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토요일 정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인근 카페를 찾았습니다. 그와 기자는 한여름에 뜨거운 유자차를 주문합니다. 목 쓰는 사람들의 비애라고 할까요? 하긴 며칠 전 뮤지컬 <살리에르> 초연 때 만난 그의 성대는 기자의 그것과는 상대가 안 되게 튼튼하게 들렸습니다. 뭐랄까요, 더 어렵고 더 고음의 노래는 없냐고, 어떤 곡이든 멋들어지게 불러 젖혀주겠다고 포효하는 것 같았어요. 네, 기자는 튼튼한 성대, 그만큼 선 굵은 음색, 그에 어울리는 강인한 인상을 지닌 배우 최수형 씨와 유자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작곡하신 분이 ‘막공’인줄 알았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공연은 초반 분위기가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뭔가 각오를 다졌고,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긴장도 하고 오버한 것 같아요. 흥분해서 호흡이 내려가질 않더라고요.”
저렇게 며칠 공연하면 목이 나가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성악을 전공했고, 다른 무대에서도 워낙에 폭풍 가창력을 자랑하는데 타고난 성대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평소에는 최대한 자제하려고 하고. 그래서 노래방 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노래방에서 제 목을 쓴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싫거든요(웃음). 목에 좋다는 건 다 챙겨 먹어요. 커피를 좋아하지만 도라지나 유자차 마시고, 목에 좋다는 약도 먹고, 링거도 맞고. 그런데 <살리에르>를 하는 동안에는 관리가 잘 안 될 것 같아요. 모든 곡이 절규하고 고뇌하고 에너지를 쏟아야 해서. 감정 조절에 신경을 써야할 것 같아요.”
프리뷰 기간이었는데, 관객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제각각인 것 같아요. 보는 사람마다 시선이 다르니까. 무대가 아주 예쁘다는 사람도 있고, 너무 휑하다는 분도 있고. 천차만별이에요. 어떻게 보셨어요?”
내용 자체는 예상했던 것보다 재밌었습니다. 노래도 좋고요. 그런데 가사 전달력이 떨어지고 배역 간 가창력의 차가 너무 큰 것 같아요. 또 살리에르에 포커스를 맞춘 작품이긴 하지만 무게중심이 너무 살리에르에 몰린 게 아닐까. 모차르트가 천재처럼 보이지 않았어요(웃음). 살리에르를 연기하는 배우 입장에서도 거의 퇴장이 없는 데다 음역이 높은 노래들이 많아서 무척 힘들 것 같은데요. 게다가 창작 초연이잖아요.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어떤 책임감과 자부심을 갖고 공연했어요. 모든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함께 회의하고 얘기 많이 하면서 즐겁게 작업했고 지금도 하고 있고요. 유명한 작품들도 초연 때는 다 부족한 점이 있었고, 계속 다듬어 간 거잖아요. <살리에르>도 노래만 남을 작품은 아니고, 분명히 점점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데뷔 이후 타이틀 롤은 처음인가요?
“그렇죠. 타이틀 역에 최수형은 처음이고, 게다가 초연이니까 애착이 대단하죠. 저는 대본을 볼 때 장면 장면을 깊게 생각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전체적으로 봐야 하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정상윤 배우는 전체를 보는 안목이 좋아요. 서로 좋은 거 있음 갖다 쓰자고 했죠. 저한테는 별로 갖다 쓸 게 없겠지만(웃음)”
이탈리아 출신의 안토니오 살리에르(Antonio Salieri)는 오스트리아 빈의 궁정음악가로,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 등을 지도하기도 했습니다. 1778년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이 문을 열 때도 그의 오페라 <유럽의 발견>이 공연될 정도로 당대 명성을 얻었던 음악가죠. 하지만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살리에르의 명성이나 음악보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통해 알려졌고, 그래서 왜곡된 부분도 있는데요. 살리에르라는 인물에 어떻게 접근했을까 궁금합니다.
“바로크시대에서 고전으로 넘어갈 때,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 등이 활동하던 시절에 궁중악장이면 황제를 직접 가르쳤으니까 대단한 사람이거든요. 살리에르에게도 어느 정도의 천재성은 있던 거죠. 하지만 음악을 너무 사랑했고, 음악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은 열망도 과했다고 생각해요. 그런 그에게 모차르트가 나타났죠. 살리에르가 바라는 모든 걸 갖고 있는, 차원이 다른 천재라고 할까요. 저도 질투가 많은 편이에요. 노래 잘하는 팝가수를 보면 욕부터 나오거든요(웃음). 그래서 음악에 대한 부러움은 이해할 수 있었고, 연습하는 과정에서 예전부터 제가 느꼈던 질투란 질투는 다 끌어 모았어요.”
