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는 잊어라.
어쩌면 그녀는 전생에 정말 카르멘 같은 집시였을까? 무대 위에서뿐 아니라 대화를 할 때도 충분히 전달되던 바다의 열정 때문에 든 생각이다. 한국에 첫 상륙한 뮤지컬 <카르멘>의 주인공 바다는 이미 카르멘과 닮아 있었다.
“굉장히 영광이에요. 카르멘은 열정의 대명사잖아요. 사랑을 쥐었다 놨다 하는 것과 달리 사랑에 모든 것을 걸기도 하거든요. 많은 분들이 비제의 오페라를 통해 카르멘이라는 이름은 잘 알지만 속이 어떤 여자였는지는 잘 모르잖아요. 이번에 아마 잘 아시게 될 거예요.”
뮤지컬 <카르멘>에서는 오페라에서의 자유분방하고 관능적인 카르멘만 있는 건 아니다. 게다가 비제의 음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저도 처음 캐스팅됐을 때 오페라 원작을 먼저 떠올렸어요. 그런데 오페라와는 전혀 다른 음악이라 상당히 놀랐어요. 기본적인 스토리나 캐릭터는 거의 맞지만 내용도 조금 다르고요. 제가 원하는 음악이 아니어서 이걸 해야 하나 싶었는데 새로운 음악을 들어보니 너무 좋더라고요. 우리 정서에도 잘 맞고요. 스페인 플라멩코노래인 깐떼도 너무 좋아요.”
한국에서 ‘통’하는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의 최신작, 뮤지컬 <카르멘>은 비제의 곡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만큼의 매력으로 무장했다.
‘절 보고 만든 작품인줄 알았어요’
본의 아니게 기사마다 자주 언급하게 되는 프랭크 와일드혼, 다시 정리하자면 <지킬 앤 하이드>, <몬테크리스토>, <황태자 루돌프>, <스칼렛 핌퍼넬>, <보니 앤 클라이드>까지 한 번은 봤거나 들어봤음직한 걸출한 작품들을 내놓은 그가 이번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작품을 한국에 선보인다. 전작에서 프랭크 와일드혼을 만나기도 했던 바다, 진심으로 큰 오해를 했다는데?
“저는 프랭크 와일드혼이 저 때문에 이 작품을 만든 줄 알았어요. 진짜로. 카르멘이 정말 최근에 완성한 작품인 줄 알았거든요. <스칼렛 핌퍼넬> 할 때 프랭크 와일드혼을 만난 적이 있거든요. 무대 뒤에서 저에게 너무 매력이 있다고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나의 매력을 보고 이 얘기를 썼구나, 역시 바다야’ 생각했어요.(웃음) 어쨌든 저는 계속 그렇게 생각할래요.”
실제로 바다가 카르멘을 맡았다는 얘기를 들은 프랭크 와일드혼 역시 그녀의 출연을 기뻐했다는 후문. 그 역시 바다가 카르멘에 잘 어울린다고 느꼈음은 물론이다.
“나에게 잘 맞는 옷과 같은 노래들이거든요. 그래서 좋아요. 캐릭터와 잘 맞지 않는 곡들이 있는 작품도 사실 있거든요. 하지만 뮤지컬 <카르멘>의 곡들은 몸에 감긴다고 해야 하나, 캐릭터와도 아주 잘 맞아요.”
‘저 바다잖아요!’
불현듯 기자 역시 카르멘이라는 역할이 바다에게 잘 어울린다 느낀 건 어쩌면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의 에스메랄다가 떠올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전혀 달라요. 비슷했으면 안 했겠죠. 저 바다잖아요.(웃음) 비슷한 캐릭터를 연이어 하는 건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요. 에스메랄다와 카르멘은 극과 극이에요. 에스메랄다는 순수함이 강하죠. 주변 인물들이 그녀를 성적인 시선으로 봤을 뿐이고요. 카르멘은 성적인 매력을 무기로 살아가는 여자예요. 카르멘은 늘 열쇠를 쥐고 있죠. 모든 남자의 마음을 열 수 있었거든요. 그러다 카르멘이 그녀의 열쇠로 열 수 없는 한 남자를 만나게 돼요. 호세 앞에서 그녀는 한 없이 작아져요. 그게 사랑으로 변하고 그를 향한 사랑은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게 되죠.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녀에게 다가온 최초이자 최후의 사랑을 향한 열정의 결정체를 보실 수 있어요.”
참고로 오페라 <카르멘>과 뮤지컬 <카르멘>의 결말은 좀 다르다. 하지만 삶의 키워드는 같다. 그리고 그 키워드는 물론 바다에게도 적용되고 있었다.
“저한테 다들 이렇게 질문을 해요. ‘어떻게 그렇게 열정적이실 수 있어요?’ 그 방법을 물어요. 열정 그 안에 방법을 모르는 신비함이 있다는 거죠. 카르멘의 섹시함과 정열 그 안에도 그런 신비함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이번엔 사랑을 비교해보자. 도발적인 카르멘의 사랑법, 바다도 비슷할까?
