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함돈균의 에세이 <시간의 철학>이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시간과 날짜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다르게 생각해보면 좋을 것들을 철학적으로 풀어봅니다.
책상 위 탁상달력은 마지막 한 장만이 남았다. 새삼 허무한 생각에 이미 넘어간 지난 달 달력을 애써 들춰 본다. 빼곡히 적힌 메모들을 살펴본다. 빼곡한 메모들은 사건의 가지 수들. 달력에 적힌 일 년의 메모들을 떠올리니 접었던 병풍을 펼치듯 시간은 그 사건의 가지 수만큼 커진다. 납작했던 기억의 집은 일순간 수많은 방들로 나누어진다. 달력의 메모는 사건의 방들을 기억하며, 그 기억은 ‘시간’이 기계적이거나 정량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며 무한히 줄어들거나 늘어날 수 있는 괴상한 기계라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12월의 달력을 보라. 그리고 넘어간 이전의 달력을 들춰보라. 동일한 숫자들이 찍혀 있으나 그 숫자들에 새겨진 사건의 개수와 체험의 깊이가 바로 당신이 산 ‘올해’라는 시간이다.
그러나 12월의 달력을 보는 시간에는 누구나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메모들을 보며 ‘나는 올해 바쁘게 살았구나’ 하면서도 정작 쌓인 것, 이룬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사건들의 기억은 있으나 시간은 축적되기보다는 덧없이 흘러가버리는 허무한 기분. 사건-기억은 덧셈이지만 시간은 저장되지 않고 어딘가로 빠져나가는 뺄셈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12월 마지막 장 달력을 보는 일이다.
‘마지막 날’은 가장 길다
‘12월 31일’이라는 시간은 ‘한해’라는 기억의 저장소를 열어 ‘사건들’을 펼쳐보는 파노라마의 시간이다. 마지막 날(end of days)의 파노라마는 압축적이며 극적이다. 365일의 갖가지 사건-기억이 투사되는 영사기가 그날 하루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이 영사기는 개인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신문과 공중파방송과 인터넷포털에서 종일 올해의 사건-기억 영사기가 돌아간다. 12월 31일의 24시간은 365일을 품고 있다. 365일의 세계를 펼쳐낸다. ‘12월 31일’은 수많은 하루들 중 하루가 아니다. 그것은 보르헤스 소설에 나오는 세계 전부를 담고 있는 구슬 ‘알렙’을 닮았다.
‘12월 31일’의 이러한 특성은 ‘마지막 날’이라는 성격에서 나온다. 그것은 흡사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개인들이 아직은 겪지 않았을 임종의 유사체험이다. 거의 죽었다가 기사회생한 이들의 공통적인 증언에 따르면, 죽음에 임한 사람에게 임종의 찰나는 한 개인의 모든 시간을 압축한 것으로 경험된다고 한다. 시계로 측정하면 아주 짧은 몇 초에 인생의 수천수만 가지 기억들이 한 순간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고 말한다. 여기에서는 1초가 수십 년 생애를 보존하고 압축하는 놀라운 체험을 제공한다. 그런 증언들이 허튼 소리가 아님을 12월 31일의 시간 경험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일은 ‘마지막 날’, 즉 ‘죽음’의 존재에 의해 가능하다. 더 정확히 말해 생의 지속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죽음 인식’, ‘내일’은 없고, ‘다음 시간’은 더 이상 없다는 죽음에 대한 실존적 인식이 우리에게 놀라운 기억의 압축력, 시간의 확장성을 만들어 준다.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대한 시간 의식, 죽음이라는 ‘없는 시간’이 ‘있던 시간’을 모으고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12월 31일은 실수를 가능하게 하는 허수, 자연수를 가능하게 하는 0처럼 존재하는 ‘죽음의 시간’에 기초해서 365일을 압축하는 하루다.
그래서 이 하루 우리는 두 가지 역설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12월 31일은 모든 하루 중 가장 길고 깊다는 것.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소멸의 시간 앞에서 덧없음을 체험하게 하는 이 하루는 일 년 중 심리적으로 가장 짧은 날이라는 사실 말이다.
다시 시작되는 마술
그러나 생의 임종 시간과는 달리 우리에게는 마법 같은 일이 남아 있다. 새로운 달력의 시간이 생겨난다.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조마조마하게 얼마 안 남았던 것 같은 시간이 새 달력을 통해 마법처럼 다시 재생된다. 달력의 ‘1월 1일’은 1년을 저장하는 동시에 1년을 무화시켰던 12월 31일을 전혀 다른 시간으로 바꿔 놓는다. 어느 화수분에서 솟아나온 것처럼 시간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물론 이런 시간 마법은 1월 1일에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시계침은 24시간을 돌아 정확히 다시 새로운 시간을 재생한다.
