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개봉한 영화 <버드맨>의 연관 검색어는 ‘버드맨 김치 냄새’, ‘버드맨 김치 비하’, ‘역한 김치 냄새’ 등이다. 극 중 샘 톰슨 역을 맡은 엠마 스톤이 아시아인이 운영하는 꽃집에서 “온통 김치 냄새가 난다”고 한 대사가 문제가 되었다. <버드맨>은 곧장 실시간 검색어 1위를 달렸고, 이것이 인종차별주의적 표현인지 아닌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영화 측은 ‘캐릭터의 신경질적인 성격을 표현하는 수단’ 중 하나였다고 해명했고 이에 대한 베플은 “그것이 왜 굳이 김치냄새여야 하는가”였다. 확인된 유일한 사실은, 많은 이들이 모욕감을 느꼈다는 것뿐이다. 김치도 아니고 김치 ‘냄새’다. 궁예질(멋대로 추측하여 예측하는 것. 궁예가 관심법을 통해서 네 마음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데서 파생되었다)을 좀 해보면, 냄새만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화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 이상한 냄새 난다”만큼 무례하고도 효과적인 공격방법이 있을까? “너한테서 좋은 냄새 난다”처럼 모호하고도 감미로운 칭찬은? 도대체 냄새, 너는 무엇이길래 이렇게 원펀치 쓰리강냉이에 버금가는 파괴력과 영향력을 발휘하느냐. 후각과 후감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 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권력의 배치와 연결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크 스미스는 『감각의 역사』⑴에서 “근대 서양인들은 후각에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다고 이해하고 육체의 건강과 밀접하게 결부시켰다. 후각은 또한 진실을 대변하며 지식과 연관된 감각이었다. (....) 후각은 사회적으로 발생해 정치적으로 동기부여를 받은 ‘진실’을 입증하는 감각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⑵ 고 주장한다. 냄새는 질병의 원인과 증상을 나타내는 지표였으며, 질병은 냄새로 전달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좋은 냄새를 통해 질병을 물리치고 악취를 경계하게 된다. 현대는 냄새를 재배열하고 시력 중심적인 관점에서 후각을 경시하기도 했지만, 후각은 사회적으로 발생해 정치적으로 동기부여를 받은 ‘진실’을 입증하는 감각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⑶
후각은 그 어떤 감각보다 ‘타자’를 만들어내고 특징지으며, 지배와 복종을 정당화하는 데 적절하다. 냄새는 신속하고도 직관적이지만 볼 수 없기 때문에 주관적이다. 눈앞에 불이 활활 타고 있을 때 “여기 불난 거 보여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어디서 타는 냄새 안 나요?”라고 묻는 것은 가능하다(내 마음이 불타고 있짜나요…☆). 누군가는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누군가는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이는 냄새가 아예 안 나서일 수도 있고, 그 냄새에 익숙해져서일 수도 있고, 후각의 능력에 따른 차이일 수도 있다. 이 증명하기 힘든 감각은 미국의 백인들이 흑인들에게서 냄새가 난다고 주장하며 인종차별을 정당화할 때 이용된다.
프랑스의 부르주아들은 프롤레타리아에게서 지독한 냄새가 나는데, 그들이 이것을 모르는 이유는 감각이 부르주아들보다 우둔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공장에서 나는 냄새를 참아가며 노동을 해야 하고 그러다보니 그 냄새에 익숙해진 프롤레타리아들의 사정은 고려되지 않았다.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조지 오웰은 이런 상황을 1930년대에 강력하고 함축적인 발상을 통해 표현했다. 그는 ”서양의 계급 구분의 비밀“은 구역질나는 네 마디, 바로 ‘하층 계급의 냄새’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극도로 예민한 후각을 문명인의 지표로 여긴 부르주아들은, 동물들이 냄새에 몹시 예민하다는 사실을 간단히 무시했다.
이렇듯 후각적 암호는 주요한 분류자 역할을 맡았다. 특히 성性에 관한 문제의 경우 탁월했다. 후기 계몽주의의 남자들이 점차 시각, 진리, 지성, 지식에 눈을 돌렸다면 여성들은 점차 하나(혹은 그 이상)의 후각적 범주에 연동되었다.⑷ 바람직하지 못한 여성은 자주 악취가 나는 몸으로, (스페인어로 매춘부를 뜻하는 ‘Puta’는 악취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다) 정결하고 이상적인 여성은 꽃향기와 젖 냄새가 나는 몸으로 그려졌다.
