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_ 안테나뮤직 홈페이지] |
<스케치북>
유희열이 tnN
지난 금요일, 오랜만에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시청했다. 밤 12시 20분 방송. 제아무리 금요 심야 방송이라지만 시청률은 2%. 이승환, 다비치, 엠블랙 지오 등 화려한 출연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시청률이다. ‘스케치북’은 토이의 4집 앨범에 실려있는 유희열 작사, 작곡 노래다. 2011년 막을 내린 라디오 <유희열의 라디오천국> 역시, 토이의 노래 제목이다. 약 4년간 방송된 <라디오천국>은 팟캐스트에서도 꽤 높은 인기를 자랑했던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이 역시, 심야 라디오 방송. 제아무리 ‘유희열’이지만 탄탄한 팬층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웠던 것일까. ‘라천민’으로 응집했던 유희열 팬들은 <스케치북> 본방사수에 힘쓰고 있을지 모른다.
<스케치북>은 가끔, 좋아하는 뮤지션이 나올 때만 본방을 챙긴다. 좋은 노래를 들으며 잠을 청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다만, 간혹 음악보다 유희열의 촌철살인 멘트에 귀를 더 기울이곤 한다. 또 방청객 얼굴을 훔쳐 보는 것도 재밌다.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개그콘서트> <유희열의 스케치북> 방청객에게서 본다. 2009년부터 방송되고 있는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개그콘서트> 못지않게 방청권 경쟁이 치열하다. 달달한 커플들의 필수 연애 코스가 <스케치북>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희열을 좋아하는 여자친구를 둔 남자친구는 반드시 <스케치북> 방청권을 따와야, 애인의 자격을 인정받는다는 후문이. 나는 “유희열이 등장할 때마다 ‘끼야’ 소리를 지른 여자친구 때문에 화가 났다”는 지인의 증언을 들은 바 있다.
여자들은 왜 아직도 유부남 유희열을 이토록 좋아하는 걸까. 따져보면 이유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오죽하면 유희열의 연관 검색어 중 하나가 ‘유희열의 매력’이다. 오랫동안 <유희열의 라디오천국>에서 ‘헉소리 상담소’를 진행했던 칼럼니스트 임경선은 유희열의 매력으로 수치심, 자립심, 예민함을 꼽았다. 남자의 매력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단어인가? 싶은데, 이유를 들어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무엇이 부끄러운지를 아는 남자, 젊은 나이에 정신적으로 자립한 자신감이 있는 남자,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예민함, 철저한 민감함을 갖춘 남자가 바로 유희열이다.
우린 누구나 수다가 필요한 사람들
유희열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은 여고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유희열이 졸업한 경복고등학교와 이웃하는 여고였다. 근처에 몇 개의 남고가 있었는데 나의 친구들은 ‘유희열이 졸업한 학교’라는 이유로 경복고를 편애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매우 우습지만, 그 때는 유희열을 좋아하지 않으면 마치 감수성 제로인 여고생 취급을 받았다. 덩달아 유희열이 진행하는 라디오를 녹음하고 토이의 노래 가사를 필사하며 음악 수업을 대신했다. 마른 남자를 싫어했기에 유희열이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토이 노래는 김동률과 비등비등한 마력이 있었다. 「좋은 사람」, 「여전히 아름다운지」,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 「그럴 때마다」, 「거짓말 같은 시간」 등. 학교 수업을 마치고 노래방을 함께 간 친구들은 너도나도 토이 노래를 부르겠다고 마이크를 잡아댔다.
유희열이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1999년 출간된 삽화집 『익숙한 그 집 앞』 속 28살 유희열의 모습이었다. 지금은 절판이 됐지만 유희열의 팬이라면 고이 모셔두고 있을 책.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초판 19쇄 2001년 발행본. 유희열을 무척 좋아하던 친구로부터 받은 나의 스무 살 생일선물이었다. 유희열은 아주 어려서부터 두 가지 꿈을 가졌는데, 그림책과 연주음반을 내는 것이었다. 저자 유희열은 『익숙한 그 집 앞』을 펴낸 소감으로 “이제 아주 어려서부터 꾸어 온 꿈을 실현하게 됐으니 앞으로 십여 년 동안은 그다지 해보고 싶은 일도 없을 것 같다”고 썼다. 난 그 말이 어찌나 질투가 나던지. 그림은 잘 그렸다고는 볼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글 만큼은 정말 재미있었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후속작을 만들어도 될 만큼. 유희열은 추억이 많은 남자였다.
표지부터 프롤로그, 에필로그까지 유희열의 담백한 글은 이제 막 대학생이 된 나에게 “연애 좀 해봐”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익숙한 그 집 앞』에서 나를 가장 질투하게 만든 글은 ‘사랑’ 편에 수록된 에피소드 ‘나를 낮춤으로써 올라갈 수 있을까-하인 놀이’였다.
나를 낮춤으로써 올라갈 수 있을까-하인 놀이 그녀는 흔쾌히 수락했다. (『익숙한 그 집 앞』 p.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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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인상 깊은 에세이는 유희열이 오랫동안 DJ로 사랑 받는 이유를 알게 했다.
우린 수다가 필요한 사람들 (『익숙한 그 집 앞』 p.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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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예능 프로그램에 연달아 출연하는 유희열을 보고, ‘그의 정체성이 무너지지 않을까’ 염려했던 마음이 『익숙한 그 집 앞』을 다시 펴보고는 순간 사라졌다. <스케치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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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
편견을 버리는 것이 어찌나 어려운 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