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요 작가의 책장
단요 작가가 요즘 애정하는 『케스 매와 소년』, 『쇠렌 키르케고르 입문』, 『서구종말론』, 음반 , 영화 <네트워크>.
글 : 단요
2025.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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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스 매와 소년』

배리 하인즈 저/김태언 역 | 녹색평론사


제가 중학생 나이였을 때 가장 좋아했던 청소년소설입니다. 아직도 집에 두고 있지요(가지고 있는 것은 동 출판사의 1998년도 출간본입니다). 이 소설이 성장소설로서 가지는 미덕은, 상실과 고통을 감히 극복하거나 보충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소설들은 종종, 하나가 가면 다른 하나가 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잃었지만 저것을 얻었으니 좋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건 대부분의 경우에 달콤한 거짓말입니다. 우리 삶에는 어떤 것도 얻지 못하는 상실,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실이 있으며 그 받아들이는 태도만이 유일한 성취로 기능하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아이들의 삶은 그러한 사건들의 연속이지요.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기를 선택하고, 매 순간 패배하지만, 그래도 계속 무언가를 선택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계급적 불평등과 세계를 박탈당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60년대의 소설이지만 지금 읽어도 큰 울림을 줍니다.

 



『쇠렌 키르케고르 입문』

존 스튜어트 저/이창우, 최정인 역 | 카리스아카데미


키르케고르는 신학은 물론이고 문학부터 철학까지 전방위적인 영향을 끼친 사상가지만, 특유의 복잡성으로 인해 곧잘 도식화된 수준에서의 이해만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잦습니다. 좋은 입문서란 그 분야에 사전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이 읽더라도 새로운 관점과 지평을 얻어갈 수 있는 책일 텐데, 이 책이 바로 그렇습니다. 아이러니 개념을 통해 키르케고르의 초기 저작과 생애를 들여다봄으로써 그의 후기 중요 저작에 대한 엄밀한 렌즈를 제공하는 동시에, 현대사회의 자유주의-상대주의-보편주의적 혼란에 대응할 이론적 자원을 제공하지요. 자세한 것은 직접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서구종말론』

야콥 타우베스 저/문순표 역 | 그린비


종말론이라고 하면 보통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를, 허무하거나 파괴적인 실패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종말론은 기독교의 핵심 원리고, 서구 철학은 종종 세속화된 신학이며, 서구적 정치원리와 역사 인식 또한 그렇습니다. 가령 고대 그리스든 힌두든 꽤 많은 종교는 순환적인 시간관을 채택하지만, 기독교의 시간관은 지금 주어진 세계 바깥의 종말/구원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가는 형태를 취함으로써 ‘지금 세계의 끝과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의 변혁’에 대한 상상력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단의 첫 번째 문장을 바꾸어 쓴다면, “종교적 광신은 어떻게 역사와 사상을 추동하는 기본 프레임으로 번역되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 책은 먼 시간을 거슬러 오르며 그 질문에 응답하는 과정입니다. 흥미롭고 유익합니다(동 저자의 『바울의 정치신학』도 추천합니다).

 



음반 Cool World

Chat Pile


상품화된 음악들은 필연적으로 당대의 시장과 세계 인식을 반영하지만, 후기자본주의와 산업사회에 포커싱을 맞춘다면 그 대표격은 하드코어 - 그런지/얼터너티브/뉴메탈 - 슬럿지 메탈의 연속체가 될 것입니다. 90년대에, 이 덩어리들은 세기말적이고 자기파괴적인 우울과 허무주의를, 분노와 소외감과 공포를, 또한 거기에 기반한 반항의식을 드러내곤 했지요. 30여 년이 흘렀습니다. 2010년대 초반의 들뜬 분위기는 가라앉고 두려움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 흐름의 한 갈래고, 멋진 앨범입니다. 6번 트랙부터 8번 트랙까지의 연결, 즉 Tape - The New World - Masc는 각별히 매혹적이니 이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필청을 권합니다(물론 다른 트랙들도 훌륭하고, 가사가 정말 좋습니다! ― 직전 앨범인 God’s country의 수록곡인 Why도 추천합니다).



