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이 사용했던 언어를 읽으면 좋은 다른 이유는 바로 인용을 하기 위해서다. 글이나 말에 힘을 싣기 위해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 인용이다. 현존한 인물이든 역사에 존재했던 과거 사람이든, 분야에서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 자신의 글에 힘이 붙는다.
이런 이유에서 ‘세계의 명언’ 부류의 책은 오랫동안 꾸준히 나왔다. 이윤재, 이종준 저자가 쓴 『말 콘서트』도 기본적으로는 그런 책이다. 동서고금을 수놓은 다양한 말을 각 인물의 유형별로 나눠서 소개한다. 명언을 수록한 일부 책은 말이 나온 시대적 공간적 배경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은 단순히 말만 소개하지는 않는다. 그 말이 나온 맥락과 함께 저자 자신의 이야기도 담았다.
1978년도에 『히틀러 스탈린 헤르츨의 정신분석』(원제: The Psychoanalytic Interpretation of History)이라는 역서를 낸 바 있다. 국제정치와 세계역사와 정신분석의 영역을 아우르는 학술 서적이다. 획기적인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학제간의 교류가 없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서야 여러 학문 분야를 융합하는 학제적 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가 학문의 필수로 대두했기 때문이다. 이 책 『말 콘서트』 저술 역시 외도가 아니라 저술 영역의 확대일 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적인 인물의 말로 채웠다. 자료를 조사하고 취합하고 배치하는 게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저술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방면의 영어원문을 접하면서 리파티(repartee 재치즉답)에 관한 자료를 꾸준히 수집해왔다. 반(半)학술적(semi-academic) 성격의 대중 친화적인 내용도 많았다. 초급ㆍ중급ㆍ고급 독자들을 모두 만족하게 할 수 있는 가독성 있는 인문학 서적을 써 보겠다는 욕심이 싹텄다. 따라서 이 책은 내가 10년 동안 채집한 자료의 산물이다.
리파티? 생소한 단어다.
말의 장르는 인간의 감정만큼이나 다양하다. ‘먹히는 말’ ‘솔깃한 말’ ‘필이 꽂히는 말’ ‘심금을 울리는 말’ ‘반박할 여지가 없는 말’ ‘상대를 납작하게 하는 말’ 등등 수없이 많다. 어디 그뿐인가! ‘반박(tit-for-tat)’ ‘재치즉답’ ‘응구첩대’도 있다. 응구첩대(應口輒對 응할 응 ㆍ 입 구ㆍ문득 첩ㆍ대할 대)란 ‘묻는 대로 거침없이 대답함’이란 의미다.
이 중에 리파티(repartee 재치즉답)는 하나의 장르를 이루고 있다. 리파티는 ‘단박에 한 방의 말 펀치로 받아쳐 상대를 압도하는 말대꾸’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리파티’라는 용어조차도 생소하다. 2006년 나는 <신동아>에서 ‘리파티’를 ‘재치즉답’으로 번역했다.
마크 트웨인, 오스카 와일드, 링컨, 처칠, 레이건 등이 리파티를 능란하게 구사했다. 준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상대의 발언에 따라 즉시 대응해야 하는 즉시성(instantaneity) 때문에 리파티는 값이 많이 나간다. 말 중에서 단연코 가장 화력(話力)이 센 장르를 꼽으라면 리파티이다. 말의 정원에서 가장 돋보이는 꽃은 골계(滑稽 풍자ㆍ해학ㆍ기지ㆍ반어 등 웃음을 자아내는 요소) 넘치는 리파티이다. 각종 나물을 양념으로 비비듯 이 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동서고금의 문필가ㆍ사상가ㆍ철학가ㆍ종교인ㆍ정치인ㆍ배우 등이 쏟아내는 리파티와 어록을 싣는다. 리파티와 어록 사이사이에는 그들의 철학ㆍ심리ㆍ가치관과 당시 상황과 역사적 배경을 함께 소개한다.
분량이 방대한데, 어떤 부분을 앞으로 배치할지, 어떤 부분을 뒤로 배치할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구성할 때 중요하게 고려한 점이 있다면?
사실 그랬다. 영국 역사가 토인비(1889~1975)는 『Civilization on Trial 문명의 시련』(1948)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예술가와 문필가의 작품은 경영인, 군인, 정치가의 공적보다 생명이 길다. 시인과 철학자는 역사학자보다 더 멀리 내다본다. 반면에 예언자와 성인은 이들 모두를 능가하며 이들 모두보다 오래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말이 은연중 구성과 배치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이 책을 독자들이 어떻게 읽었으면, 혹은 이용했으면 하나?
처음부터 읽는 것도 좋겠지만, 독립된 짧은 각각의 이야기를 모은 옴니버스 형식을 빌려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목차를 보고 흥미롭다고 생각하거나 관심이 가면 먼저 읽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펼쳐지는 대로 읽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다가 이 책에 매력을 느끼게 되면 처음부터 정독하면 될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문구가 있다면?
