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빡빡함이 온 몸을 에워쌀 때마다 바다로 떠나고픈 욕구가 샘솟는다. 소싯적부터 나는 ‘바다소녀’ 였고, 지금도 바다를 몹시 그리워하는 ‘바다바라기녀’다.
대학시절, 친구로부터 추천 받았던 섬이 있었다. 바로 통영의 ‘비진도(比珍島)’라는 곳이다. 추천해 준 친구도 여행깨나 즐기는 친구인데, 그가 묘사하길 “비진도의 모래는 새하얗고 고운 밀가루 같고, 바다도 에메랄드 빛이다.”라며 손가락으로 모래의 고운 입자들을 어루만지는 시늉을 하곤 했었다.
그 곱디고운 모래와 에메랄드 빛을 만나러, 비진도로 향했다. 비진도는 경상남도 통영에 있는 570여 개(무인도 포함)의 섬들 가운데 한 곳으로, 드라마<순수의 시대>촬영지로 알려져 있다. 비진도를 찾기 위해 이틀 간 통영에 머물렀고, 이튿날 이른 아침 배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통영은 외가댁 근처라, 명절 때마다 들르는 곳이지만 배를 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통영여객터미널에서 약 40분 간 배를 타고 들어가 비진리 외항마을에 도착했다.
선착장에서 내리자마자,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에메랄드 바다(왼쪽 방면)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오른쪽으로 빠져 나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어촌의 아침을 한껏 만끽했다.
이쪽 바다 위로는 새들이 시원한 날갯짓과 지저귐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바다의 향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곳이다. 하염없이 바다를 만끽한 후, 본격적으로 에메랄드 바다를 만나러 걸어나갔다.
친구가 말했던 ‘새하얀 모래’와 조우했다. 말 그대로 ‘백사장’이었다. 흔히 봐왔던 해수욕장의 모래빛이 아닌 희고 흰 모래들이었다.
백사장 위로 펼쳐진 바다 빛은 표현 그대로 ‘에메랄드’ 였다. 비진도의 옛 이름은 ‘미인도’, 그 뜻은 ‘진주만큼 보배로운 존재’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진주의 은은하지만 고귀한 특성을 반영하는 바다색이었다. 자연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경외심이 가득했던 나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름다움에 중독 될까’ 두려웠다. 바다 너머로는 통영의 크고 작은 섬들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바닷물의 깊이에 따라 색의 층이 선명하게 드러났고, 자연 그 자체가 아닌 그것을 화가가 묘사한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했다.
비진도의 신비로움은 에메랄드 바다로만 그치지 않는다. 서쪽으로 펼쳐진 에메랄드 해변과 달리, 동쪽은 몽돌밭 해변이 펼쳐져 있어, 미역과 바지락, 백합을 줍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몽돌밭 해변은 서해를 연상케 했다.
바다뿐만 아니라 ‘비진도 산호길’이라 하여 4km 가량의 산책로도 마련돼 있다. 산책로를 걸으며, 이곳 마을에 보다 깊이 빠져들어보는 것도 좋다.
에메랄드 해변 끝으로 가면, 우직하게 서 있는 절벽을 만나볼 수 있다. 그 앞 펜션에서는 보트, 카약 등의 간단한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장비를 대여할 수 있다.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소리와 해안으로 들어서는 맑은 바닷물, 맨발로 한껏 뛰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곱디고운 모래입자가 공존하는 에메랄드 해변에서, 약 세 시간 가량을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풍경 속에 나를 풀어놓았다. 바람을 쐬러 나온 지역민들, 물놀이를 즐기는 이방인들,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커플들(셀프웨딩 촬영을 하는 예비부부도 있었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비진도 관찰자’가 된 셈이었다. 그렇게 흐르는 시간과 풍경 속에 나를 맡겼던 그 순간들이 말 그대로 ‘힐링’이었다.
