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캡틴 아메리카:윈터 솔져>가 흥행성공은 물론 작품성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한 단계 더 올라섰다. 코믹스에서 시작했지만, 코믹스를 바탕으로 또 다른 ‘유니버스’를 만들어내는 마블의 전략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마블은 2028년까지 코믹스를 기반으로 제작할 영화, 드라마를 이미 세팅해 두었다고 한다. 한때 파산 지경에 이르렀던 마블이 재기에 성공한 원천은 무엇보다 그들의 자산인 코믹스, 그래픽노블이었다. 스파이더맨과 엑스맨의 판권을 이미 다른 회사에 팔아넘겼지만 아이언맨, 토르, 헐크, 캡틴 아메리카 등의 수많은 슈퍼히어로와 슈퍼빌런을 가지고 있었기에 새로운 유니버스의 창조에 성공한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슈퍼히어로 만화, 그래픽 노블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전개하여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일까? 그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
왼쪽부터 순서대로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 영화포스터,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얼티밋 컬렉션 그래픽 노블 이미지,버크 로저스 (출처 :wikioedia)
미국 만화에 등장한 최초의 히어로는 1929년의 <버크 로저스>다. 펄프 잡지에서 인기 있었던 스페이스 오페라의 주인공처럼 우주에서 외계인 악당, 괴물과 싸우는 슈퍼히어로였다. 당시의 슈퍼히어로는 <타잔> <섀도우> <독 새비지> 등 펄프 잡지의 인기 캐릭터들과 유사했다. 1934년에는 최초의 만화잡지 <페이머스 퍼니>가 등장한다. 다음 해인 1935년에는 DC코믹스의 첫 만화잡지인 <뉴 펀>이 발매된다. 36년에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복면을 쓰고 등장하는 히어로 <더 팬톰>이 처음으로 신문 연재만화에 등장한다.
슈퍼히어로의 대명사인 슈퍼맨이 등장한 것은 1938년이다. <슈퍼맨>이 <액션 코믹스>(DC코믹스)에 나온 다음 해에는 <배트맨>이 <디텍티브 코믹스>에 등장한다. <배트맨>의 등장은 금주법의 여파로 갱 조직이 미국 전역으로 확장되며 위세를 떨칠 때였기에 대중의 공감을 샀다. 경찰도 지켜주지 않는 세상에서 믿을 것은 차라리 자경단이었다. 39년에는 DC코믹스의 영원한 라이벌 마블 코믹스의 전신인 타임리 코믹스가 <마블 코믹스>를 창간하고 <서브 마리너> <휴먼 토쳐> <샌드맨> 등을 등장시킨다. 2차 대전 이전까지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미국 코믹스는 황금시대를 누리고 있었다. 전쟁 시기에는 슈퍼히어로가 독일군과 일본군을 물리치는 애국주의적 영웅으로 바뀌거나 캡틴 아메리카처럼 나치를 무찌르는 슈퍼히어로가 탄생한다. 쉴드의 퓨리 국장도 1, 2차 대전에 참전한 백인이었고, <얼티미츠>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는 다른 설정이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디텍티브 고믹스, 액션 코믹스, 판타스틱 포 (출처 wikipedia)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3년에는 조지 리브스 주연의 <슈퍼맨> TV시리즈가 시작되어 57년까지 장수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누린다. 당시만 해도 코믹스는 아이들을 위한 매체였다. 코믹스의 세계는 단순명쾌했고, 현실사회를 단순화시킨 권선징악으로 모든 설명이 가능했다. 그러나 인기를 끌었던 만화 중에는 DC코믹스에서 주로 발간한 괴기스럽고 폭력적인 작품들도 있었다. 지나친 폭력성에 불안감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고, 1954년 심리학자 프레데릭 워섬은
그러나 선과 악이 모호해지고, 세대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한 1960년대가 시작된다. 만화는 요동치는 사회를 반영하기 시작한다. 1961년 마블 코믹스의 <판타스틱 포>를 시작으로, 스탠 리와 잭 커비 콤비가 이끄는 마블 혁명이 일어난다. 이안 감독의 영화 <아이스 스톰>에는 대학생인 토비 맥과이어가 <판타스틱 포>를 열심히 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판타스틱 포>에서 타락한 기성세대와 돌연변이가 된 젊은 세대의 갈등을 바라보고 있다. 1963년 등장한 <엑스맨>은 태어날 때부터 ‘돌연변이(뮤턴트)’인 엑스맨을 등장시켜 사회적인 문제를 건드린다. <스파이더맨>은 62년에 등장했다. 한편 1960년대부터 코믹스는 흥행적인 요소들이 강해진다. 각각 다른 만화로 등장한 캐릭터가 동맹을 맺거나 대결하는 작품이 나오고, 애니메이션과 머천다이징 사업에도 주력한다. 65년에는 <슈퍼맨> 애니메이션이 시작되고, 68년에는 마블의 캐릭터들이 함께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마블 슈퍼히어로즈 & 스파이더맨> <판타스틱 포 쇼> 등이 등장한다.
