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창비와 예스24가 매달 두 명의 시인과 함께 하는 ‘詩詩한 시인들의 詩詩한 이야기’ 행사 두 번째 순서의 주인공은 시인 ‘윤동주’였다. 올해는 윤동주 시인 70주기가 되는 해다. 스물아홉, 짧은 생을 살고 세상을 떠난 윤동주는 변함없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살아있다. 흔히 ‘암흑기’라고 말하는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제에 편입되었던,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시기에 윤동주는 끝없이 부끄러움과 고뇌를 노래했다. 참혹한 세상을 괴로워하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다시 참혹함을 말하는 요즘과 같은 시기에 윤동주를 읽는다는 것,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더없이 소중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눈앞에 또렷하게 살아있는 악(惡)을 확인하면서도 희망을 갖게 된다. 우리에게 윤동주가 있었다는 것으로 위안을 받는다. 시인 윤동주를 통해서 우리는 순수한 선(善)이 있다는 것, 그래서 삶을 낙관할 수 있다는 것, 꿋꿋하게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4월 9일 합정 벨로주에서는 첫 번째 행사와 마찬가지로 송종원 평론가가 사회를 맡아 진행되었다. 소설 『시인 동주』를 쓴 안소영 작가와 2011년 윤동주문학대상을 수상했던 함민복 시인, 그리고 윤동주의 시로 노래를 만든 가수 홍이삭이 한 자리에 모여 윤동주를 이야기했다. 윤동주의 삶과 그의 ‘엷은 연정’의 대상이었던 ‘순이’, 윤동주의 죽음과 윤동주의 어머니까지 윤동주를 둘러싼 이야기를 나누고 윤동주를 노래하는 시간이었다.
각자에게 기억된 시인 윤동주
먼저 안소영 작가가 “윤동주라는 시인의 생을 찾아가보고 책을 쓰게 되어 고맙게 생각한다”고 인사를 전했다. 함께 한 함민복 시인 역시 “몇 년 전에 ‘윤동주 문학상’을 받아서 일본에 갔다.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릿쿄 대학을 갔던 기억도 난다. 일본 사람들이 윤동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게 됐다.”며 일본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던 추억을 이야기하며 인사를 전했다.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안 된다”고 겸손한 인사를 전한 가수 홍이삭은 “윤동주 시인의 시로 노래 썼다고 이렇게 앉아 있다. 불러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홍이삭은 자신의 곡 ‘봄아’를 부르며 행사를 축하했다.
노래가 끝난 후 송종원 평론가는 『시인 동주』를 쓴 안소영 작가에게 먼저 질문했다. 책의 장르에 대한 질문이었다. 언뜻 평전 같기도 한데, 어떤 글이라고 생각을 하는지 물었다.
안소영(이하 ‘안’): 잘 모르겠습니다.(웃음) 소설이냐, 평론이냐는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는 거고요. 저는 다만 그 시대를 살았던 윤동주라는 한 청년이 어떻게 살았을까,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하는 부분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한 소설, 글쓰기는 사실 관계에 엄격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른 것이고요.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와 그의 삶을 제 나름대로 찾아서 가능한 한 사실에 가깝게 썼어요. 그 과정에서 제게 다가온 그 사람의 느낌, 삶을 가능하면 그대로 표현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고요.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 마음을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윤동주였을까?
안: 일제시대 청년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떠오른 사람이 윤동주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렇게 맑은 서정시를 쓴 사람 윤동주와 흔히 민족 저항 시인이라고 하는 윤동주, 이 두 면모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하는 궁금함과 의문이 들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의문은 윤동주의 청년기, 1938년 연희전문에 입학해서 유학한 시기인데요. 그때는 일본 식민지배 말기여서 우리의 말도 없애고, 청년들을 징용으로 내보내고, 모든 지식인들이 일본에 협력하던 시기죠. 그 시기를 살면서 최고의 학교를 다녔던 윤동주가 과연 그저 맑고 고운 서정시를 쓰기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래서 윤동주의 삶에 다가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동주와 그의 시를 이야기할 때 흔히 서정적인 면을 얘기하지만 그 참혹한 시기를 살았을 청년에게 필연적으로 내재되었을 고민, 저항의 면모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작가 안소영. 그 궤적을 『시인 동주』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역시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시어가 가진 서정성 때문일 것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 괴로워하는 시인의 감성이란 어떤 것인지 함민복 시인에게 물었다.
