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편애하는 장르가 있다면 ‘시인의 산문집’이다. 소설가의 산문집이 아니라, 시인의 산문집. 시인의 산문에서 만나는 간결하고 단정한 문장들은 언제나 반갑다. 그 속에 숨은 감정을 찾으면 마치 처음부터 내 감정이었던 것 같아서 흠칫 놀라기도 한다. 또 시인의 산문이 좋은 이유는 탁월한 단어 선택에 있다. 시인은 시를 지을 때, 얼마나 무수한 시어를 붙이고 또 떼어 볼까. 산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난주, 나는 김경주 시인의 『자고 있어 곁이니까』를 태교 하는 마음으로 다시 읽는 중이었다. 임신 소식을 전해온 친구들의 남편에게 몇 권 선물했던 책인데, 후기가 들려오지 않는 걸 보면 읽다 말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내 남편에게도 슬쩍 일독을 권했는데 몇 페이지를 읽었는지 영 흔적이 없다. 태교를 위해 만들어진 동화책은 내 마음이 너무 얼룩져서인지 도통 읽게 되지 않고, 업무상 읽는 책들은 속독을 해야 하니 태교가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다시금 『자고 있어 곁이니까』를 읽으며 순순이에게 대화를 청했다. (순순: “순하게 있다가 순탄하게 나오자”란 의미로 지은 내 아들의 태명)
태아에게 엄마, 아빠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게 그렇게나 좋다던데. 이명 증상이 심해져 좀처럼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던 며칠 전, 나는 무척 우울했다. 태교는 엄마의 컨디션이 따라줘야만 가능한 일이 아닌가? 홀로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귀에서 소리만 나지 않는다면, 우리 순순에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줄 텐데’ 아쉬운 마음에 툴툴거리고 있을 때, 택배가 도착했다. “임신하신 거 맞지요?”라는 짧은 안부와 함께 전해온 서효인 시인의 산문집 『잘 왔어 우리 딸』. 난다의 ‘어부바’ 시리즈 두 번째 책으로 『자고 있어 곁이니까』를 잇는 아이와 부모의 이야기를 담은 산문집이다. 너무나 사심 없이 보내준 책이라는 것이 무한히 느껴져, 나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보낸 이에게 마냥 고마웠다. 그리고 이 고마움은 책을 다 읽을 무렵, 더 커졌다.
“이 글을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효인의 딸인 은재가 참으로 부럽다는 것이었다. 세상의 어떤 여인이 아직 글자도 읽기 전에 아버지로부터 이토록 근사한 편지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다음으로 효인의 아내가 부러웠다. 이 글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녀의 남편보다 좋은 사내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좋은 글을 써낼 수 있는 필력을 지닌 효인이 부러웠다.” - 소설가 정용준
『잘 왔어 우리 딸』, 제목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했다. ‘고맙다’는 말보다 마음을 울렸다. 소설가 정용준의 추천사를 읽으니, 서효인 시인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미안하게도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시가 아니라 지난해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칼럼 ‘서효인의 야구탓’이 먼저였다. 야구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글맛이 좋아 꽤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다.