70년대는 만화독자가 대폭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한 위기의 시대다. 청소년 독자가 줄어들고 독자의 연령층이 높아진다. TV, 영화 등 경쟁 매체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만화를 봐오던 마니아 이외의 젊은 세대를 확충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DC와 마블은 합작 영화를 제작하려고도 하고, 76년 <슈퍼맨 대 스파이더맨>에 이어 <배트맨 대 헐크> 등 DC와 마블의 인기 캐릭터가 함께 등장하는 만화를 연달아 내며 연합전선을 핀다. 77년 마블이 <스타워즈>를 독자적인 스토리로 만화를 낸 후 <코난 더 바바리안> <인디애나 존스> <에이리언> <프레데터> 등 영화의 인기 캐릭터를 코믹스로 옮기는 일도 잦아진다. 1978년에는 크리스토퍼 리브 주연의 <슈퍼맨>이 제작비 44만 달러의 초대형 ‘블록버스터’로 만들어져 대성공을 거둔다.
악몽 같은 70년대를 보낸 만화업계는 자구책으로 코믹스의 고급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독자의 연령층이 높아지고, 과거 작품들이 비싼 컬렉션으로 팔리는 것을 본 DC와 마블은 ‘특별판’을 남발한다. 82년 마블 코믹스에서는 고급지를 사용한 <마블 팬페어>를 발매하고 계속해서 고급한 그래픽 노블을 출간한다. 그러나 시장이 축소된 상황에서 마니아와 수집상들을 대상으로 특별판을 남발하던 만화업계는 계속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986년 앨런 무어의 <왓치맨>과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다크 나이트 리턴즈>가 등장하며 코믹스의 ‘혁명’을 이루어내기 전까지, 1986년을 기점으로 한 미국 만화의 변화는 68년의 영화혁명에 비견될 수 있는 거대한 혁명이었다. 음침하고, 폭력적이고, 심각하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슈퍼히어로는 마침내 유년기를 마감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코믹스’는 일면적인 영웅의 모습에 과격한 묘사와 정치와 철학을 투사하여 ‘성인의 문학’으로 끌어올렸고 표현 테크닉이 복잡해지고 더욱 실험적이 되었다. 모든 면에서 아이들의 오락만이 아닌 명실상부한 성인의 ‘그래픽 노블’이 된 것이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슈퍼맨 vs어메이징 스파이더맨, 마블 팬페어
그래픽노블 <왓치맨>, 그래픽노블 <샌드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왓치맨>의 성공으로 DC 코믹스는 닐 게이먼의 <샌드맨> 등이 포함된 성인 취향의 ‘버티고’ 시리즈를 출범시킨다. 1988년 배트맨의 탄생비화를 그린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이어 원>, 죠커의 탄생비화를 그린 앨런 무어의 <킬링 조크>가 대성공을 거둔다. 또한 언더그라우드 만화계에서는 아트 스피겔만의 <쥐>가 퓰리처상을 수상하여 마침내 코믹스가 예술로 인정받게 된다. 88년은 애니메이션 <아키라>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비롯하여 많은 일본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미국 시장에 보급된 해이기도 하다. 또한 팀 버튼의 <배트맨>이 개봉하며 흥행 성공을 거두고, 슈퍼히어로 영화가 정서적 깊이와 예술성을 담보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부모의 살인범에 대한 증오심에 사로잡힌 채 범죄자 사냥의 정당성을 찾으려 방황하는 배트맨. 자신의 범죄를, 현실을 초월한 예술로 완성시키려는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범죄자 조커. 극단적인 빛과 그림자가 지배하는 고담시의 음울한 풍경 등 팀 버튼의 <배트맨>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프랭크 밀러와 알란 무어의 그래픽 노블이 있었다.
