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글을 쓸 것인가
구성이 탄탄하여 한숨에 죽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유익하고 명료한 글을 쓰는 것이 꼭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지금부터 글쓰기를 ‘시작’하면 된다. 아마 필자에게 “무엇을 쓰란 말인가?”라고 반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글을 쓰든 주제가 있는 글쓰기를 하면 된다는 것, 또는 주제가 있는 글쓰기를 하면 어떤 글이든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여러분이 평소에 쓰고 싶은 글을 쓰면 된다. 그냥 쓰기 시작하라. 시작이 반이다.
혹 나에게 무슨 글을 쓰면 좋겠느냐고 굳이 묻는 분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기록하는 글을 쓰시오.” 그렇다. 나는 가능하면 많은 분이 ‘기록하는 글’을 쓰기 바란다. 기록하는 글쓰기는 비교적 쉽게 시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글쓰기를 가능하게 해 주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기록하는 글쓰기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날 있었던 일을 적는 일기도 기록하는 글이고,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도 기록하는 글이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일상적 사실을 적은 것도 기록하는 글이다.
기록문을 쓰면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기록이 쌓이게 되어 개인적 글쓰기나 사회적 글쓰기를 할 때에 이를 좋은 글감으로 활용할 수 있어서 좋고, 기록문을 쓰는 동안에 글쓰기 능력이 커질 것이니 더욱 좋은 일이다. 기록문 쓰기를 어느 정도 한 뒤에는 각자 쓰고 싶은 글을 쓰면 된다. 기록문을 써 본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쓰고자 하는 어떤 분야의 글이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기록문 쓰기
(1) 기록문 쓰기는 글쓰기의 바탕
기록문이란 어떤 사실을 기록한 글이다.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거나 거기에 약간의 해설이나 정보를 덧붙인 글이다. 사건, 행사 따위의 진행 과정이나 특정한 시점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을 기록하는 것이 기록문이다. 기록하는 대상에 따라서 사건 기록, 행사 기록, 회의 기록, 대담 기록, 관찰 기록, 여행 기록, 독서 기록 등 다양한 기록문이 있을 수 있다.
기록문은 사실을 기록하는 글이므로 창작이나 주장하는 글에 비해서 쓰기 쉬운 면이 있다. 특별한 글재주가 없더라도 시간대별로 사건의 진행 과정을 적기만 해도 기록문이 될 수 있고, 일정 기간에 어떤 사람이 한 일을 적어도 기록문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기록문이 일기문이다. 누구나 길든 짧든 일기를 써 본 경험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일부는 여행 기록이나 행사 기록도 써 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기록문은 누구나 조금씩 써 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기록문 쓰기는 부담없이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글쓰기 분야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록에는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쓴 민족이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은 주제가 단일한 세계 최장의 기록물이다. 그리고 그 기록을 지켜 온 역사를 보면 우리가 기록에 관한 한 열정이 대단한 민족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기록문은 모든 글의 기본이다. 기록문에 근거하여 설명문과 논설문, 연설문과 보고문도 쓰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문학 작품 같은 창작문도 쓸 수 있다. 그뿐 아니다. 좋은 기록문은 영화나 연극 같은 제삼의 문화 상품을 만드는 데도 매우 유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록문이 다양하게 나와야 한다. 우리가 정신문화를 발전시키려면 먼저 기록문을 많이 써 놓아야 한다. 모든 국민이 기록하는 즐거움을 알고 이를 하나의 문화로 즐기는 날이 와야 할 것이다.
(2) 기록문의 열쇠는 이야기 구성 능력
기록문은 특별한 형식이 없기 때문에 쓰는 사람의 성격에 따라서 아주 자유스럽게 쓸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기록한 기록문이라도 어떤 글이 더 유용하다거나 더 정확한지 판단하여 기록문을 평가하게 된다.