함민복(이하 ‘함’): 윤동주 시인을 보면 끝없이 무엇을 들여다보고 반성하는 것 같아요.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도 자신을 짚고요. 모든 사물들을 만나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그런 면이 끝없이 그의 시에 나타나요. 저 같은 경우는 가끔(웃음) 그런 시간들이 와요.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을 따뜻한 볼을 씻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소년> 일부
윤동주의 시 <소년>을 노래로 만든 가수 홍이삭의 시 낭독이 이어졌다. 그가 이 시를 노래로 만든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홍이삭: 윤동주 시인의 시를 가지고 여러 아티스트가 기획 공연을 했었습니다. 그때 곡을 쓰게 되었어요. 윤동주 시인의 여러 시를 보고 그의 삶을 찾아봤는데요. 노래를 쓰기 위해서는 제 감정이 움직여야 하잖아요. 시의 감정과 시가 가진 이야기가 제 것이 되고 제가 표현할 수 있어야 했어요. 솔직히 그 시대의 아픔이 담긴 시는 공감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제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그 중 <소년>이 가장 잘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웃음) 스스로도 그 시대를 노래에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어두운 시기 맑은 영혼 윤동주
<소년>에 등장하는 ‘순이’도 그렇지만, 『시인 동주』에도 윤동주의 연정의 대상이 흐릿하게 나온다. 안소영 작가가 윤동주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시인의 숨은 연애사가 있었는지 물었다.
안: 책에서 ‘엷은 연정’이라고 표현했는데요. 정말 희미하고 엷은 연정이었던 것 같아요. 주변에서도 윤동주가 마음에 둔 여학생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물어봐도 절대 얘기 안 했어요. 시에서도 ‘순이’를 떠나보냈듯이, 별 스토리 없이 그냥 지나간 것 같아요. 또 일본 유학 시절에 친구의 누이를 잠깐 마음에 둔 적이 있었는데 그 누이가 후에 집안에서 정해준 사람과 약혼해서 다른 진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자필 시고에 보면 ‘순이’라고 쓴 부분을 까맣게 지운 흔적이 있었대요. 살펴보니 일반적으로 쓰는 한자 ‘순이(順伊)’가 아니고 실사 변의 ‘순(純)이’였다는 거예요. 틀림없이 일반적인 순이가 아니고 ‘순이’라는 여학생이 있었던 거죠. 해보진 않았지만 이화여전 학적부를 뒤지면(웃음) 그 분이 누군지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바로 이러한 절망의 시대, 사람들의 지성과 감성이 모두 무너진 폐허와도 같은 시대, 더 이상 아무도 시를 쓰려 하지 않는 시대에, 동주의 시는 새로이 움트고 있었다. (중략)동주의 새로운 시는 절망의 어두운 그늘 속까지, 슬픔의 웅덩이 깊은 곳까지 닿아 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였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맑고 고요한 눈을 잃지 않은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기도 했다. (『시인 동주』, 161~162쪽)
『시인 동주』의 일부를 안소영 작가의 육성으로 직접 들었다. 윤동주는 중학교 이후 시를 쓸 때 반드시 시를 쓴 날짜를 표기했다. 그런데 1939년 말부터 1년 넘도록 쓴 시가 없다. 중학교 이후 하루에도 몇 편 씩 시를 쓰던 이가 절필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후 1940년 말에 다시 시를 쓰게 되는데, 그때가 서대문 경찰서에 구류를 살고 나온 때였다. 위에서 안소영 작가가 낭독한 부분이 바로 그 대목이다.
『시인 동주』 소설 사이사이에는 윤동주의 시가 들어있다. 이야기를 통해 시의 이해가 더 깊어지는 부분이 있다. 송종원 평론가는 작가에게 어떻게 시를 넣게 되었는지 물었다.