“‘남자를 들었다 놨다하는 그런 방법쯤은 알고 있겠지?’ 그런 대사가 있어요. 그런 방법은 이제 어느 정도 알 나이잖아요. 하지만 그것보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내어줄 수 있는 감정이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쉽지 않은지 더 잘 알 나이거든요. 그래서 카르멘을 더 많이 이해하고 있어요. 카르멘에게 다가온 풋사랑과 남자의 마음을 이용하는 가벼운 사랑,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느끼기까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좀 올인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이제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용감하게 다가서려고요. 그래야 다 버리거나 다 얻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전부를 얻기 위해 전부를 거는 사랑을 할 줄 아는 그녀, 역시 바다였다.
카르멘의 남자 류정한, 신성록
뮤지컬 <카르멘>을 기대하게 하는 것 중 하나는 면면이 뛰어난 배우들에 있다. 카르멘 역을 함께 맡고 있는 차지연에 대해서는 와일드한 섹시함과 순수함을 동시에 갖고 있다며 엄지를 치켜들더니, 자유분방한 카르멘을 온통 사로잡는 남자, 호세에 대해선 웃음부터 터뜨렸다.
“역할 자체가 초반에는 순정남이었다가 나중에 카르멘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는 인물인데 쉽지 않은 캐릭터죠. 고수들이나 할 수 있는 역할인 것 같아요. 가만히 있어도 매력을 발산하거든요. 신성록 씨는 특히 모델 같은 외모라서 호흡도 기대했는데 막상 서보니 키 차이가 너무 나는 거예요. 신성록 씨를 위한 8cm 굽을 준비했어요. 물론 류정한 씨와 연기할 때도 신죠. 신성록 씨에게는 약간 호세 같은 성격도 느껴져요. 반면에 류정한 씨에게서는 그런 성격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연습에 들어가면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걸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진짜 배우다’ 싶었죠.”
발레리나 같던 그녀의 발
한 번은 인터넷에서 바다의 발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발레리나의 발에서나 느껴지던 심한 고단함이 그녀에게도 묻어났다. 하이힐을 신고 무대 위를 종횡무진해온 그녀에게 주어진 훈장 같은 것일까?
“무대에 서면 저도 모르게 순간 집중하게 돼요. 지금 이 순간이 저에게 전부가 되거든요. ‘지금’ 해야 하고, ‘지금’ 즐겨야 하고, ‘지금’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만 들어요. 그럴 땐 저에게 ‘내일’은 없어요.”
그녀는 이번에도 열심히 뛴다. 상대 배우에 맞추느라 8cm나 되는 높은 굽을 신고. 서커스와 매직, 플라멩코 등 화려한 무대로 장식된 뮤지컬 <카르멘>을 위해 바다는 지금 플라멩코를 맹연습 중이다.
넘버원이 아니라 온니원
바다가 되기 이전, 최성희로서 가졌던 꿈은 연극배우였다. 그 꿈은 아직 유효하다. 언젠가 노래 하나 없는 정극 무대 위에서 바다를 보게 될 날이 올 거라는 얘기다.
“전 항상 10년 계획을 세워요. 10년 계획을 세우면서 5개만 성공해도 그건 성공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몇 개는 이뤄지고, 몇 개는 실패하고, 몇 개는 유지하고 그런 다양성 안에서 가능성을 키워가는 거죠. 그 다음에 중요한 게 지속성이거든요. 되든 안 되는 가능성을 보고 꾸준히 도전하겠다는 얘기죠.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도전을 즐기는 것 같아요. 사람들도 저보고 왜 돌아가냐고들 해요. 10년 전 뮤지컬 시작할 때도 유명 라이센스 작품들도 많이 들어왔지만 저는 창작부터 했거든요. 대답은 심플해요. 그게 나니까.”
뮤지컬을 시작한지 벌써 10년, 바닥부터 차근차근 계단을 올라서는 것도 모두 10년 계획 중 하나였다.
“어떻게 하면 이것보다 더 나아질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고 도전을 해요. 그게 제 인생의 지표거든요. 긍정적인 질문이죠. 힘들 땐 좋아지게 하고 좋을 땐 더 좋아지게 하는 질문이거든요. 이 질문을 10년 전에도 했죠. 그래서 젊을 때 해볼 수 있는 걸 하자, 그래서 창작을 선택했어요. 커피도 타고, 신발장 정리하는 일부터 했죠. 대우받는 일부터 시작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게 지금 저의 자생력과 당당함을 키워준 것 같아요. 저는 넘버원이 아니라 온니원을 바라거든요.”
그녀는 때론 노래보다 연기가 더 자신 있을 때가 있다. 연극배우가 되고 싶은 꿈은 오랜 숙련기간을 거쳐 지금에 이르게 만들었다. 바다는 이미 다음 10년지 대계도 세워놓았다.
“우선 주어진 길을 계속 가야죠. 10년 후에는… 아마 계속 무대 위에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제자들도 있을 것 같고, 아니면 훌륭한 엄마가 되어 있을 거예요.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는 되어 있겠죠.”
이예진
일로 사람을 만나고 현장을 쏘다닌 지 벌써 15년.
취미는 일탈, 특기는 일탈을 일로 승화하기.
어떻게하면 인디밴드들과 친해질까 궁리하던 중 만난 < 이예진의 Stage Story >
그래서 오늘도 수다 떨러 간다. 꽃무늬 원피스 입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