과거와 현재를 갖고 싸우면, 이미 미래를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처칠
비관론자는 모든 기회에서 어려움을 본다. 낙관론자는 어려움에서도 기회를 본다. - 처칠
성공했다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니다. 실패했다고 해서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하려는 용기다. - 처칠
백악관은 세계에서 시설이 가장 좋은 감옥이다. - 트루먼
대통령은 끝없이 사건을 처리한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사건이 곧 대통령을 처리한다. - 트루먼
결코 두려워서 협상을 해서도 안 되며, 결코 협상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 케네디
사람들은 항상 나를 쳐다본다. 내가 마치 사람이 아니라 거울인 것처럼. 그들은 나를 보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음란한 생각을 본다. 그리고는 나더러 음란하다고 비난함으로써 자신들은 순결한 척한다. - 먼로
수사학과 인문학은 어떤 관계인가?
한 젊은이가 소피스트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자신이 첫 번째 소송에서 이기도록 가르쳐주면 엄청난 수업료를 내겠다고 했다. 마침내 젊은이는 재판에 필요한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수업료를 내려 하지 않았다. 소피스트는 제자를 고소했다. 스승과 제자가 법정에 나란히 섰다. 스승이 주장했다. “내가 이긴다면 당연히 수업료를 받아야 한다. 젊은이가 이겨도 수업료를 내야 한다. 젊은이는 첫 번째 소송에서 이기게 해주면 수업료를 내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젊은이가 주장했다. “나는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 재판에서 이긴다면 당연히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 재판에서 져도 낼 필요가 없다. 첫 재판에서 이겼을 때만 수업료를 내기로 했다. 첫 재판에서 졌는데, 왜 수업료를 내야 한단 말인가.”
위의 이야기는 성품과 감정은 없고 궤변과 아집만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384 BC ~ 322 BC)에 따르면 ‘수사학은 남을 설득하는 기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성품, 감정, 논리를 설득의 기본으로 삼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품이다. 말이 어눌하면 어떤가! 사람 됨됨이가 못되면 유창한 말에도 의심이 간다. 그 후 수사학은 고대 로마의 웅변가요 철학자인 키케로(106 BC ~ 43 BC)를 거쳐 전인교육의 기초로써 중세에 크게 발달하였다.
서양에서 인문학은 휴머니티(humanity), 정확히 말해서 the humanities라 한다. 이 말은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유래했는데, 인간다움이라는 뜻이다. ‘후마니타스’라는 말은 키케로가 기원전 55년에 저술한 <데 오라토레 De Oratore>, 즉 <웅변가론 On the Orator>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에서 문법ㆍ수사학ㆍ문학ㆍ역사ㆍ철학 등이 인문학 범주에 속했다. 한국인은 서양의 인문학을 접하기 전 이미 오랜 기간에 걸쳐 유교적 인문의 전통 속에 자연스럽게 살아왔다. 오늘날 대학 교육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문학ㆍ사학ㆍ철학 등 인문학 교육과 의학ㆍ법학ㆍ공학 등의 전문직업인 교육이다.
책의 무제가 ‘지루할 틈 없이 즐기는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뭐라고 생각하나?
‘후마니타스(인간다움)’란 말처럼 원래 인문학은 현실적 효용성과는 무관하다. 인간과 세상에 관한 깊은 이해와 성찰을 바탕으로 인간성을 고양하여 ‘온전한 인간’으로 성숙하게 하는 것이 인문학의 목적이다. 인문학은 인격 함양, 정서 함양, 의식 함양 - 구체적으로 말하면, 관용과 상생의 정신, 균형 잡힌 역사의식, 사회를 보는 시각, 문화적인 풍요를 키워나가는 방법 등을 함양 - 하는 데 필수적인 학문이다. 이러한 인간에게서 은은한 인문의 향기가 난다. 선진문화는 인문정신에서 나온다.
4월 23일은 책의 날이다.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관해 말해 달라.
세계 각처를 직접 돌아다니지 못하더라도 여행기를 통하여 간접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간 과거나 돌아올 미래는 책만이 대변할 수 있다. 따라서 책은 이류의 가장 으뜸가는 문화자산이다. 따라서 ‘책의 날’은 곧 ‘문화의 날’이다.
앞으로 쓰고 싶은 책이 있다면?
자극적인 제목으로 독자의 관심을 끌고 있는 책들의 리스트는 끝이 없다. 금방 영어를 숙달할 수 있을 것 같고, 삽시간에 점수가 팍팍 올라갈 것 같다. 쉬운 이론은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어려운 부분은 무조건 외우라고 한다. 이런 ‘꽝’ 아니면 ‘맹탕’인 책을 손에 쥐면 금전과 시간만 허비한다. 이런 책이 아니라 영어 학습 영역의 유기적 관계를 중시한 문법을 기반으로 독해, 작문, 회화를 동시에 제압하는 방법을 확실히 제시하는 책을 쓰고 싶다. 학원 한번 안 다니고 혼자서 영어를 내 손안에 쥘 수 있는 책. 수천 년이 지나도 한반도 사방팔방에서 그 생명력이 유지되는 그런 책이면 좋겠다. 변변한 학습서가 나오면 사교육도 고개를 숙일 것이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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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콘서트 이윤재,이종준 공저 | 페르소나
동서고금 내로라하는 인문들이 쏟아내는 말의 향연을 담아낸 책이다. 대문호 예술가 철학자 성직자 등의 리파티ㆍ어록, 영웅들의 말들이 전율과 울림, 대통령 총리 주석 등, 촌철살인의 리파티를 등의 말들을 들여다본다. 총 7부로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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