서른 살에 데뷔해 7년차 배우인데, 그 동안 다른 배우에게 살리에르 같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느껴본 적은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자신감 빼면 시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도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열등감이나 시기가 정말 못난 짓이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래서 계속 ‘난 할 수 있어!’ 주문을 걸죠. 사실 제가 살리에르라면 그냥 인정했을 것 같아요. 인정하고 같이 내 편으로 만들어서 공동 작업을 하지 않았을까(웃음).”
혹시 옆 건물(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모차르트>에 대한 질투는 없나요? 공교롭게도 공연 기간이 겹치고, 장소도 나란히 붙어 있어서 여러 가지로 비교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요.
“질투 나죠. <살리에르>의 음악이 정말 좋거든요. 딱 대극장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우리도 언젠가 <모차르트>처럼 대극장에서 웅장하게 공연하면 정말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음악은 전혀 뒤지지 않거든요.”
연초 <카르멘>에서는 가르시아로 남성미 물씬 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외모나 음색 때문인지 줄곧 강렬한 이미지가 강조되는 것 같습니다. 실제 성격은 어떤가요?
“아우, 전혀 그렇지 않아요. 부드럽고 얘기하는 거 좋아하고 섬세한 면도 있어요. 저는 여자 친구 화장실 갈 때 가방도 들어줄 수 있어요(웃음). 배우로서 임팩트 있고 강렬한 건 좋죠. 복이라고 생각해요. 관객들이 뒷자리에서도 얼굴 표정이 아주 잘 보인다고 좋아하더라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이미지로만 굳혀질까봐 걱정이에요. 이른바 달달한 연기도 하고 싶은데 안 시켜줘요. <카르멘>에서도 호세를 하고 싶었는데, 음역대도 딱 저한테 맡았거든요. 그런데 대표님이 ‘되도 않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걸음걸이부터 남다르잖아요. 가르시아의 워킹이 살리에르에서도 보입니다. 공연을 함께 봤던 친구는 음악가가 저렇게 근육형이면 어떡하느냐고 하던데요. 의상이 슬림한 건가요(웃음)?
“저는 잘 모르겠는데 주변에서 제 걸음걸이가 좀 건들건들하대요. 그리고 제가 하체가 좋아요. 하체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데, 허벅지가 21인치거든요. 이동국 선수가 23인치라는데. 하체는 좀 빠졌으면 좋겠어요. 무대에서 보기 안 좋을 것 같은데(웃음).”
요즘 배우들은 그야말로 매체를 넘나들고 있는데,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생각도 있나요?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유명해지려는 게 아니라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정체되면 안 되겠다 싶어서 영화 쪽 오디션은 보고 있어요. 그래서 (배우)형들 보면 대단한 것 같아요.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작품을 한다는 게 존경스럽더라고요. 제가 79년생인데, 어릴 때는 어떤 작품에서나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친구가 없더라고요. 힘들어서 다들 떠나는 거죠. 예전에 김응수 씨가 어느 프로그램에서 바닥에서 1미터 올라오는 것보다 1미터에서 10센티미터 올라오는 게 더 힘들다고 하시던데, 정말 명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배우로서 천천히 가더라도 퇴보하지는 말자고 생각해요. 다행히 작품을 할 때마다 더 배우고 조금씩 앞으로 가는 것 같고, 즐겁게 배우생활 하는 것 같아요.”
서른 살에 데뷔했고, 당시 기자가 만났을 때는 마냥 열심히 달리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이제 30대 중반이고 배우로서도 많은 생각을 할 텐데, 어떤 30대를 그려보고 있나요?
“그때는 진짜 혈기왕성했던 것 같아요. 그냥 노래만 했던 것 같고요(웃음). <아이다>를 할 때가 서른네 살이었는데, 최정원 선배님이 남자는 나이가 좀 있어야 남성성도 있고 멋이 나온다고 이제 시작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저는 20대보다 지금의 제가 더 멋있는 것 같거든요. 나이 들면서 멋있어지는 배우들도 많잖아요. 저도 그렇게 늙어가고 싶어요. 연기도 늘고 삶에 대한 경험도 많아져서 더 멋진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최수형 씨는 정말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지, 어제 저녁 공연을 하고 다시 두 시간 뒤에 두 편의 무대를 남겨두고 있는 배우답지 않게 꽤 즐거운 모습으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언뜻 조지 클루니를 닮았다는 기자의 말에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기도 했고요. 쇼핑하는 걸 좋아하고, 걷는 걸 좋아해서 집이 있는 홍대에서 광화문, 대학로까지도 종종 사람들을 구경하며 걷는다는데, 은근히 아기자기한 남자가 아닐까 싶군요. 다음에는 정말이지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달콤한 작품에 출연했으면 좋겠네요. 물론 8월 31일까지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알아보고, 그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고스란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음악가 살리에르로 관객들을 만날 겁니다. 그가 사랑한 살리에르는 어떤 모습인지 함께 관람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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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
뽕띵바라기
2014.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