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패는 왜 모두 1미터일까?
고대 그리스에서 창과 방패는 주력 무기였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창과 방패를 들고 전투에 임했다. 특히 스파르타 군은 방패를 이용한 방진법으로 유명했다.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방패를 이용한 전투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한 이들이 스파르타 군이었다.
글ㆍ사진 이동우
2014.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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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적군을 막는다!”

“우리는 이곳에서 싸운다!”

“저들은 이곳에서 죽는다!”

“이 날을 기억하라. 오늘의 전투가 후대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기원전 480년 7월. 그리스 테르모필레(Thermopylae) 협곡에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Leonidas I)는 이렇게 외쳤다. 스파르타의 용사 300명이 페르시아 제국 크세르크세스(Xerxes I)의 100만 대군에 맞선, 역사에 길이 남고도 남을 날이었다. 스파르타는 역사가 전하는 바와 같이 이 전투에서 단 한 사람도 물러서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아마도 스파르타가 용맹함의 상징으로서 역사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전투의 영향이 매우 컸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후 이런 전투는 두 번 다시 벌어지지 않았다. 300명이 100만 대군을 맞서 7일 동안 벌인 테르모필레 전투는 레오니다스의 외침처럼 2,500년이 흐른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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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다스 동상


이 전투는 영화 〈300〉으로 생생히 묘사되었다. 영화의 결론이자 역사에 기록된 대로 결국 전투는 페르시아 군의 승리로 끝을 맺는다. 만약 스파르타 진영 쪽에서 내통자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협곡 뒤로 돌아가는 샛길을 페르시아 군에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면, 스파르타 군은 100만 대군과 더 오랜 시간에 걸쳐 대등한 전투를 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는 협곡의 넓이를 더 좁게 표현했지만 사실 테르모필레 협곡은 폭이 180미터 정도다. 협곡의 남쪽에는 해발 1,524미터의 칼리드로모스 산이 위치해 있고 산 밑으로는 90미터가 넘는 절벽이 있다. 협곡의 북쪽에도 절벽이 있다. 지형적인 조건으로 봐도 용맹한 스파르타가 승리할 수 있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지형적인 조건만이 스파르타가 100만 대군에 맞설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폭이 좁은 협곡에 300명의 스파르타 정예군이 사격형 대형인 방진을 치고 100만 대군을 기다리고 있다. 스파르타 군은 전투를 할 때 왼팔에 연결된 방패로 몸을 가리고 오른손에는 장창을 들었다. 그리고 이들의 방패는 하나의 벽처럼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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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00〉의 한 장면



페르시아 군 선봉대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밀어닥쳤다. 좁은 협곡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스파르타 군은 아무리 100만 대군이라도 정면으로밖에 공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스파르타 군은 방패로 연결된 이 방진으로 정면 공격은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었다. 결국 페르시아 군은 협곡 입구에서 진을 치고 있는 스파르타 군을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스파르타 군은 단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었지만 페르시아 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방패의 벽을 뚫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페르시아 군의 1차 공격은 무산됐다.


2차 공격은 하늘을 가릴 만큼 쏟아지는 수십만 발의 화살이었다. 일제히 시위를 떠난 화살이 300명을 타깃으로 날아들었다. 순간 시커먼 먹구름이 되어 하늘을 가렸고 땅은 어둠으로 변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에는 방패가 있었다. 몸을 웅크린 채 방패를 하늘로 향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수십만 발의 화살도 방패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협곡에서 정면으로 맞붙는 1차 공격과 2차 화살 공격에 이은 그 다음 전투 장면은 영화 〈300〉에서도 가장 백미로 꼽힌다. 스파르타 군이 둥근 방패를 이용해 페르시아 군에 맞서는 장면으로, 그들의 방패와 창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스파르타가 단 300명으로 100만 대군을 맞아 싸울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방패 덕분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창과 방패는 주력 무기였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창과 방패를 들고 전투에 임했다. 특히 스파르타 군은 방패를 이용한 방진법으로 유명했다.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방패를 이용한 전투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한 이들이 스파르타 군이었다.



호플론1.jpg


호플론의 한 종류

 

스파르타에서는 이러한 방패를 ‘호플론(hoplon)’이라고 불렀다. 호플론을 들고 다니는 병사는 ‘홉라이트(hoplite)’였다. 당시에는 스스로 무기와 갑옷을 갖춰야 했기 때문에 병사들 대부분은 상위 계층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호플론의 지름이 약 1미터였다는 사실이다. 원형으로 다듬은 나무판에 가장 자리를 청동으로 감쌌고, 방패 안쪽에는 팔을 끼워 손으로 단단히 쥘 수 있도록 끝과 손잡이를 부착했다. 어떤 것은 완전한 원이 아니라 홈이 파인 형태도 있었다. 이 홈이 방패를 서로 견고히 연결할 수 있도록 구실했다.