안: 시를 먼저 꼽아 두진 않았고요. 윤동주라는 사람을 그대로 그리고 싶었고, 그의 생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시를 그 즈음에 노래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그렇게 군데군데 시를 담게 되었습니다. 더 좋은 시가 많은데 다 다루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윤동주는 시에서 ‘들여다본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시인에게 자신의 속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함민복 시인에게 물었다.
함: 시 <소년>에서도 손금을 들여다보고, 순이를 만나고 하는데요. 들여다본다는 것은 자신을 타자화시켜 생각하는 것 같아요. 바깥에 누군가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시선을 따라가서 항상 자신을 들여다보고 끝없이 반성하는 것 같은데요. 제 경우에도 조금씩 들여다보게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본성, 양심이라고 하는 것들을 만날 수 없죠. 자신을 객관화시켜서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순간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고, 마음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것이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윤동주의 시색(詩色)과 함민복 시인의 그것에 어느 정도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는 송종원 평론가는 “쉽지 않은 시절에 순정을 잃지 않고 시를 썼던, 그 시 안에 괴로움에 지치지 않고 맑은 기운이 서려 있는 윤동주의 시처럼 함민복 시인의 시도 그렇다”고 말했다.
함민복 시인의 시 <성선설>이라는 시를 들어 시인의 선한 시선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함: 질문이 좀 어려워서요.(웃음) 윤동주 시인과 비교하는 것이 저는 부끄럽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읽고 나서 ‘부끄러움의 연속이었다’고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는 쉬운 시어를 쓰지만 어떻게 그 쉬운 말들로 깊은 의미를 담을 수 있을까 싶어 부러웠습니다. 혹시 제 시에 맑은 기운 같은 것들이 조금 느껴진다면 아마 그것은 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지 않았다는 증거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어렸을 때의 마음이 조금 남아있게 한 것 같습니다.
안소영 “반성 없이 흘러온 역사에 참담했다”
다시 안소영 작가에게 질문한 송종원 평론가는 “친일작가들의 평가를 쓸 때 고민스러운 지점이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며 소설을 쓰며 어려운 점이 없었는지 물었다.
안: 몰랐던 사실이 너무 많았어요. 특히, 일제시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40년대 이후의 기록은 아무도 언급하지 않아요. 온 민족이 다 부끄러운 시대였거든요. 지식인들 경우 앞장서서 친일을 하고요. 결과적으로 일제 36년이었지만 당시 살았던 사람들은 일본의 지배가 당연히 계속되리라고, 지배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체제에 적응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굉장히 현실적인, 합리적인 태도였다는 거죠. 그 시기가 지나고 일본이 패망하자 아주 어리둥절하죠. 그 후 일제 말에 대한 기억은 어디에서도 언급하지 않았고, 좀처럼 찾아보기도 어려워요. 백철 선생이 그 시기를 ‘암흑기’라고 했는데 그 말에는 ‘돌아보지 말고 덮어두자’는 의미가 있었던 거예요. 누구나 다 부끄러운 일을 했기 때문에요. 많이 놀랐어요.
더 참담한 생각이 들었던 건 일제시대에 그렇게 신문 기고를 하고, 청년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던 사람들이 대학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여전히 글을 쓰고 60, 70년대까지 계속 살아가셨다는 사실을 봤을 때였어요. 그때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겠죠. 창씨개명을 80%가 했다니까요. 그렇다하더라도 ‘그때 내가 잘못 생각했었다’는 말은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친일파 청산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아니더라도 말이에요. 잘못했다는 언급조차 없는 상태에서 역사가 흘러왔다는 데에 굉장히 답답했고, 그 시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습니다.
돌의 명함은 침묵이다
꽃의 명함은 향기다
자본주의의 명함은 지폐다
명함의 명함은 존재의 외로움이다 (<명함> 일부)
이어 함민복 시인이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에 수록된 자신의 시 <명함>을 낭독했다. 송종원 평론가는 함민복 시인의 시를 읽으면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이미지가 있다면서 시집을 묶으며 이런 제목을 단 이유가 있는지 물었다.
