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는 삶에 관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의 사연이, 그의 결정이 충분히 이해된다. 아니 심지어 매력적이다. 내 한 몸이 불의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글ㆍ사진 김성광
2015.07.17
작게
크게

독고준.jpg

 

작가 독고준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찬사를 받은 몇몇 작품을 남기기도 했지만, 그는 47년 동안 오로지 자신의 일기 속에서만 속내를 밝힌 작가였다. 딸에게 쓰는 편지도, 작품에 대한 비평도 모두 일기 속에 갇혀있었다. 물론 문단에서도 눈에 띄는 교류는 없었다. 그가 일기 속에서만 펜을 놀린 사연은 이러하다.

 

이북 태생인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자아비판’의 경험은 혹독했다.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았다가 ‘정신 개조’를 요구 받았던 그는 북의 경직성에 몸서리쳤다. 하지만 그는 남한에서도 '문인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자본주의의 폭력성 보다는 사회주의적 가치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으로 어떤 고초를 당했는지 그는 밝히지 않았다. 다만 입을 다물었고, 누구도 사상범으로 얽어맬 수 없을 아주 관념적인 글들을 쓰기 시작했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그는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고, 문단에서는 그를 '회색인'이라 평했다. 그나마 그가 남쪽에 계속 남았던 것은 남쪽에선 ‘회색인’의 자리라도 존재했기 때문일테다. 그의 소설이 '운동권 필독서'가 되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현실에 거리를 두고 살았다. 오로지 일기 속에서만 입을 열었다.

 

작가 독고준에게 (조금 거칠게 말해) 사회주의는 정의지만, 북한은 정의가 아니었다. 남한은 (적어도 북보다는 나은) 정의였지만, 자본주의는 정의가 아니었다. 그는 남이냐 북이냐라는 질문 앞에서 '정의'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희뿌연 안개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의 사연이, 그의 결정이 충분히 이해된다. 아니 심지어 매력적이다. 내 한 몸이 불의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하지만 정의란 애초에 많은 불순물들을 껴안고 있다. 피를 흘리지 않고 1파운드의 살을 떼어낼 수 없듯,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정의'와 '불의'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가 내리는 대부분의 결정에는 아마 정의와 불의의 함량이 엇비슷하게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항상-이미 정의롭거나 정의롭지 못하다. 그런 우리들이 지금 정의를 갈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순결한 정의’라기 보다는 ‘좀 더 많은 정의’일 것이다. 정의로부터 불의를 적출할 외과적 수술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항상-이미 ‘좀 더’ 노력해야 한다. 정의란 적어도 ‘피하는 것’보다는 좀 더 노력을 요하는 일인 것이다. 덕분에 세상은 지금 충분히 불의롭다.

 

그럼에도 ‘회색의 지대’는 용인되고, 존중될 필요가 있다. 정의란 ‘정의로우세요’라고 다그친다고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정의도 과오가 없을 리 만무한 상황에서, 정의/불의를 편가르는 모든 시도에 대해 우리는 한 발 물러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나의 정의’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이 항상 불의로운 것은 아니고, 오히려 ‘나의 정의’가 지닌 한계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일 수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둔다면 좋을 것이다. 작가 독고준이 그랬듯, 어떤 시대에 이르면 ‘회색인’의 삶은 심지어 생존의 문제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 정의롭다면 늘 ‘회색’을 용인할 필요가 있다.

 

작가 독고준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다행히도 어느 한 쪽을 택하지 않고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에겐 그것이 ‘생존’과 직결되어 세상로부터 후퇴한 것이긴 했겠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img_book_bot.jpg

독고준고종석 저 | 새움
다양한 주제들의 시사칼럼과 에세이 등을 발표하면서 뛰어난 문장력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 온 작가 고종석이 17년 만에 펴낸 소설이다. 이 작품은 '독고준 3부작' 중 두 연작 장편 이후 3부작을 완성하지 못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최인훈을 대신하여 쓴 시리즈 완결판으로 더욱 이목을 끄는 작품이다. 독고준을 주인공으로 삼은 두 연작 장편 『회색인』과 『서유기』에 이어 독고준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이면서 그의 딸 독고원의 관념과 생활을 그린 독립적 작품이기도 하다.



[추천 기사]

- 내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책
- 인문학은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다
- 행복이 뭔지 아시나요?
- 책을 읽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고?
- 마지막으로 한번 더 용기를 내보는 것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독고준 #엠디리뷰 #책 #소설 #eBook
0의 댓글
Writer Avatar

김성광

다행히도, 책 읽는 게 점점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