보병은 방패와 방패를 연결해 밀집 대형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를 ‘팔랑크스(phalanx, 방진)’라고 한다. 팔랑크스는 왼쪽 어깨를 앞으로 내밀며 왼팔에 든 방패로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병사를 보호하면서 그 사이로 장창을 겨누는 형태의 밀집 대형인데,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주는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자신이 공격받을 수 있는 공간을 다른 이가 지켜준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전투에 임했던 것이다. 


이왕 방패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만 더 살펴보자. 방패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이기스(aegis)’다. 영어 발음으로 미해군 이지스함의 그 ‘이지스’다. 본래 아이기스는 불의 신이자 대장간의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최고신 제우스를 위해 만든 방패였다. 그 어떤 무기로도 뚫지 못하는 무적의 방패다. 심지어 벼락도 뚫을 수 없다.


그런 아이기스인데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우선 제우스는 이 방패를 자신의 딸이자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에게 선물했다. 이후 제우스의 인간 아들인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처치할 때 아테나가 빌려주기도 했다. 페르세우스는 아이기스를 이용해 메두사의 머리를 베는 데 성공했다. 아테나는 바라보면 누구라도 돌로 만들어버리는 메두사의 얼굴을 이 방패에 붙여 더욱 무서운 무기로 만들었다. 구축함 이지스, 난공불락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나은 이름은 없어 보인다.


방패라는 방어구는 전투 시 근접 무기는 물론 원거리에서 날아오는 발사체를 막아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현대식 무기가 발명되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사용되었다. 물론 요즘도 여전히 경찰에서는 살상 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방패를 사용한다. 또한 흔히 방패가 금속으로 만들어졌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휴대하기 좋도록 가벼운 목재를 주재료로 조합해 생산되었다.


모양도 가지각색이었다. 역사적으로 방패의 종류와 명칭은 수없이 많은데 모두가 원형은 아니다. 카이트(kite) 실드라고 해서 서양 연 모양의 방패도 있었으며 통칭 타워(tower) 실드라고 부르는 사각형도 있었다. 로마 군단병은 ‘스큐텀(scutum)’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장방형 방패를 이용해 완벽한 벽을 만들어 전투를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역시 휴대성 등의 한계로 점차 원형 방패로 바뀌게 된다.


고대 그리스 지역은 스파르타와 마찬가지로 ‘아스피스(aspis)’라 부르는 원형 방패를 사용했는데 호플론과 마찬가지로 지름이 1미터 정도다. 전투를 하지 않을 때는 끈으로 묶어 등에 매달거나 말안장에 걸어두었다. 영화 〈트로이(Troy)〉에서 아킬리스가 둥근 방패를 등에 메고 뛰는 장면을 연상하면 된다.


그런데 왜 방패는 1미터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졌을까? 1미터 정도라면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우산의 지름쯤 된다.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넓이이자 이동의 간편성을 생각했을 때 적당한 크기라고 본 듯하다. 체구가 매우 큰 사람에게 1미터는 작은 공간일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성인 남성 키가 170~180센티미터이니 지름 1미터의 보호 공간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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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거리와 공간에 대한 중요한 기준점이 존재한다. 나와 상대방 사이의 거리 및 나의 방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방패의 크기 그리고 이동성과 휴대성을 고려할 때의 크기 사이에서 적절한 합의점을 찾는 것이 포인트다. 


로마 군단병의 방패는 직사각형의 형태였지만 가로의 폭은 1미터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스파르타의 방패도 지름이 약 1미터였다. 휴대성을 더욱 간편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 일부 국가에서는 지름 90센티미터짜리 방패를 사용했다는 기록도 접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작은 방패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길이의 길고 짧음과 모양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모든 경우에서 방패가 공통적으로 1미터 정도의 크기였다는 사실은 전투에서 최소한 1미터 정도의 공간이 확보되어야 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인간은 최소한 1미터의 공간을 확보하고 살아야 하는, 1미터의 공간을 확보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적 존재다. 그 1미터가 개인이 생존하기 위해 타인과 떨어져야 하는 거리이고,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서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 대한 본능이 우리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이 거리를 확보하고 지켜내기 위해 수많은 선택을 하게끔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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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턴스 이동우 저 | 엘도라도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왔던 공간의 중요성을 깨우치고 비즈니스와 인생의 새로운 접근방식을 제시한 최초의 공간관리 비즈니스북이다. EBS 지식채널 ⓔ ‘퍼스널 스페이스’ 편에서 방영된 내용의 수십 배에 달하는 사례를 담았다. 3년에 걸친 취재와 분석 끝에 인문ㆍ역사ㆍ예술에서부터 사회ㆍ문화ㆍ생활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를 망라했다. 지금까지 접하지 못했던 독창적인 연구와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한 이 책이 ‘공간을 읽는’ 예리한 안목을 키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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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디나스 #영화 300 #호플론 #크세르크세스 #300 #디스턴스 #이동우
4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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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rfati2

