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소한 문제 제기다. 한국의 불교는 불교가 아니란다. 힌두교를 불교라고 여기고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단다. 그러니까 내가 믿고 있는 불교가 진짜 불교가 아닌 힌두교라고 것. 정말 그렇다면 그건 황당함을 넘어 믿음 자체가 무너지는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황광우 선생은 대뜸 한국의 불교는 석가모니가 전파한 가르침의 정반대라는 얘기부터 꺼냈다. 지난 9월 21일, 서울 정동 프란체스코 회관에서 『철학의 신전』 출간 기념 강연회 자리였다. ‘플라톤은 왜 호메로스를 공격했는가?’를 주제로 한 이날 강연은 철학의 시작에 대한 황 선생의 해석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의 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다시 돌아가서, 왜 한국의 불교는 불교가 아닌가. 황 선생에 의하면 인도의 원종교는 힌두교인데 안티테제로서 불교가 등장했다. 석가모니에게 힌두교는 극복의 대상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윤회였다. 윤회 사상은 힌두교의 것이었다.
“한국에 들어온 불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달랐다. 많은 신도들이 불교가 아닌 힌두교를 믿고 있다. 정도전도 고려 불교를 비판했었는데 그 내용은 윤회사상 비판이다. 우리에게 퍼져 있는 불교는 진짜 불교가 아니다. 힌두교를 놓고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황 선생은 설명을 이었다. 아트만(Atman). 내 영혼의 개체를 뜻하는데, 정체성을 이루는 실체라는 것. 아트만을 희랍철학으로 말하면 영혼이다. 불멸의 영혼은 윤회를 하고, 윤회의 쳇바퀴를 벗어나기 위해서 힌두교에선 제사를 지내고 명상을 한다. 업을 씻어내기 위함이다. 아트만이 윤회의 쳇바퀴를 벗어나면 브라만이라고 하는 정신의 보편, 즉 하느님에게 도달한다. 힌두교는 아트만의 개별성을 탈각하고 브라만이라는 보편자 속으로 귀의하는 것, 그래서 아트만이 없어지는 것이 힌두교가 추구하는 바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이 아트만이 실상이 없다고 강조했다. 제법무아(諸法無我). 황 선생은 이것이 석가모니 교리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 자체가 착각이라는 것.
“제법무아에서 ‘법’은 진리, 존재, 생명체를 말한다. 인류가 나의 구원, 나의 해탈을 집요하게 추구하는데, 나의 근거 없음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석가모니의 위대한 깨달음이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한다지만 내가 없다. 아트만, 브라만은 유심론이고 불교는 완벽하고 일관된 무심론이다.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혁명적인 철학이다. 불교가 중국, 한국으로 오면서 지역 조건에 맞춰서 편집된다. 한반도에는 무속신앙이 있었다. 부처가 신으로 변질됐다. 선조들이 잡신에게 빌다가 석가모니라는 신에게 옮겨가면서 불교는 구복종교로 바뀐다.”
황 선생이 불교와 힌두교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유럽의 철학 혹은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유심론과 무심론에 대한 가닥을 잡기 위함이었다. 플라톤과 호메로스. 기독교만 알아서는 서양 정신을 알 수 없다. 플라톤에서 시작한다고 서양 정신을 알 수 없다. 황 선생은 호메로스를 알아야 서양 철학의 시작과 근거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헬라스인들의 영원한 스승 호메로스에게 감히 도전한다. ‘시에 대한 철학의 도전’은 ‘삶과 죽음, 저승과 영혼, 인간과 신’을 둘러싼 두 세계관의 대결이었다.”(22쪽)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대립
고대 그리스, 제우스를 필두로 한 올림푸스 12신. 이들 신은 위대하고 강력하고 불멸의 존재였다. 반면 인간은 왜소하고 무력하고 하루살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인간은 염세적일 수밖에 없었고, 호메로스가 만든 신화 속 세계관에는 염세와 비관이 담겨 있다.
“한 번 죽을 인생, 제대로 살아보자고 한다. 그래서 공동체를 위해 굵고 짧게 살고 명예롭게 죽자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는 호메로스의 영웅이 만든 세계관이다. 영웅들은 이 세계관으로 살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대중들은 호메로스적 세계관과 맞을까 아닐까. 사람은 신과 달랐다. 어차피 죽을 인생,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정신적 타락의 국면에서 등장한 인물이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실체는 영혼이며 몸은 가짜라며 육체와 정신을 분리시킨다. 육체는 곧 없어질 허무한 것이고 자아의 근거인 영혼을 잘 돌봐야한다고 주장한다.”