여행 기록문의 예를 들어 보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입력하면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 사람들의 여행기를 수없이 만나볼 수 있다. 여러분이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어서 이 여행 기록을 읽어 보면 실제로 여러분이 바라는 정보를 주는 기록문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여행기가 글쓴이 중심으로 씌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실린 여행기는 자기가 어디에서 여행을 시작하였고, 어디에 가는 데 시간과 비용이 얼마 들었고, 어느 숙박소에서 묵었고, 누구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사진과 함께 실은 것이 대부분이다.
만일 그 여행기가 어디서부터 어디를 거쳐 며칠 동안 여행한 기록인지 개요를 먼저 적어 놓고 날짜별로 여행한 곳과 만난 사람을 소개했다면, 유용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전달하는 기록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행의 시작과 끝을 보여 주는 지도도 제공하지 않은 여행기가 태반이다. 자기가 출발하여 거쳐 간 도시 이름을 소개하고 사진을 올려놓으면서도 그 도시가 전체 여정에서 어느 지점인지 지도상으로 알려 준 여행기가 거의 없다. 이렇게 되면 어디서부터 여행을 시작할 것인지 또 며칠간 여행할 것인지 결정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조선왕조실록』도 처음부터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초(史草)라는 기록문을 근거로 작성한 것이다. 행위 시점에서 사실대로 기록한 사초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보는 『조선왕조실록』이 사실의 기록으로서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다. 행위 시점에서 메모를 충실하게 적으려면 그에 대한 사전 지식을 폭넓게 갖추어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인 만큼 쓸 수 있는 것이 기록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을 알고 그래서 보아야 할 것을 다 본 뒤에 기록문을 작성하여야 한다.
기록문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적는 이유는 대상에 대한 지식과 대상을 이해하는 깊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인터뷰하면서 그 사람의 약력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 행사를 기록하면서 그 행사의 내력과 특징을 모르는 사람은 치밀하게 메모를 할 수 없고 따라서 기록문을 제대로 쓸 수 없다. 메모를 하고 중요한 것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어서 기초 자료를 확보하였으면 그것을 풀어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른바 이야기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단순히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다는 식은 글이라기보다는 정보에 가깝다. 적어도 글이 되게 하려면 거기에 주제를 갖춘 이야기가 들어 있어야 한다. 그 이야기는 시간과 장소, 사건과 사람 등의 정보를 날과 씨로 엮어서 베를 짜는 것과 같다. 어떤 베를 짤 것인지는 짜기 전에 정해야 한다. 베를 짜는 데 어떤 글감이 주된 글감이고 어떤 글감이 도움 글감인지 판단해야 한다. 역사적 사건이나 특정 행사를 기록하는 경우에도 주제를 정하여 시간과 공간, 사람과 사건을 날과 씨로 엮어 베를 짜듯이 기록문을 만들어야 한다.
조각조각으로 나뉜 기록문은 정보는 될 수 있지만 기록문은 될 수 없다. 조각조각의 정보를 이야기로 엮어 내야 기록문이 된다. 그 이야기를 정보에서 찾아 하나의 주제로 엮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기록문을 잘 쓰는 능력이다.
(3) 기록문 쓰기에서 지켜야 할 점
기록문은 사실을 기록하는 글이므로 글의 원천은 ‘사실’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지 않은 기록문은 기록문으로서 의미가 없다. 그래서 기록문을 쓸 때에 가장 조심해야 할 점이 사실을 사실대로 쓰는 것이다.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쓰는 거짓말, 사실을 지나치게 부풀리거나 왜곡하는 거짓말, 있는 사실을 일부러 없는 것처럼 쓰는 거짓말 등 거짓으로 기록문을 작성하는 것은 기록문에서 가장 치명적인 오류이다. 신문기자에게 가장 치욕적인 비난이 “소설을 썼다.”라는 핀잔일 것이다. 이는 사실을 보도해야 할 신문이 기자의 사적 이익을 위해서 사실을 왜곡하였음을 비난할 때에 쓰는 말이다. 기록문은 결코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거나 일부러 글쓴이의 목적을 위해서 사실을 비틀거나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써서는 안 되는 글이다.