미국의 코믹스는 90년대에도 혁신을 거듭한다. DC코믹스는 자신의 캐릭터를 스크린과 TV에서 활약하게 만들었고 만화업계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92년에는 토드 맥팔레인, 짐 리 등이 작가가 창조한 히어로의 권리를 만화사가 갖는 것에 반발하여, 작가가 저작권을 소유하는 새로운 회사 ‘이미지 코믹스’를 설립한다. <스폰> <와일드 캐츠> <사이버 포스> 등 화려한 그림과 격렬한 액션 장면으로 태풍의 눈이 되었지만 오랫동안 세력을 유지하지는 못했다. 1990년대에도 뛰어난 작품이 대거 등장하기는 했지만 시장은 확대되지 않았다. 여전히 만화는 아이들, 소수 마니아들이 열광하는 오락이고 문화예술이었다. 마블은 파산 위기에 몰리면서 <엑스맨>, <스파이더맨>, <판타스틱 포> 등의 판권을 팔아 연명한다. 디즈니에 인수되기 전까지 마블의 지위는 위태로웠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영화 <스파이더맨>포스터,영화
영화 <어벤져스>포스터, (아래) 드라마 <에이전트 오브 쉴드>
하지만 마블은 <엑스맨>과 <스파이더맨>이 영화로 만들어져 대성공을 거두는 모습을 확인하고, 영화사를 만들어 독자적인 영상화 전략에 나섰다. 첫 단추인 <아이언맨>이 성공을 거두고 <토르> <인크레더블 헐크> <캡틴 아메리카:퍼스트 어벤저>에 이어 마침내 <어벤져스>로 1기의 정점을 찍었다. 영화화 판권이 넘어간 스파이더맨과 울버린이 빠진 어벤져스를 만들기 위해 정부가 주도하는 어벤져스 스토리의 코믹스 <얼티미츠>를 시작한 것도 주효했다. 마블은 영화와 드라마, 게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만들어내며 DC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70년대의 <슈퍼맨>과 80년대의 <배트맨> 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등을 만들어 영화화에 일가견이 있다고 평가되었던 DC는 마블에게 선수를 뺏기며 주춤했다. 놀란의 <다크 나이트> 3부작이 성공을 거두었지만, 지나치게 어둡고 크로스오버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는 점이 안타깝다. 대신 DC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맨 오브 스틸>의 2편을 <슈퍼맨 VS 배트맨>의 스토리로 이어가고 원더우먼까지 등장시킬 예정이다. 성공을 거두면 바로 <저스티스 리그>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마블이 영화에서 대성공을 거둔 이유는 기존의 캐릭터 덕분이다. 이미 코믹스에서 만들어낸 풍성한 캐릭터와 다양한 스토리가 수없이 존재하기에, 제대로 변주하기만 해도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한 <어벤져스>의 스토리가 드라마 <에이전트 오브 쉴드>로 이어지고, 다시 <캡틴 아메리카:윈터 솔져>의 이야기와 넘나들면서 거대한 유니버스가 구성되고 있다. 몰라도 영화 따로, 드라마 따로 즐길 수 있지만 영화와 드라마를 함께 본다면 더욱 풍성한 캐릭터와 스토리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캐릭터들이 성장해왔던 코믹스를 본다면 더욱 더 흥미롭다. 영상으로는 다 보여줄 수 없는 세세한 설정과 그들의 마음, 복잡다단한 주변 상황까지도 볼 수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2028년까지의 영화화 계획이 모두 잡혀 있다는 마블의 선언은 의미심장하다. 마블의 수많은 캐릭터들을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니까. 이미 나온 코믹스들이 더욱 더 궁금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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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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