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우산혁명 1주년이 되었다. 민주화라는 결과를 얻진 못했지만 거대한 중국에 쪼끄만 홍콩 시민들이 대차게 저항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고 용감무쌍했다고 기억한다. 그래선지 홍콩에 또 여행가고 싶다. 바가지와 문명적 친절, 너저분한 뒷골목과 초현대적 마천루, 미친 물가와 맛있는 음식들이 공존하는 홍콩이었지만 늘 그리운 여행지였다. 문제는 늘 돈이지 뭐. 할 수 없이 추억으로 때워본다. 2년 전 쯤 홍콩에 놀러갔을 때의 일이다.
“저기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고 있어.”
새벽 1시, 셩완의 어느 뒷골목을 헤맬 때 홍콩인 친구가 말했다. 우리들은 이미 2차까지 마셨지만 3차로 딱 한 잔 더 때릴 곳을 찾고 있었다. 음악에 이끌려 가 보니 과연 문을 연 가게가 하나 나왔다. 나로선 음악 소리는 모르겠고 영업중인 술집 불빛이 더 반가웠다. 가게에 들어서자 스피커가 그런 내 귀에 가공할 울림이 있는 중국말 목소리를 쓰윽 박아 넣었다. 어쩐지 느낌이 익숙했다.
중국말로 불러재끼는 음악이라면 영화 첨밀밀(甛蜜蜜)에 나온 등려군의 <월량대표야적심月亮代表我的心>밖에 모르는 내게 익숙한 목소리라니 신기했다.
“이 음악 왜 이리 친숙하지?”
“홍콩 영화 좋아했다니 들어봤을 걸. 비욘드 알아?”
첨 뵙겠는 밴드였다. 우리들은 2차 술자리에서 홍콩영화 얘기를 한참 나눈 뒤였다. 다른 이야기들은 대부분 일치했지만 내가 미친 듯이 좋아하는 주성치를 그 친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주성치는 양아치이며, 정의롭지 않고, 치가 떨릴 만큼 안하무인이라며 칫칫거렸다.
“주성치가 그토록 웃겼는데 봐 줄 수 없을 정도야?”
“봐 주려면 이백 배는 더 웃겨야 해.”
그 뒤로도 그 친구는 주성치 뒷담화를 좀 더 했는데 내 영어가 짧아 자세히 알아듣지 못했다. 영화와 인물은 따로 놓고 봐야겠으나, 다만 주성치가 나쁜 놈이었다는 게 좀 웃기긴 했다.
내 팬심을 짓밟은 게 미안했는지 홍콩 친구가 숙소까지 데려다 주고 가겠다며 함께 택시를 탔다. 늦은 밤에 술 마신 관광객은 바가지 쓸 확률이 높았는데 정의감 넘치는 현지인이 동행해 다행이었다. 가는 길에 장국영이 투신한 만다린오리엔탈 호텔 앞을 지났다. 비극적인 현장성 앞에서 나는 그의 어이없는 죽음에 대한 쓸쓸함에 빠져버렸다. 정말 사랑한 배우가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떠나버렸다는 걸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이미 많이 마셨지만 우리는 둘 다 3차로 한 잔 더 하고 싶어져버렸다.
그 호텔을 지나자 어떤 고가도로가 나왔는데 <천장지구>라는 오래된 홍콩 영화에 나오는 장소와 흡사했다. 부잣집 딸내미 오천련이 뒷골목 양아치 류덕화에게 인질로 잡혔다가 반해버려 인생 제대로 꼬이는 내용의 멋진 영화였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주인공이 도망간 유덕화를 찾아 맨발로 뛰어내려오던 고가도로 장면과 함께 영화에 삽입된 아름다운 음악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황당할 만큼 무책임한 스토리였다. 사랑에 빠진 여자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가다 웨딩 숍 쇼윈도를 깨 부셔 드레스를 입힌 다음, 성당에 가서 기도하게 해 놓고 자기는 복수하러 가다니. 극과 극의 인생 팔자가 불러온 비극이긴 했지만 그 여자는 스톡홀름 신드롬 때문에 인생 뭐 된 거냐. 아무튼 이야기가 샜고 영화에 나온 비욘드의 <회색궤적灰色軌跡>이라는 아름다운 음악이 그 셩완의 술집에서 나오던 음악이었다는 얘기다.
3차로 더 마실 수 있는 곳을 구했지만 술집 주인은 조건을 걸었다. 쓸쓸해서 그러는데 비욘드만 주구장창 틀어도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홍콩 친구는 80년대에 어린이였는데도 비욘드 광팬이라 바텐더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좋아했다. 나도 비욘드 목소리의 절절한 울림에 이미 경도된 터라 흔쾌히 오케이 했다.
비욘드는 홍콩에서 레전드로 기억되는 80년대 록 밴드라고 했다. 록 음악이긴 하지만 음색이 강렬하지 않아 록 밴드인 줄 몰랐다. 그러나 분명 보컬 황가구의 목소리에는 특별한 록 정신이 스미어 있었다. 목소리 끝에 이상한 바이브레이션을 거는데 광둥어의 음색과 공명하면서 특이한 울림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신비한 울림이었다. 그동안 광둥어는 말로 듣든, 노래로 듣든 발음이 참 특이하게 유머러스하다고 생각해왔는데 그 울림엔 유머러스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다만 주성치가 나쁜 놈이었다는 것만 좀 웃겼다.
맥주를 마시며 친구가 비욘드 음악의 가사를 영어로 번역해 주었다. 가사 내용이 매우 문학적이면서도 뭐랄까, 의식 있다고 해야만 했다. 그런 멋진 내용이 있으니까 음악의 울림이 그토록 깊었던 것이다. 80년대란 그런 시대였던 것인가. 세계의 수많은 80년대 록 밴드들이 세상의 부조리에 의식 있는 목소리를 냈었다. 우리나라도 그땐 록 밴드가 많았고, 꽤 진지했고, 시민들은 저항할 줄 알았다. 지금 사회는 뭐, 극과 극의 인생 팔자로 나뉘어 다시 엉망이 되어버렸는데 의식 있는 움직임조차 모두 꺾여버린 느낌이라 허탈하기만 하다.
어쨌거나 보컬 황가구(黃家駒)가 직접 가사를 쓴 오늘의 주제곡 <광휘세월光輝歲月>은 감옥에서 나온 넬슨 만델라를 기리며, 피부색으로 차별 좀 하지 말자는 내용이었다. 연애 얘기일 것 같은 록 발라드에 그런 가사라니 놀라웠다. 가사를 좀 소개하고 싶지만 중국어를 못 해 구글 번역기에 돌리자 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 링크를 걸 테니 음악을 듣고 느낌으로 눈치 채셨으면 좋겠다.
비욘드의 보컬 황가구는 일본 도쿄에서 공연하다 무대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쳤다. 그 불의의 사고로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왜 옳은 소리를 하고, 아름다운 재능을 가진 이들은 그토록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지 모를 일이다. 욕심 부리며 힘을 과시하고 남의 것을 빼앗거나 짓밟으며 떵떵거리는 사람들은 참 오래도 사는데 말이지. 아, 욕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아무튼 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 황가구는 1993년에 죽었고, 천안문 사건을 무력 진압한 중국을 비판하고 거대 깡패조직 삼합회를 까던 장국영은 2003년에 죽었고, 평생 인종차별에 저항하고 인권운동을 하던 넬슨 만델라는 2013년에 죽었다. 십 년 터울로 세상을 떠난 그들이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울림 있는 목소리들은 아마도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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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 (소설가)
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