호메로스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죽으면 난지도 쓰레기처럼 없어지고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몸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간다는 힌두교적 논리를 펼친다. 피타고라스는 영혼이 신의 곁으로 가려면 세탁을 해야 하는데, 영혼의 세탁제가 수학과 음악이라고 주장했다. 플라톤에게 영혼의 세탁제는 철학이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철학은 영혼을 깨끗이 정화시키는 활동이었던 것. 플라톤 왈, 정화된 영혼은 천 년이 세 번 돌 때 신의 곁으로 간다!
“두 세계관의 차이는 명확하다. 호메로스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으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달랐다. 플라톤 철학이 대중화된 것이 기독교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내세웠다. 이데아에 살아 있는 인간을 집어넣은 것이 예수다. 호메로스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절망의 삶을 살아야 하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의해 인간은 영혼의 구제 가능성이 생기고 기독교는 이를 기반으로 한다.”
황 선생은 근대의 사상가와 철학자들도 살폈다. 그에 의하면, 칸트는 무심론과 유심론을 절충했다. 이성과 신앙을 교통 정리하면서 과학과 철학, 신학이 공존한다고 봤다. 헤겔은 무심론이었다. 하느님의 권좌에 절대정신을 놓았다.
그를 이어 전투적인 무심론자 2명이 등장했다. 맑스와 니체. 물론 둘의 결은 달랐다. 맑스는 유물론적이었고, 니체는 플라톤의 신 즉 기독교의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다. 니체에게는 아킬레스, 헥토르 등 호메로스의 영웅이 살아있었다.
“헤겔의 제자 마르크스는 자녀들에게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를 읽어주는 것으로 삶의 피로를 풀었다고 한다. ‘신은 죽었다’고 한 니체 역시 그의 선언 그대로 고대 그리스의 자식이었다. 그의 가슴속에선 늘 《일리아스》의 영웅들이 뛰놀고 있었다.”(15쪽)
“맑스와 니체를 섞은 것이 사르트르였다. 사르트르의 무심론이 니체에게서 사회주의는 맑스에게서 왔다. 어렸을 적 책에 의하면, 니체는 극우반동 분자로 나왔다. 전쟁을 통해 힘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 노예가 없으면 문명이 유지되지 않고 여성은 필요 없다고 봤다. 맑스의 책에 의하면 그러한데 물론 니체의 고유의 철학은 있었다. 호메로스의 신이 가진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힌두교적 발상을 이식하면서 기독교가 등장했다. 근대에 들어 과학의 등장으로 기독교가 깨졌다. 그런데 우리나라처럼 기독교가 이런 식으로 창궐한 나라는 없다.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고 거의 무속이다. 예수는 철저히 무소유주의이자 평화주의자이자 진보주의자였다. 그럼에도 예수처럼 살라고 말하는 목사가 거의 없다. 전부 구약성경에 근거한다. 한국의 기독교는 묘하게 무속과 연결된다. 그게 우리의 정신적 현주소다. 2500년 사상사의 맥락에서 보면 그렇다.”
“구약성경을 관통하는 가치관은 물질주의다. 그런데 복음서는 구약성경의 물질주의를 심하게 꾸짖는다.(중략) 복음서가 말하는 하느님 나라는 지상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영혼의 하느님 나라였다. 고대인의 사유에 있어서 영혼은 어디까지나 물질적인 것이었는데, 영혼을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으로 파악한 이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었다.”(16~17쪽)
『철학의 신전』에 묻고 답하다
책 제목이 『철학의 신전』인데, 어떻게 지었는지 궁금하다.
호메로스의 신전과 플라톤의 신전을 제대로 알아야 유럽의 정신사 가닥을 잡을 수 있다는 맥락에서 그렇게 붙였다. 두 신전을 꿰뚫고 있어야 지금의 신과 종교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종교가 구라라면 진짜는 무엇일까?
내게 신이 있는가, 묻는다면 10대 때는 있다고 믿고 하느님을 호명도 해봤는데 나타나지 않더라(웃음). 50대에 들어와 생각해보니 내가 모른다고 해서 (신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오만인 것 같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것이지, 없다고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우주 속에 미묘한 힘이 있는 것 같다. 그 힘은 양자적 현상으로서 존재할 수도 있을 테고 아인슈타인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 신은 구라의 힘이 아니라 우주에는 신묘한 힘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긍정하는 것도 문제라고 본다.