함: 눈물을 흘리다가 딱 잘라서 끊고 싶은 의지가 발동하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새로운 각오를 하는 순간들이 있는데요. 그런 순간들이 삶에서 참 많더라고요. 이 시집에 있는 시 대부분이 후회되기도 하고 부족한 점을 말하고 있어서 그렇게 제목을 해보았습니다.
안소영 작가에게도 낭독을 이어 청했다. 『시인 동주』에서 윤동주의 죽음을 다룬 장면이었다.
별 하나에 솔숲 돌계단, 별 하나에 핀슨 홀 다락방, 별 하나에 창내 징검돌, 별 하나에 신촌역 플랫폼, 별 하나에 서강 저녁놀, 별 하나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동주가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쇠약해진 심장도 천천히 한 번씩 뛰었다. (중략)그리고 가만가만 뛰던 동주의 맥은 마침내 멈추었다.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요히 바람에 스치는 별들만이, 동주의 외로운 감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300~301쪽)
비명처럼 ‘어머니’를 부른 윤동주를 생각한다. 윤동주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좀 더 듣고 싶어졌다. 소설에 많이 드러나지 않은 윤동주의 유년과 어머니에 대해 물었다.
안: 윤동주가 북간도 용정 출신이기 때문에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굉장히 조선 땅을 그리워했을 것 같습니다. 동주가 연희 전문에 입학하기 위해 처음 경성역에 내렸을 때, 조선은 봄이었지만 북간도는 아직 겨울 날씨였을 거예요. 그곳에서 온 윤동주가 맞은 경성에서의 봄은 어땠을까, 그 부분부터 시작하게 됐습니다. 동주의 청년기 고민을 따라가다 보니 유년기의 이야기를 회고하는 정도로만 처리했는데요. 동주의 어머니 사진을 보면 굉장히 고우세요. 동주는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 어머니는 병약하셨다고 하고, 대가족의 수발을 다 드느라 무척 힘든 삶을 살았을 것 같습니다. 일찍 돌아가셨고요. 뭉클했던 부분은 동주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도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어머니가 장례를 다 치러낸 후 동주의 옷가지를 정리하면서 통곡을 했다는 동주의 동생 혜원의 증언 부분이었어요. 굉장히 여리면서도 내적으로 강한 그런 부분을 동주가 닮은 것 같습니다.
윤동주의 시를 낭독해달라는 참석자의 요청에 따라 두 작가가 한 편 씩 윤동주의 시를 낭독했다. 먼저 안소영 작가는 <흰 그림자>를 낭독했다. 이 작품은 윤동주와 함께 하숙했던 정병욱의 호(號) ‘백영(白影)’을 뜻한다. 정병욱 교수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윤동주 시인과의 추억을 회고하며 살았다는 사연을 설명하며 시를 낭독한 안소영 작가는 “생각했던 것과 다른 도쿄에서의 현실을 보며 묵묵히 쓴 시”라고 시를 소개했다.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든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고장으로 돌려 보내면
거리 모통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는 흰 그림자들 (<흰 그림자> 일부)
함민복이 낭독한 윤동주의 시는 <간판 없는 거리>였다. ‘손목’을 잡는 구절이 무척 마음에 들고 이런 구절을 써보고도 싶다는 함민복 시인. 이에 대해 송종원 평론가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 그 안에 살아 있는 것 같다. 누군가의 손목을 잡아 본 것이 꽤 오래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몸 중에 가장 쉽게 잡을 수도 있지만 가장 잘 안 잡는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며 해당 구절에 대한 감상을 전했다.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불을 켜 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간판 없는 거리> 일부)
이어 참석자들의 다양한 질문이 이어졌다.