예시가 너무 서구 위주라고? 그럼 한국으로 가지 뭐. 일제 강점기 때 총독부는 서울의 도시화 정책에서 의도적으로 종로를 포함한 북촌을 제외시켰다. 일제가 서울의 도시화에서 역점을 둔 것은 조선인 거주지에 불결과 낙후의 이미지를 덮어씌우고, 그 대극에 청결하고 발전된 일본인 거류지를 창출함으로써 야만의 조선과 문명의 일본을 같은 공간 아래서 극명하게 대조시키는 일이었다. 일제는 조선인이 점유한 공간이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불결한 조선인의 이미지가 고정될 것이고, 그런 만큼 민족적 열등감을 전제로 한 동화에는 유리하게 작용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⑸ 일본인이 거주하는 남촌에 비해 조선인이 거주하는 북촌은 지저분했고 무엇보다 악취가 났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일본인은 원래 청결하고 부지런하며, 조선인은 더럽다’는 편견을 기정사실화한다. 후각은 이처럼 주요개념(산업화, 계급 정체성 구축, 자아와 타자 개념, 제국주의적 식민개척, 성性과 인종의 동화, 그 외 몇 가지 주목할 만한 것들)을 정교하게 다듬는 데 일조했다.⑹ ‘나쁜 냄새’를 풍기는 ‘후각적 타자’는 그 불쾌함 때문에 곧장 열등한 존재로 격하되고, 다시 그 ‘나쁜 냄새’는 특정 계급의 냄새로 확대되는 연쇄 작용이 일어난 것이다. 냄새로 타인을 규정하는 것은 민족성과 민족주의로 확대돼, 외부인을 모욕하는 데 활용되었으며 동시에 민족주의적 인종정체성의 등장을 강화하고 구체화시켰다. ⑺
산업화를 거치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악취를 규제하고자 하는 정책과 시도가 활발해졌다. 또한 사적인 영역에서도 냄새를 없애려는 노력이 이어지는데, 대표적인 것이 방향제다. 텔레비전 광고를 보면, 청국장을 먹었으니 청국장 냄새가 나고 생선을 구웠으니 생선 냄새가 나는데 난리법석을 피우며 방향제를 뿌려댄다. 방향제를 뿌린 뒤에는 여자친구나 남자친구가 무슨 자석처럼 착착 달라붙고, 시어머니는 “밥 안 한 줄 알았다 얘~”하면서 흐뭇해하며, PT는 성공적으로 끝난다. 이쯤 되면 거의 마법의 향수 수준이다. 이렇게 없애야 하는 냄새는 점점 더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그런데 냄새는 주관적이며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이 악취인지를 판단할 때 필연적으로 권력이 개입한다.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이든 고유한 냄새가 존재하며 그것은 타인에게 낯설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낯섦을/이 불쾌함으로 번역하는/되는 것은 지극히 정치적이다. 펄벅의 <대지>에서 왕룽은 평생 농사꾼으로 살아온 자신에게서 풍기는 흙냄새와 마늘 냄새를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술집에서 데리고 온 화류계 여성인 렌화가 시골뜨기 같다고 싫어하자, 그 냄새를 지우기 위해 몹시 애쓴다. 렌화는 도시와 근대적 쾌락, 정제된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도시/농촌, 세련됨/촌스러움의 우열에 따라 왕룽은 자신의 삶 그 자체인 냄새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버드맨>에서 신경질적인 인물이 역겨워한 냄새가 ‘굳이 김치냄새’여야 했던 맥락도 이와 닿아있는 지도 모른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악취 음식을 모두 꼽아 봐도, 치즈나 수르스트뢰밍, 키비악 같은 것들은 냄새에 대한 판단이 얼마나 간단하게 ‘후각적 타자’를 만들어내는지 보여주기에는 포스가 영 부족하다. 김치는 악취 음식 중 냄새가 고약해서 저 대사에 동원된 것이 아니다. 아시아, 즉 서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취두부는? 김치보다 조금 덜 유명해서가 아닐까. 누굴 탓해. 두유 노우 갱냄스톼일? 두유 노우 김치? 두유 노우 김연아? 이 세 가지가 원죄라면 원죄일지도. 크윽.) 따라서 필자에게는 이 장면이, 후각의 권력화를 통해 금발의 서구인이 특정 인종을 ‘특정 냄새’로 범주화하고, ‘역겨운 것’이라고 표현하는 폭력이 얼마나 거리낌 없이 이루어지는지 폭로하는 것으로 보였다. 제작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디까지나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말이다. 김치를 먹는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 있다. 냄새로 저격 당하는 것은 본능적으로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감정과 기억을 가슴 속에 잘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 역시 너무나 간단하게 제 3세계를 ‘냄새’로 상징화하하거나 소수자를 후각적 타자로 배척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결국 냄새나기 마련이다.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가 아니고서야.
<참고자료>
(1) 마크 스미스, 김상훈 역, 『감각의 역사』 , SUBOOK, 2010
(2) 마크 스미스, 위의 책, 2010, 118쪽
(3) 마크 스미스, 위의 책, 2010, 118쪽
(4) 마크 스미스, 앞의 책, 2010, 129쪽
(5) 정우용, <근대 종로의 상가와 상인> 『서울학연구총서』, 14, 2003, 148-149쪽
(6) 마크 스미스, 앞의 책, 2010, 128쪽
(7) 마크 스미스, 앞의 책, 2010, 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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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송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 발행인. 문충이(文蟲)가 되고 싶은 그냥 식충이. 뭐든지 재미 있어야 하지만 재미의 기준은 내 마음. 읽고 쓰고 덕질합니다.
rkem
2015.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