『잘 왔어 우리 딸』은 저자 서효인이 딸 ‘은재’를 품게 되고 겪은 이야기를 풀어낸 책이다. 대학 때 만난 아내와의 인연부터 첫째 딸 은재가 다운증후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은재가 자라는 과정을 절절함보다는 담담함으로, 아득함보다는 뭉근함으로 담아냈다. 당황스러우리만큼 일찍 부부에게 찾아온 은재. 하지만 준비가 되어 아이를 맞이하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저자는 “따뜻한 부성이 시작되어야 할 자리에 깊은 생채기가 생겼다”고 말했지만, 이내 상처는 흉터로 남지 않고 새살이 돋아 은재에게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시인 아빠는 고백한다. 언젠가 은재를 위한 이야기를 쓰겠다고.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나는 이제 은재 네가 좋아. 다운증후군을 가진 친구들이 좋아. 사람들이 그러더라. 우리 아이들이 바로 천사라고, 밝게 웃어주고 유머를 즐기고 참을성이 깊다고. 네가 자라면 무엇이 될까. 천사는 직업이 아니니까 직장에서는 네 정체를 숨겨야 해. 등뒤 날개를 찾으러 야단법석이 날지도 모르잖아.” ( 『잘 왔어 우리 딸』 272쪽)
저자의 글이 지나치리만큼 솔직해서, 감정에 색깔을 더함이 없어, 읽는 내내 웃음이 번졌다. 슬픔을 느낄 찰나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살가운 유머. 은재가 아빠를 닮으면 참 좋겠다 싶었다. 책장을 덮을 무렵, 문득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이들 부녀가 출연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시인. 쉬이 상상이 되진 않지만 어색할 것도 없다. 은재가 나온다고 예능이 다큐가 되진 않을 거다. (물론 서효인 시인이 출연을 승낙할 가능성을 높게 보진 않지만) 더 특별한 아이, 은재를 TV 속에서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우리나라에 다운복지관은 서울 노원구 화랑대역에 있는 한 곳뿐이라고 한다. 이 곳은 다운증후군자녀를 둔 아홉 개 가정이 설립한 복지법인 ‘다운회’가 만든 곳이다. 저자는 말한다. “세상은 참 이상한 것 같다. 아픈 아이의 자세와 걸음마, 언어와 인지를 도와주는 병원은 별로 없지만 멀쩡한 어른의 다이어트, 오뚝한 코, 눈 밑 애굣살을 위한 병원은 많다”고. 참, 이상한 노릇이다. 예능에 등장하는 아이는 눈이 크고 코가 오똑하며, 연예인 부모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이. 은재와 서효인 시인이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한다면, 우리는 다운 아이들을 호기심 어린 눈이 아닌, 더욱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잠깐 생각해보았다.
서효인 시인은 은재를 만나기 전, 아빠로서의 소망을 적었다. “여러 책을 읽고 좋은 글과 보통 글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길. 악기를 다루게 되어 마음이 다쳤을 때 부드러운 음을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아빠와 만담 커플이 되어 스탠딩 개그를 함께할 정도의 유머를 가지길.(『잘 왔어 우리 딸』102쪽)” 그러나 곧 이런 것들은 아빠로서의 바람일 뿐임을 깨달았다. “남에게 보이기 좋은, 혹은 내가 보기에 아름다운 것들만 모아서 아기의 작은 몸 곳곳에 문신처럼 새기고 있었다”라며 생각을 고쳐먹는다. 책의 마지막 무렵에 나오는 서효인 저자의 부모로서의 다짐은 가장 굵은 펜으로 밑줄을 그을만하다.
“아이의 삶과 내 삶을 완전히 일치시키지 않는 태도.
나는 나대로 행복하고, 나의 행복이 아이에게 전달되는 삶.
미루어 짐작해 걱정하지 않으며, 여기와 오늘에 응전하는 자세.” ( 『잘 왔어 우리 딸』 253쪽)
덧, 나는 무한한 사심을 갖고 『잘 왔어 우리 딸』을 남편에게 읽으라고 애원할 참이다. 그리고 임신 소식을 전하는 친구들의 남편에게도 쿡쿡, 이 책을 찔러 주련다. 아니, 현재 치열한 육아 전쟁을 치르고 있는 예쁜 내 친구들에게 먼저 보내 주련다.
- 잘 왔어 우리 딸 서효인 저 | 난다
『잘 왔어 우리 딸』은 작가 효인이 다운 소녀 은재를 얻고 진짜배기 남편이자 아빠가 되어가는 과정을 독특하게 그려낸 글이다. 효인의 딸 은재는 스물한번째 염색체가 보통 사람들보다 하나 더 많다. 이를 우리는 다운증후군이라 부른다. 정체불명의 다운증후군. 태어나자마자 은재를 입원시키고 수술시키고 무사히 집에 데려오기까지 그 일련의 과정 속에 작가는 비로소 저 자신을 그리 키웠을 제 부모와 조부모에 대한 이해를 온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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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혜
eumji01@naver.com
여의주
2014.08.29
텔레비전에서 보고 배운 아빠들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네요.
빛나는보석
2014.07.20
또르르
2014.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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