어느 인문학자의 책을 읽다가 김수영 시인에 대한 구절을 보았다. 김수영의 시야 말로 시고 그에 비하면 윤동주의 시는 시도 아니다, 는 식의 문장이 있어 놀랐다. 어떤 시인의 시는 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함: 김수영 시인도 좋아하고 윤동주 시인도 좋아하는 입장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의 기준은 이 시가 우리 세상에 무엇을 던져서 그 세계를 어떻게 넓게 연결하고, 평평하고 대등하게 평등한 세상을 펼쳐보는 데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좋은 시가 아닌가 싶어요. 때문에 김수영과 윤동주의 시에 다른 톤이 있을지 모르지만 둘 다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안: 윤동주 시에 대한 그러한 평가가 70년대 말, 80년대 초 문학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있었던 것 같아요. 윤동주의 시가 너무 쉽고, 과대평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식으로요. 평이하고 쉬운 시어로 썼기 때문에 언뜻 보면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만요. 윤동주의 시는 쉬운 시어로 썼음에도 안에 굉장히 깊은 뜻이 있고, 또 깊이 내려가서 다시 쉬운 시어로 걸렀다는 게 윤동주 시인의 대단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윤동주를 다시 읽으면서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윤동주를 소개할 때 왜 윤동주의 시가 지금까지 읽혀왔는지 얘기해주고 싶다. 의견을 말해 달라.
안: 윤동주의 시가 지금까지 읽히는 것은 제 경험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10대 때는 사춘기 시절에 누구나 다 힘들잖아요. 세상이 다 모순돼 보이고요. 마음의 격랑이 일 때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 차분해지는 것 같아요. 울컥할 때, 윤동주의 시를 읽고 그래도 뭔가 가치 있는 것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10대 때 받았습니다. 20대 때는 청년 윤동주의 심정으로 함께 이입하게 되는 것 같고요. 이후 더 나이가 들어서 보면 윤동주 시인은 스물아홉이라는 아주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생의 길고 짧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시에는 오랜 삶을 살아본 사람처럼 깊이 있는 내용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훨씬 더 많은 생을 살아야 쓸 수 있는 시일 것 같기도 하고요. 모든 세대에 다가가는 것이 윤동주의 시 같아요. 일본 사람들도 윤동주의 시를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그런 보편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개하면 안 될 것 같은데요.(웃음)
함: 일본 사람들이 정말 좋아하긴 하더라고요. 릿쿄 대학 성당에서 시 낭송회 행사를 했습니다. 그때 지진이 일어났어요. 건물이 흔들려서 당황했는데 그 사람들은 담담하게 있으면서 행사 진행을 계속 하더라고요.(웃음) 윤동주의 시는 우리의 양심, 본마음에 대해 노래하고 있고, 격렬하게 표현하진 않았지만 수오지심(羞惡之心) 같은 것이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끝없이 나의 삶을 되짚어보는, 삶을 끝없이 반성할 수 있는 거울과 같은 것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윤동주의 시가 계속 읽힐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송종원 평론가는 “소박하고 조용하지만 계속 꿈틀대는 맑은 움직임이 있어 계속 사랑받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윤동주를 이야기하며 이날 행사를 마쳤다.
2015 시 읽기 프로젝트 '詩詩한 시인들의 詩詩한 이야기'는 5월 6일, 문태준과 박소란 시인을 만나는 자리로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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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동주안소영 저 | 창비
아무도 시를 쓰려 하지 않던 시대에, 묵묵히 위대한 문학을 이루어 낸 시인 윤동주의 이야기. 생전에는 무명 청년으로 지내야 했으나, 유고 시집을 통해 암흑의 식민지 시절을 통과한 가장 빛나는 작가로 남은 시인 윤동주의 궤적을 찬찬히 되짚으면서, 작가 안소영은 시인의 삶과 시가 띠었던 빛깔을 섬세하게 복원해 낸다.절절한 슬픔과 좌절 속에서도 한 편의 서정시를 길어 올리던 청년 윤동주를 마음으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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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선
읽고 씁니다.
언강이 숨트는 새벽
2015.05.05
김수영은 한번 끓어 오른 그런 증류수 랄까...
둘 다 미치게 좋지만 윤동주 시인은 말갛게 하는 힘.
김수영 시인은 넋 놓게 하는 힘. 있지 않나 공통은 둘다 울컥 하게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