2014.03.31

인간은 공간적 존재고 생존하기 위해 타인과 떨어져야 하는 거리가 있으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퍼스널 스페이스에 대한 설명에 정말 공감합니다. 최근에 인터넷에서 논란이 되었던 사건에서도 느꼈지만 애초에 논란거리가 될 일도 아닌 일이 논란이 된 것도 이상했지만 무엇보다 아무리 좋아해도 지켜줘야 할 개인적 공간이란게 있는데, 좋아하면 뭘 해도 된다는 생각이나 좋아해주면 무슨 짓을 해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요구는 종종 너무 폭력적이어서 불쾌감을 일으키더군요.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퍼스널 스페이스를 고려하지 않은 무례일 뿐인 행위를 호의와 호감으로 혼동하는걸 보게 될 때 마다 그리고 이해와 동의, 존중과 배려없이 그 공간을 침범하는 행위를 하고서 그에 대해서도 무감각한 이들을 경험하게 될 때 마다 느껴지는 답답함과 거부감을 설명해주곤 하지만 좀처럼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요. 불쾌감을 느끼는 쪽에선 기본적인 존중과 배려를 얘기하는 거지만 그런 침범 행위에 무감각한 이들에겐 그저 정이 없고 쌀쌀맞으며 불필요하게 예민하고 사회성이 부족한 피곤한 개인주의자 정도로 인식되거나 때론 그의 인성까지 함께 거론되어서 씁쓸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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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우산

2014.03.29

빼곡한 우산을 보니,헉. 역시 사람과의 거리 생존할 수 있는 공간은 필요하네요.
방패를 이용한 방진법도 일정 거리가 없으면 무효하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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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얀별

2014.03.28

방패의 가로폭이 대부분 1미터 정도였다니.. 그리고 그 이유도 흥미롭네요.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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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

저널리스트. 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에서 저널리즘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2004년 12월부터 2008년 9월까지 5년간 약 300회에 걸쳐 진행한 ‘북세미나’는 강연 저자 299명, 참석 인원 4만 4,000명이라는 기록을 남기며 언론과 출판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경제〉기업정보팀, 미래넷 교육사업본부, 이코퍼레이션, JCMBA 전략기획실,〈한국일보〉백상경제연구원에서 일했다. 현재 저널리스트로서 대중에게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고자 방송과 강연 그리고 저술 활동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세계는 울퉁불퉁하다》《밸런스 독서법》《앱티즌》《아이프레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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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

비즈니스 혁신 전략가, 작가, 칼럼니스트, 방송인. 비즈니스 트렌드와 인사이트를 연구해 대기업 리더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해왔다. 2014년부터 매주 한 권의 경제경영 도서 속 인사이트를 정리해 소개하고 있는 콘텐츠 전문가이기도 하다. 이 콘텐츠는 SK그룹, CJ그룹 등 수많은 비즈니스 현장의 리더와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지식으로 전달되고 있다. EBS EBR Plus에서 <디커플링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의했고, KBS 1FM <라디오 매거진 위크 앤드>에서 주요 경제경영서를 소개했으며, 연합인포맥스(연합뉴스경제TV)에서 <이동우의 비즈니스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 롯데 등 임원 및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4차 산업혁명 및 디지털 전환과 관련한 강의와 컨설팅을 해왔다.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디지털 전환을 위한 경영전략 컨설팅 맵’을 완성했고, 이 책에 그에 대한 핵심 노하우를 담았다. 또한, 그 내용을 바탕으로 한국능률협회와 <디지털 전환과 혁신을 위한 워크샵 및 컨설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한림대학교를 졸업했고, 2021년 ‘자랑스러운 한리머 상’을 수상했다. 연세대학교 저널리즘으로 인문 석사를 받았고,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비즈니스 트렌드 분석’ 강의를 맡았다. 고려대학교 고령사회연구센터 센터장으로 시니어 비즈니스 전략 연구 및 컨설팅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같은 주제로 삼성경제연구소 SERI CEO에 출연하고 있다. 12권의 경제경영서를 썼고, 대표작으로는 《나는 심플하게 말한다》, 《미래를 읽는 기술》, 《이동우의 10분 독서 101》, 《혼자 일하는 즐거움》, 《그리드를 파괴하라》, 《디스턴스》, 《앱티즌》, 《세계는 울퉁불퉁하다(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