모부가 지청구를 주었다. 고모부가 가출신고와 실정신고의 차이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실종신고 후에 오 년이 지나면 사망으로 간주된다고 했다. 아빠는 재빨리 실종신고를 했다. 어쩐 일인지 그들은 갑자기 손발이 척척 맞는 듯했다. 시간이 흘러, 서류를 정리하는 시점이 닥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이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할머니에게 비밀을 선물한 대가로, 우리 셋은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다. 우리만이 완벽하게 은폐된 비밀. 아무하고도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는 친구들과 꼭 나누고 싶었는지도,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비밀은 지켜졌고, 나와 지혜와 준모는 다시 모이지 않았다. 우리는 마침내 뿔뿔이 흩어질 수 있었다. 내가 끔찍이도 두려워했던 것은 혼자 남겨지는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 혼자인 사람이 오직 나 혼자뿐인 거였다. 준모도 지혜도 어딘가에 혼자 있을 거라 생각하면 아무리 우스운 영화를 봐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어른들은, 어른이 되면 원래 다 그런 거라고들 말했다. ‘너의 아이가 살고 있는 아침의 집에 너는 꿈에도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른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려 보았다. 안녕, 아침의 집. 안녕, 내 모든 것. - 『안녕, 내 모든 것』 중 p.227~.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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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을 마친 작가는 이 구절을 쓰던 때를 회상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인 이 구절은 다른 부분에 비해 먼저 쓰였다고 했다. 압박 때문에 일은 되지 않고 잠은 계속 부족해서 날카로워진 무렵이었다. 다음날 원고를 넘기기로 했지만 제대로 쓰지 못한 채로 그냥 잠이 들었다. 그러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는데 두 시간 동안 거짓말처럼 술술 써졌다는 거다. 작가는 ‘전문용어로 그분이 오신 것’ 이라며 웃었다.
독자와의 대화
준모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길에서 준모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정말 준모인가?
정말 준모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준모가 그린란드에 있을 수도, 어딘가에서 운전을 할 수도 있다. 나도 알 수 없다. 사실 준모의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결국, 물음표로 남기기로 했다. 그게 준모에 대한 미안함을 상쇄하는 기분이었다. 그냥 준모를 떠올리면 씩, 웃을 수 있는 정도로 두고 싶었다.
지혜가 기억력에 대해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이유가 초능력을 의심할 것 같아 일부러 틀린 답을 쓴다고 하는데 그것도 이상하고 나중에 할머니 묻은 곳을 찾지 못한 것도 이상하다.
지혜가 기억력이 좋다는 이야기는 지혜의 진술에만 의존하고 있다. 그 시절 여러 가지 마음들이 얽혀 나 사실은 대단해, 하고 초능력을 지어낸 걸 수도 있다. 준모와 세미는 그런 초능력을 유일하게 믿어준 친구다. 그래서 셋은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지혜는 그들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는지 모른다. 상상에서 시작된 걸 수도 있다. 그저 조금 기억력이 좋은 걸로도 충분히 초능력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 아닐까? 비슷한 경험이 있다. 나는 한때, 세상의 전화번호를 모두 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말하면 다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나는 엄청난 일이라 생각하는데 들어주질 않는 거다. 그러다 누군가 대단하다 하고 말해주었는데, 그 사람과 사귀었다. 지혜의 기억력도 그런 게 아닐까?
소설 속에 판타지가 없다. 현실적이어서 너무 아플 때가 있다.
세상에 다양한 콘텐츠가 있는 것 같다. 판타지를 다루는 것은 드라마 등 여러 곳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까지 할 필요는 없겠다 싶은 마음이다. 카카오 88% 초콜릿 같은 거다.
작품이 안 써질 때는 어떻게 하나?
일단 시작한다. 안되면 남의 걸 읽고 그걸 컴퓨터에 써본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이건 아주 급할 때 쓰는 방법이다. 보통 급할 때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여행 책 같이 아무 상관없는 걸 읽거나 홍대 앞을 배회한다. 소설가의 유일한 장점은 놀고 있어도 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작품구상을 하는 시간이 있으니 말이다.
10년 전,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20대 여성에게 강요된 환상과 현실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던 정이현 작가가 이번에는 90년대를 관통한 청춘의 이야기를 길어 올렸다. 소설 『안녕, 내 모든 것』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는 과거에 대한 쓸쓸하고도 아련한 이야기다. 독자들은 그녀가 전해주는 청춘의 이상한 에너지, 열렬함과 아스라함을 빌어 잠시나마 자신의 과거에 다녀온 듯 했다.
- 안녕, 내 모든 것 정이현 저 | 창비
1994년,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인 열일곱살 세 친구가 있다. 복잡한 가정사를 지닌 채 부자인 조부모의 집에 사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숨기고 있는 세미, 통제할 수 없이 반복적으로 욕설을 내뱉는 뚜렛 증후군에 시달리는 준모, 한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비범한 기억력의 소유자인 지혜. 셋은 서로를 감싸주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지켜왔지만, 또한 서로 나눌 수 없는 자신만의 상처와 비밀을 깊이 간직하고 있다. 그들이 보내는 힘겨운 십대의 마지막 시절,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나누는 커다란 비밀이, 그들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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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정연빈
북극곰이 되기를 꿈꾸며 세상을 거닐다.
어지러운 방에 돌아와 글을 씁니다.
새라새
2013.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