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시린 바닥에 맨 발로 선 아이들이 있다. 누군가는 잠시나마 따뜻하라고 뜨거운 물을 부어주기도 하고, 누군가는 양말을 툭 던져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냥 무심하게 지나쳐 갈 것이다. 그렇게 시린 시절을 나도 보냈다고, 한 때라고, 차갑고 시리니 청춘이라는 말을 무용담처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야간비행>은 마음이 시리고 외로운 사람들의 맨발을 꾸역꾸역 이렇게라도 들여다보자고 말하는 영화다. 그렇다고 따뜻한 물로 발을 씻겨주고, 깨끗한 양말과 신발까지 신겨주는 이상적인 결론을 얘기하진 않는다. 대신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따뜻한 손의 온기를 전하고 피곤하면 잠시 곁에서 쉬어가라고 말한다.
퀴어, 큐어로의 진화
이송희일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늘 덜 자라 미숙한 성인이었다. 짝지어 등장하는 커플도 노동자-사장, 군대 선임-후임, 선생님-제자, 승무원-퀵서비스 배달원 등 사회적 시스템에서 더 많이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와 복종해야 하는 자로 이분화 되어 있다. 한국사회는 강압과 계급, 그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그 속에서 소수자들은 결핍과 비밀이라는 그늘에 가려 제대로 자랄 수 없다는 인식이 늘 영화 속에 담겨있었다.
덜 자란 소년 같은 남자들의 이야기에서, 정말 소년의 이야기로 시선을 내리면서 이송희일 감독이 중, 고등학교 소년들의 성장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역시 두 가지 큰 선입견 앞에 서야 했을 것이다. 근간의 학교 폭력을 다루는 영화들이 공포 영화 혹은 스릴러의 장르에 빗대어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핏빛 공포로 그려왔기에 생겨버린 장르적 선입견이 하나 있고, 두 번째는 감독의 전작들처럼 동성애를 그리는 퀴어 영화일 것이라는 선입견이다. 이송희일 감독은 이전 작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영화 속에 끌어들여 오면서, 더욱 풍성해진 이야기 속에 학교라는 공간이 지니고 있는 시스템의 폭력성과 그 잔인함을 녹여 넣는 방식을 택한다. 그리고 이미 동성애자임을 인정한 성인 남성들이 지닌 필연적 열패감 대신 여전히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 무르익지 않아 떠도는 퀴어적 공기를 영화 전반에 깔아둔다.
이송희일 감독의 이전 작품 속 주인공은 어디론가 달아나거나, 달아나려 하거나, 훌쩍 떠나버릴 수 있는 또 다른 선택이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시스템의 강한 그물에 걸리거나, 팽팽하게 당겨진 끈으로 묶여 그 구심점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현실과 마주한다. <야간비행> 속 소년들은 늘 길 위를 떠도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해가 뜨는 순간에는 다시 학교라는 곳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폭력적인 조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아이들은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의 모습으로 얼굴을 바꾼다. 중학생부터 용주(곽시양)와 기택(최준하)은 단짝이지만, 학교에서 그들의 처지는 너무나 다르다. 용주는 선생이 좋아하는 전형적인 모범생이다.
엄마와 사이도 좋고 태생적으로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가진 것 없는 기택은 반장 성진(김창환)이 주축이 된 무리들에게 수시로 괴롭힘을 당한다. 기택의 친구이긴 하지만 공부 잘하는 용주는 누구에게도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는다. 용주, 기택에게는 중학생 시절 친했던 기웅(이재준)이라는 친구가 있다. 일진이 된 기웅은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불량 학생이 되었다. 늘 기웅에게 머무는 용주의 시선은 애틋하다. 그러던 어느 날, 용주가 게이라는 소문이 학교에 퍼진다. 용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도 달라진다.
<야간비행> 스틸컷
<야간비행>의 관계는 학교라는 구조에 갇혀있기에 훨씬 더 좁고 폭력적이다. 그리고 어린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집단이라는 그 미숙함 속에 우리가 우정과 의리, 배신과 연민이라 불리는 감정들 역시 서툴고 모호하게 그려진다. 확고한 신념이 없기에 지금 자신이 붙잡고 있는 권력도, 우정도, 관계도 배신이라는 이름으로 등 돌릴 거라는 불안감이 이들을 사로잡고 있다. 자신을 견고하게 지킬 방법이 배신이라고 믿는 아이도 있고, 폭력으로 자신의 약함을 위장하는 아이도 있다. 아이들은 강한 척 하지만, 늘 약하고 늘 혼란스럽지만 아닌 척 한다. 학교라는 조직은 아직 어린 아이들이 스스로를 고민하고 정비할 최소한의 시간도, 자유도 허락하지 않는다. 권력 구도와 그 구도의 꼭짓점에서 손을 맞잡은 다양한 캐릭터는 복잡하지만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앞선 영화에서 이송희일 감독은 사회,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계급과 그 조건들 때문에 생겨나는 신파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 연출 스타일도 살아있어, 차가운 현실 속에서도 뭉클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순간들과 그 로맨스의 아련함도 담아낸다. 혼자 있는 순간, 따뜻해 보이는 가로등이 인물을 밝혀주고 밤이 오기 직전 활활 불타는 노을은 혼자 남겨질 아이들의 마음을 다독인다. 적절한 순간에 흘러나오는 음악과 낭만적 정서는 여전히 로맨틱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교실이란 곳에서 번번이 지옥을 겪어야 하는 소년의 감정은 풋풋한 신인 배우들에 의해서 내밀하고 섬세하게 드러난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기웅이다. 그는 용주의 마음은 냉정하게 거절하면서도, 그를 염려하고 그 주위를 맴돌면서 막상 용주의 곁을 떠나지는 못한다. 사랑이냐 우정이냐의 갈등에서 이송희일 감독은 혀로 핥아주는 좀 더 진한 우정이거나, 건조하게 거부할 수밖에 없는 사랑일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의 감정이 우정이거나 사랑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기웅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모호해져버린 감정은 오히려 <야간비행>을 좀 더 잠재적이고 열린 영화로 만들어 준다. 이미 너무 억압되고 단정되고, 단죄해 버리는 학교라는 시스템을 등지고 어떤 것도 규정되지 않는 미지의 상태여도 된다고 감독은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진심이 무엇인지 들여다 볼 시간도 없는 현실이 비극이 되어 버린 소년들이 맞이한 가장 지독한 순간에 멈춰버린 엔딩은 한동안 감정을 진공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이송희일 감독은 낙관적 관망에서 계속 달아나려고 하지만, 빗장 쳐 단단하게 가로막힌 시스템과 맞서기 위해서는 손잡고, 팔짱 껴서 작은 결속을 만들어야 한다는 역설로 그렇게 차갑고 시린 바닥에 맨 발로 선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정작 위로받아야 할 청소년들은 이 영화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여전히 시린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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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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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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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