 

영화 <네트워크>

시드니 루멧 감독 


시드니 루멧의 1976년 영화로, 시청률을 쫓는 매스미디어 산업의 작동 원리가 핵심 소재입니다. 물론 방송사들이 시청률에 목을 매고 자극적인 이야깃거리를 찾아다니는 건 유구한 역사니까 이 자체로는 특별할 게 없겠지요. 영화는 매스미디어가 프릭쇼적 광기와 종교적 신성, 체제 저항적 목소리를 하나로 뭉뚱그려 다시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기작을 명료하게 그려냅니다. 경제생활이 불가능한 광인과, 종교적 초월과, 반자본주의는 모두 상품이고 따라서 자본주의적인 것입니다. 매스미디어는 뛰어난 조련사고요.

 

반세기가 흐른 지금은 유튜브를 비롯한 개인 미디어들이 이 역할을 물려받았지만 전반적인 구도는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그것은, 이 조련사의 고용주가, 실은 시청률로 표상되는 우리 모두의 총의이기 때문일 것입니다(영화는 이 사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모든 죄업을 매스미디어에 돌리는 대신 관객들을 적극적으로 연루시킵니다). 저는 참 방송이라는 게 싫고 연예계라는 것도 싫습니다. 제일 싫은 것은 저 혼자 그것들을 거부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의 사랑 속에 이 세계가 이대로 지속되리라는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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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스 매와 소년

<배리 하인즈> 저/<김태언> 역

출판사 | 녹색평론사

쇠렌 키르케고르 입문

<존 스튜어트> 저/<이창우>,<최정인> 역

출판사 | 카리스아카데미

서구종말론

<야콥 타우베스> 저/<문순표> 역

출판사 |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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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요

2022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장편소설 《다이브》, 《인버스》, 《마녀가 되는 주문》, 《개의 설계사》,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목소리의 증명》, 《피와 기름》, 《트윈》, 중편소설 《케이크 손》, 《담장 너머 버베나》, 소설집 《한 개의 머리가 있는 방》, 르포 《수능 해킹》(공저)을 썼다. 2023년 문윤성SF문학상과 박지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24년 문학동네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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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콥 타우베스

빈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 192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스위스 취리히에서 자랐다. 대랍비였던 아버지로부터 정통 랍비 교육을 받았으나, 곧이어 바젤 대학과 취리히 대학에서 철학과 역사를 공부했다. 1947년 취리히 대학에서 『서구 종말론의 체계와 역사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9년부터 뉴욕 유대신학교에서 종교철학 강사로 일했으며, 이때 레오 스트라우스에게서 개인적으로 사사했다. 또한 이 시기에 한나 아렌트 및 파울 틸리히와 친분을 쌓기도 했다. 게르숌 숄렘의 초청으로 1951년부터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종교사회학 강사로 활동했으나, 숄렘과의 갈등으로 인해 2년 뒤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록펠러 장학 재단의 도움으로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시에 프린스턴 대학에서 초빙교수로서 가르쳤다. 1956년 컬럼비아 대학의 종교사 및 종교철학 정교수가 되었으며, 1966년부터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해석학 연구소와 유대학 연구소를 이끌었다. 이와 더불어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 라인하르트 코젤렉, 한스 블루멘베르크 등과 함께 ‘시학과 해석학’(Poetik und Hermeneutik) 프로젝트의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세기 최고의 법학자 칼 슈미트와 특이한 편지 친구였으며, 2005년 출간된 유고 편지를 통해 오스트리아의 여류 시인 잉게보르크 바흐만과 밀월 관계였음이 밝혀졌다. 이 책에 수록된 강연을 행한 지 불과 한 달 뒤인 1987년 3월 베를린에서 숨을 거두었다. 주요 저서로 『서구 종말론』(1947), 『칼 슈미트에게: 적대적 친분』(1987), 『제의에서 문화로』(199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