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나란히 마주하고 서서 대화하듯 완급을 조절하지 않으면 제대로 즐기기 어려운 게임이 배드민턴이다. 배려심 없는 상대와 만나면 채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줄곧 셔틀콕만 주우러 다니느라 진이 빠진다. 실력이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은 상대방이 익숙해질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무척 단순해 보이지만, 굉장히 다양한 변수를 가진 배드민턴이라는 게임, 그리고 그 게임을 즐기기 위해 꼭 필요한 ‘셔틀콕’을 제목으로 삼은 이유는 명쾌하다. 영화 <셔틀콕>은 각자 다른 곳을 보고서서 허공을 향해 자기 얘기만 하다가 셔틀콕 한번 주고 받아보지 못한 채 마음이 너덜너덜해져버린 아이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셔틀콕> 포스터
그토록 너덜너덜한 마음의 소통
은주와 은호의 어머니와 민재의 아버지의 재혼으로 가족이 된 아이들. 사고로 부모가 죽고 남겨진 보험금으로 살아가는 세 남매 은주(공예지), 민재(이주승), 은호(김태용). 어느 날 은주가 1억 원을 가지고 집을 나가버린다. 민재는 은주의 행방을 좇고, 남해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나선다. 그리고 불청객 같은 은호가 그 여정에 함께 한다. 줄거리를 적고 보면 다소 끝이 뻔해 보이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게다가 첫사랑과 이복남매라는 흔한 소재에 로드 무비라는 성장영화에 적합한 틀을 갖췄다. 하지만 <셔틀콕>은 단순하지 않다. 줄거리로 요약된 순간 클리셰가 되는 익숙한 이야기를 꽤 다르게 풀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주 많이 들었던 것 같지만, 솔직히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애초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의 울타리 속에 구겨져 있던 아이들에게 부모의 상실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임과 동시에 모든 관계로 부터의 속박이 된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아이들은 제 인생 하나 책임지기 힘든 상황에서 남과 다름없는 동생을, 미래가 어찌될 지도 모를 뱃속의 아이를 품어야 한다. 첫사랑의 서툴고 아련한 마음을 품고 있지만, 마치 빚쟁이를 대하듯 하는 민재나, 끝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은주나, 줄곧 재잘대는 은호의 말은 늘 허공 속으로 흩어지는 독백일 뿐, 제대로 된 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아이들 상대방의 말이, 미처 꺼내지 못한 마음이 무엇인지 정말 명확하게 알고 있다. 말이 되는 순간 무너져버릴 수밖에 없는 위태로운 관계를 지탱하는 것이 외면과 부정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은 알고 있다. 일례로 성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막내 은호가 치마 입기를 좋아하고, 매니큐어를 바르고 여자 아이처럼 되고 싶어 하는 것을 민재는 일찌감치 알고 있지만 차마 말로 꺼내 의심하지 않는다. 민재의 분노가 폭발하는 순간은, 그런 은호에게 익명의 아이들이 ‘게이’라는 표식을 낙서처럼 드러내 은호의 ‘정체’를 폭로한 순간이다. 그리고 아마 은주가 민재에게서 달아났던 그 순간, 말이 되어 나왔던 민재의 욕망은 은주에게 동일한 폭력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알고 있지만, 듣고 싶지는 않은 말은 그렇게 생채기가 된다. 결국 은주를 되찾고 싶은 거지만, 계속 돈을 돌려달라고 말하는 서툰 민재는 끝내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척 하는 은주에게 말한다.
말 한 건 있고, 말 안한 건 없는 거야?
이유빈 감독은 ‘셔틀콕’이라는 상징을 통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소년이 여전히 거칠고 퉁명스러운 방법으로 첫사랑의 아픔도, 자신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도 책임지고 일어서려는 힘겨운 순간을 함께 한다. 달아나려 하지만 결코 버릴 수 없는 무거운 삶을 깃털처럼 가벼운 셔틀콕에 빗대었지만 그 은유가 결코 과하거나 모자람이 없다. 서산, 당진, 전주, 남해까지 이어지는 형제의 여행은 꽤 험난하지만, 길 위에 선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위태롭지 않다. 결국 그렇게 아이들은 자라나고, 살아낼 거라는 믿음을 민재에게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달아났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민재는 은호를 절대 버리진 않을 만큼 단단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 말이 아닌 마음이 소통하는 방법을 스스로 깨닫는다. ‘조금만 치면 털이 빠지고, 혼자서는 연습도 못하는, 생긴 것도 이상한’ 은호가 설명하는 셔틀콕처럼 그렇게 소년은 혼자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다스리며 떠밀리듯 어른이 된다.
믿고 보는, 이주승
<셔틀콕>에서 이주승을 빼면 어떤 느낌일까? 돌이켜보면 이전 영화에서도 그는 늘 그랬다. 영화의 전체를 지배하는 묵직하면서도 독특한 존재감 때문에 영화를 말할 때 ‘이주승’을 빼고 말하기 힘들게 만드는 매력적인 배우이다. 열아홉 김경묵 감독의 <청계천의 개>로 데뷔한 이후 줄곧 독립영화에서 고등학생 역할을 맡아왔고, 군필 스물여섯 청년이 되었지만 제대 이후 두 작품에서도 이주승은 여전히 고등학생 역할을 하고 있다. 다 자란 어른 같은 느낌이 없는 소년 같은 표정에 부루퉁하게 꾹 다문 입술이 이미 다른 이야기를 숨기고 있을 것 같은, 더 자라야할 것 같은 이미지는 신비스럽다. 많은 독립영화 감독들은 늘 나른하면서도 날카로운 이미지를 간직한 이주승에게 비밀스러운 이야기의 열쇠를 맡겼다. 2008년 백승빈 감독의 <장례식의 멤버>에서 이주승은 한 번도 어른 흉내를 내본 적 없는 것 같은 그저 비밀스러운 소년의 모습 그 자체였다.
민용근 감독의 단편 <열병>에서 스토킹을 하지만,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소년의 집착을 보여주었다. 이원식 감독의 <누나>에서는 누나를 통해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보려는 소년이었다. 이난 감독의 <평범한 날들>에서는 할아버지의 죽음에 결박된 채 한발도 벗어나지 못하는 소년의 파국을 보여준다. 공귀현 감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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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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