우공이산(愚公移山무슨 일이든 꾸준히 노력하면 달성하게 된다는 사자성어)의 미덕과 무모함을 구별할 수 있는 철학적 기준이 있을까?
우공이산이 곧 무모한 것 아닌가(웃음). 거꾸로 생각해보면 오류나 실수, 착각이 위대한 발견의 동력이 되는 경우가 있다.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실패를 통해 위대한 성공과 발견이 나오는 경우도 많다.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도 우연 아닌가. 뉴턴이 대학 시절, 흑사병이 돌아서 런던의 1/3이 죽었다. 학교를 갈 수 없으니 책이 없어서 뉴턴은 만날 공상을 했고, 인류의 재앙이었던 흑사병이 만유인력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됐다. 나도 중풍으로 쓰러졌었는데, 그때 이 책을 쓰게 된 것이다(웃음).
한국의 전통 철학에도 줄기가 있는지 궁금하다.
우선 나는 그것에 전문적인 소견이 없음을 전제하자. 중국 고대 왕조 중에 하?은?주가 있는데 은왕조를 동이족이 세웠다. 사서오경에는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등이 있는데 시경 속에 동이족이 나온다. 사서오경이라고 하면 공자와 한족을 떠올리는데 그게 아니다. 오경의 상당부분은 은나라의 사상과 문화가 들어가 있다. 은나라의 통치 원리는 세상에 많은 신들이 있는데, 이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인 상제(하느님)에게 제사 지낼 수 있는 권리는 천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은나라의 사고 구조가 현재의 우리와 비슷하다. 한국에 기독교가 쉽게 들어온 이유가 하느님과 상제가 비슷하다. 다산 정약용은 공자를 넘어서려고 은나라의 상제를 리바이벌 시켰는데, 다산의 『주역사전』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플라톤은 ‘철의 정치’를 추구했다고 알고 있다. 호메로스는 정치 철학에서 무엇을 추구했나?
플라톤 때는 폴리스라는 3만 명으로 이뤄진 전사공동체가 있었다. 주민 수로 따지면 20만 명의 정치 단위가 있었다. 그런 정치체를 어떻게 꾸려나갈 것이고 누구에게 결정권을 줄 것인지를 놓고 플라톤은 철의 정치를 내세웠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시대가 다르다. 플라톤은 기원전 400년이고 호메로스는 기원전 720년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의 시대적 배경은 기원전 12세기다. 기원전 10세기 무렵의 사회적 상황을 담고 있는 것이 호메로스의 책이라는 연구도 있다.
이 기원전 10세기에는 왕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책을 보면 왕이 나오거든. 바실리우스(Basileus)라는 단어를 왕으로 번역해서 그렇다. 바실리우스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깡패 대장, 센 놈 정도가 될 것이다. 영어로 ‘빅 맨(Big Man)’이다. 따라서 호메로스의 책에 나오는 왕은 고대국가의 왕은 아니다. 씨족장, 부족장, 깡패 대장 정도를 바실리우스라고 표현한 것 같다. 이 당시엔 어떤 정치 체제가 바람직한지 이야기할 수 있는 정치체가 없었다. 몇 백 명의 우두머리를 바실리우스라고 불렀다. 그래서 플라톤의 정치 이론과 호메로스의 정치이론을 비교하기는 힘들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단군이 왕이었을까. 그때는 고대 국가가 아니었다. 고대 국가가 나오려면 법률이 있어야 하고 법률은 글자로 기록돼야 한다. 단군 때 글자가 있었겠나. 글자는 한참 있다 나온다. 고구려 때에 역사책이 나오는데 그전에는 고대 국가가 없었다. 따라서 단군은 특정 그룹의 대장 혹은 고인돌을 만들 수 있는 천 명 정도를 데리고 다닌 족장 정도로 봐야 한다. 단군을 고대 국가의 왕으로 보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음 책의 집필 계획을 알고 싶다.
역사나 경제, 현실적인 문제를 정리하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다. 한국사의 주요 쟁점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다. 이후 대한민국 청소년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대한민국이 앞으로 바라봐야 할 정치와 경제에 대한 정리를 하려고 구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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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신전김정헌,계현철,이정호,조성신,박형수 공저 | 유유
우리 사회는 지금 성장의 시대를 넘어서 성숙의 시대로 접어들려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플라톤과 호메로스가 싸움을 벌이는 ‘철학의 신전’을 들여다보아야 할 이유이다. 철학의 신전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행복한 개인, 정의로운 국가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된다. 철학을 통해 ‘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한국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고찰하는 저자의 산책길을 함께 걸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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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