요즘은 ‘스테이케이션(staycation, stay’머물다’와 vacation’휴가’를 합친 신조어)’이 유행이라 한다. 멀리 떠나지 않고 집 근처에서 즐기는 휴가법으로, 번아웃 증후군과 비싼 물가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내외적 피로도가 느껴지는 현상이다. 계획과 예약, 치열한 여행, 후유증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로에서 벗어나고픈 또 다른 형태의 ‘욕망’으로도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우리는 많이 지쳐있다. 그래서 ‘피로사회’가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으로 자리잡혔고, 우리는 치열하게 ‘힐링’을 좇는다.
그 힐링바라기 현대인들을 위해 추천해주고픈 장소가 바로 비진도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었지만 요즘은 찾는 이들이 꽤 많아졌다. 그래서 휴양철이 아닌 다른 시기에 방문할 것을 권한다. 사실, 극성수기만 피해도 꽤나 여유롭다. ‘치열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쉬고싶다’라고 다짐한 이들에겐 더할나위없이 좋은 장소가 될 것이다. 여름에 찾는다면, 뙤약볕을 피할 수 있는 파라솔이나 텐트를 준비해 갈 것을 추천한다. 카페나 식당 등 관광산업이 활개치지 않는 곳이라, 이방인들에겐 다소 불편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래서 더 좋았다. 더 이상 어떤 것도 들어서지 않길 바란다. 지금 그대로 온전한 아름다움이 보존되길 바랄 뿐이다.
비진도에 머무는 동안, 영화<안경>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조용한 바다를 찾아 떠나온 타에코의 일상을 스케치한 슬로우무비다. 빠름에 익숙한 우리들에겐 답답하고 지루하고 권태로울 수 있으나, 그 과정을 참아낸다면 두고두고 그리워할거라 확신하는 작품이다.
영화<안경(めがね, 2007(감독, 오기가미 나오코)> 스틸컷
영화<안경> 속 풍경은 비진도와 많이 닮아있다. 왠지 모르게 영화 속 마을주민들이 아침마다 함께하는 체조시간이 정해져 있을 것만 같고, 단출하지만 더위를 날려줄 팥빙수를 파는 가게도 있을 것만 같다(맥주와 슬러시, 간단한 요기거리를 파는 가게는 있다).
성수기를 벗어난 시기에 비진도를 찾아 파도소리, 새의 지저귐을 들으며 진정한 휴식을 만끽하길 권한다. 떠나기 전, 익숙하고도 무겁지 않은 책(몇 차례 읽은 자신만의 베스트 북) 한 권을 챙겨간다면, 자칫 권태로울 수 있는 시간들을 의미 있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실제로 해변을 걷고 이곳에 발 닿은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 외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저 좋았다. 굳이 먼 나라로 떠날 필요가 없다고 느낄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만나볼 수 있었던 비진도. 차별을 모르는 자애로운 자연 덕분에 내 속에도 조금의 자애심이 생겨난 듯 하다. 한 곳의 섬에서 다양한 바다풍경을 만나볼 수 있는 비진도. 나는 감히 이곳을 천혜의 장소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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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함
최다함은 디지털영상 및 영화 전공 후 기자생활을 거쳐, 현재는 회사 내 전략기획팀에서 PR업무를 맡고 있다. 걷고 사유하는 것을 즐기며, ‘하고 싶은 건 일단 해보고 웃고 울자’ 식의 경험론주의를 지향하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영화, 공연, 전시회감상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의 쾌락을 만끽 중이며, 날씨 좋은 계절에는 서울근교든 장거리 장소든 여행할 곳들을 찾아 몸을 통한 독서를 실행하고 있다. 현재 네이버에서 ‘문화소믈리에, 최따미’라는 타이틀의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며, 예스24 파워문화블로거 및 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단, tv5monde한국에서 프랑스영화 에디터로 활동 중이다. ‘글쓰기’를 좋아하는지라 “평생 글과의 인연은 떼려야 뗄 수 없을 것이다”라는 포부를 지닌 그녀다. 자칭 컬처 소믈리에.
뚜비뚜뚜
2015.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