그렇지만 “무엇이 사실인가?”는 간단하게 정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사실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산이 어떻게 생겼는가?”라는 질문에 누구도 정답을 적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면서도 북한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자기가 본 북한산을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럴 경우 “어느 각도에서 어떤 기준에 따라서 북한산을 본 바로는 북한산은 이렇다.”라고 적어 최소한 다른 사람이 객관적으로 북한산을 이해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이런 객관화 작업을 하지 않으면 독자로 하여금 글쓴이의 주관에 휩쓸리게 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한편 기록문도 하나의 글이므로 기록하여 전하려는 주제가 있어야 한다. 하나의 사건을 기록하더라도 주제를 무엇으로(또는 어떤 사건으로) 잡는지에 따라서 글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큰 사건이라도 한 사람이 그 사건에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따라서 기록할 수도 있고, 그 사건으로 어떤 영향이 미쳤는지에 따라서 기록할 수도 있다. 사건이라는 거대 담론에 묻히면 미시적인 부분을 놓치기 쉽고, 미시적인 사실에 갇히면 거시적인 사건의 전개와 그 의미를 소홀히 다루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거대 담론을 주제로 삼더라도 그 주제를 뒷받침할 미시적 문제를 소홀히 취급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미시적 문제를 주제로 삼더라도 거시적인 사건의 흐름을 놓쳐서도 안 된다. 기록문을 제대로 쓰려면 사실을 객관적으로 적는 노력과 함께 거시적인 부분과 미시적인 부분이 조화하도록 적는 노력이 필요하다.
(4) 기록문 쓰기의 중요한 열매
기록문을 쓰게 되면 적어도 두 가지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첫째는 글쓰기 능력을 높이는 일이고, 둘째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기회를 갖게 되는 일이다. 글쓰기 능력 개선에 관해서는 더 설명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기록문 쓰기가 글쓰기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록문 쓰기의 둘째 열매인 ‘이야기 풀어내는 기회 마련’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기록문을 쓰기 위해서 다양한 자료를 조사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보통 사람들이 모르는 희귀한 정보를 얻게 된다. 한 지역에 대한 세밀한 정보는 물론이고, 그곳에서 있었던 사건과 관련된 숨은 이야기, 특정인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 등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 사건, 인물 등에 대해서 알차고 생생한 정보를 갖게 되어 앞으로 그 지역의 스토리텔링 개척자가 될 수 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자연 경관을 구경하는 관광의 시대에서 지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인물과 사건을 엮어 설명하는, 이야기가 있는 ‘인문관광’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인문 관광의 시대에는 근래 그 지역의 사람과 사건, 문화와 전통 이야기가 관심을 끈다. 요즘 나는 서울에 있는 한글문화 유적지 답사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서울시민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이 답삿길에는 특별히 멋진 건물이나 경관이라고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한국인이라면 또는 문화인이라면 한 번은 가서 보아야 할 유적지를 소개하면서 왜 이곳을 보이려고 하는지 설명한다. 일반 답사 여행이나 관광 여행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볼품없는 구경이지만 답사를 마친 사람은 하나같이 대만족이다. 기록문을 쓰다 보면 이런 인문 관광의 대상을 발굴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심어주는 일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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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주제다 남영신 저 | 아카넷
글쓰기는 작가나 기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직장인이 기획안이나 보고서를 쓰고 공무원이 공문서를 작성하는 일, 사회운동가가 사회문제에 관해서 발언하고 학생과 교수가 논문을 쓰는 일 등, 적어도 지적 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글쓰기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글쓰기를 시작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드러내고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서 글을 써야 한다. 어떻게 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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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신
남영신은 언어에 바탕을 둔 사회 발전을 꿈꾸며 국어 문화 운동을 하고 있다. 1971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뒤에, 토박이말을 정리한 『우리말 분류사전』을 펴낸 것을 시작으로 『국어용례사전』, 『한+ 국어사전』, 『국어 천년의 성공과 실패』, 『나의 한국어 바로쓰기 노트』, 『4주간의 국어 여행』, 『한국어 용법 핸드북』을 통해 꿈을 지향하고 있다. 이제 이 책을 읽는 분들과 그 꿈을 공유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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