낮밤이 바뀌면 다시 새로운 하루가 생겨나고, 하루가 일곱 번 모이면 다시 한 주일이 생겨나고, 하루가 30일 모이면 새로운 달이 시작된다. 1월 1일은 이 모든 재생적 시간의 ‘끝판왕’이다.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의지와 용기를 용솟음치게 한다. 과거는 지나갔지만 시간은 달력 속에서 다시 돌아온다는 점에서 달력은 시간의 영원회귀를 가능하게 하는 마술책이다. 1월 1일은 이 시간의 영원회귀를 우리에게 확인시키는 하루다. 모든 질서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무질서로 돌아가며, 생명은 무생명으로 흩어진다는 우주적 엔트로피를 극복하는 마술이 여기서 펼쳐진다. 이때 달력의 1월 1일은 12월 31일과 시간의 압축성이라는 측면을 공유한다. 모든 달력의 1월 1일은 아직 메모로 채워지지 않은, 당도하지 않은 한해 365일을 예비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과거를 압축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기대와 설렘을 압축하는 시간이다. 우리에게는 실망과 불안과 허무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삶을 기획할 기회가 주어진다.
이러한 시간의 재출발은 ‘세계’의 시작과 깊은 관련이 있다.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연구에 따르면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한해(year)’라는 말과 ‘세계(world)’라는 말을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한해가 시작된다는 것은 한 세계가 시작된다는 것이며, 1월 1일의 주기적 재생은 ‘세계’가 주기적으로 재생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해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것은 신(神)이 세상을 창조하는 그 순간을 1월 1일이 재현하기 때문이다. 1월 1일은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자연적 운행의 한 기점에 세상을 다시 정화함으로써, 신들이 만들었던 태초의 우주적 순결성을 다시 회복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깊은 서원이 발현되는 시간이다. 오염된 시간은 오염된 세계를 의미하며, 오염된 세계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 인간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하늘의 신, 대지의 신, 만물의 정령과 교섭하면서, 그들 스스로가 더럽힌 세계를 깨끗하게 하고 다시 순결한 시간을 회복해야 함을 느낀다. 지구의 모든 인류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1월 1일에 해당하는 재생의 날이 있다. 이것은 단지 일상적 패턴의 회귀가 아니라 신들의 시간과 닿으려는 가장 깨끗한 시간과 관련된다.
같은 것의 영원한 회귀?
하지만 ‘반복’과 ‘재생’의 시간에 관해 더 급진적인 얘기를 떠올릴 수도 있다. 세계 지성사에 여전히 큰 논란을 제기하고 있는 니체의 ‘같은 것의 영원한 회귀’라는 수수께끼 같은 것 말이다. 니체는 모든 것은 다시 돌아오며, 정확히 같은 것으로 반복된다는 기이한 화두를 제시했다. 세계철학사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중 하나인 이 얘기는 시간의 존재론이다. 가장 창의적인 해석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시간의 문제와 관련하여 ‘반복’(같은 것의 영원한 회귀)의 문제를 생각해 보면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단 하나의 순간도 모두 다른 순간이다. 그러므로 니체의 영원회귀 사유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은 매 순간 유일무이하다. 유일무이한 사건이 계속된다는 그 사실만이 반복된다고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같은 것의 영원회귀’는 매 순간 시간은 새로운 사건을 만든다는 사실에 관한 아포리즘이다.
예컨대 새 달력에서 보는 숫자들, 그것들이 지시하는 요일은 가보지 못한 우주의 낯선 행성들과 같지 않을까. 오늘 하루는 어제 하루와, 이번 주말은 지난 주말과 같을까. 2015년 12월 31일은 2014년 12월 31일과 같을까. 우주의 그 어떤 것도 전적으로 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고유한 생성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년 4월에 꽃망울을 터뜨리는 하얀 목련도, 허무를 발산하며 공중에 흩날리는 벚꽃도, 달력의 패턴을 따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사도 엄밀하게 보면 동일한 방식으로 반복되는 사태는 하나도 없지 않은가.
2015년 달력의 1월 1일에 포개진 미래는 2014년 12월 31일이 압축했던 과거와는 다른 시간일 것이다. “거기가 우리가 닿은 처음”(이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시간일 거라 믿는다. ‘처음’ 시간은 늘 순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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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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