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 정영목, 필립 로스가 던진 질문에 답하다
『휴먼 스테인』 『포트노이의 불평』 『에브리맨』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미국의 목가』 등 굵직한 작품을 통해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이 된 작가 필립 로스. 그가 2001년 발표한 소설 『죽어가는 짐승』이 국내 독자들을 찾아왔다. 출간된 지 10여 년 만에 처음 선보이는 번역본인 만큼, 출판사 문학동네는 특별한 시간을 마련해 이를 기념했다. 필립 로스의 작품을 다수 번역해온 정영목 번역가와 함께하는 강연회를 준비한 것이다. ‘필립 로스가 던진 질문에 다가가는 시간’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 날의 강연은 문학평론가 정홍수의 사회로 진행됐다.
번역가 정영목은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번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코맥 매카시의 『로드』로 ‘제3회 유영번역상’을, 도널드 서순의 『유럽문화사』로 ‘제23회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필립 로스의 작품 중 『에브리맨』 『네메시스』 『울분』 『미국의 목가』 『포트노이의 불평』 등이 그의 손을 거쳐 국내에 소개됐다. 새롭게 출간된 『죽어가는 짐승』 역시 정영목의 번역을 거쳤다.
사회를 맡은 정홍수 문학평론가는 다음과 같은 말로 필립 로스를 소개했다.
정홍수 : 필립 로스는 2015년에 『네메시스』가 출간된 후 절필 선언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당시 인터뷰에서 그가 했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는데요. “쓸 만큼 썼다고 판단해서 그만둔다” “매일 매일의 절망과 굴욕을 견뎌낼 힘이 더 이상 없다”고 했더라고요. 그리고 자신의 컴퓨터에는 “쓰는 것과의 투쟁은 끝났다”라고 쓴 포스트잇을 붙여 놨다고 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필립 로스가 정말 프로이고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됐습니다.
이어서 그는 정영목 번역가에 대해 “편집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번역가”라고 평가했다. 정영목은 “오늘 강연회에서는 한 명의 독자로서 제가 필립 로스의 작품을 어떻게 보았는지 이야기해드릴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정영목 : 제가 필립 로스를 좋아하게 된 건, 자기가 처한 상황을 알고 이해하려 하면서 작품을 쓰는 작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인 것 같아요. 그리고 필립 로스를 보면 그것을 다른 사람보다 훨씬 철저하게 밀고 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마치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듯이 쫓아가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잔인할 정도로 가차 없이 메스를 들이대는 거죠. 그런 철저함 단호함 냉혹함 같은 것들이 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건, 그렇게 절대적인 걸 추구하는 동시에 자신이 이해하려던 것들을 뒤집어버리고 상대화시켜 버린다는 거예요. 자기를 의심하는 부분이 공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드는데요. 저한테는 그런 게 상당히 매혹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는 번역가로서 자신의 눈에 비친 필립 로스의 작품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정영목 : 번역하는 데 있어서 필립 로스 작품의 특징을 이야기한다면, 필립 로스는 글을 쓰는 과정 속에서 파악해 나간다는 느낌을 많이 받게 됩니다. 하나의 큰 그림이 있고 그 그림 속에서 구도를 잡고 설계를 하는 게 아니라, 글이 진행되는 방식 자체가 이해와 인식을 점진적으로 끌고 나아가는 것 같아요. 꾸역꾸역 밀고 나아가면서 멀리 도달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요. 그런 흐름들을 따라가면서 (작품을) 공고하게 쓴다는 게 어려운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정이 가는 작품은 『포트노이의 불평』
번역가 정영목과 문학평론가 정홍수, 두 사람의 대담은 필립 로스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에 응답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강연회에 앞서 독자들이 보내온 질문들을 바탕으로 정홍수 평론가가 묻고 정영목 번역가가 답했다. 그 내용을 간추려 전한다.
정홍수 : 『미국의 목가』를 시작으로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휴먼 스테인』으로 이어지는 ‘미국 3부작’을 발표하면서, 필립 로스는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는데요. 그가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미국은 어떤 얼굴이었을까요?
정영목 :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필립 로스가 작품을 쓸 때 미국을 어떤 모습으로 그려보자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각각의 작품들을 보면 인물들이 밖으로 나오기 위해 정말 힘든 일을 겪잖아요. 『미국의 목가』의 스위드,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의 아내, 『휴먼 스테인』의 실크가 그렇죠. 만약 필립 로스가 미국을 어떤 모습으로 그리겠다고 생각했다면 바로 그런 부분에서 이야기를 시작했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에 아마 필립 로스는 각 개인의 삶, 그들이 삶을 살아내는 방식에 더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곳이 작품의 출발점이 아니었을까 싶고요.
정홍수 : 필립 로스의 소설을 번역할 때 어려운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정영목 : 말씀 드렸듯이 저는 필립 로스가 꾸역꾸역 쓴다는 느낌을 받아요. 영감을 받아서 쭉 써내려간 게 아니라 정말 노동하듯이 써 나간 것 같은데요. 실제로 글을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되어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써 나가는 순서가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필립 로스의 생각의 흐름이고 인식의 과정인 거죠. 그걸 제가 정리를 다시 해버리면 재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급적 그대로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말의 어순과 다르기도 하니까, 그런 부분이 괴로움 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읽다 보면 어색하기도 하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굳이 거르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게 필립 로스의 인식 과정이고 사고 과정이고 글쓰기 과정이니까요. 그걸 같이 체험하는 게 독서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정홍수 : 독자로서 필립 로스의 대표작으로 선정하고 싶은 작품 혹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정영목 : 제가 가장 처음 번역했던 필립 로스의 작품이 『미국의 목가』일 거예요. 출간은 나중에 되었지만요. 그때는 필립 로스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던 것 같은데요. 『에브리맨』을 번역하면서 ‘필립 로스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많은 분들이 그러실 테지만 저도 필립 로스에 입문한 작품은 『에브리맨』인 것 같고요. 가장 정이 가는 작품은 『포트노이의 불평』이에요. 제가 중학교 때 읽고서 가장 읽고 충격 받는 소설이거든요.
정홍수 : 출간 예정이거나 아직 번역되지 않은 필립 로스의 작품은 어떤 것이 있나요?
정영목 : 『네메시스』가 마지막 작품이었는데 출판사 사정에 따라 『죽어가는 짐승』보다 먼저 출간이 됐는데요. 제가 알기로는 소설 가운데 굵직한 두 권의 번역이 끝났고, 에세이 두 권이 출간 예정이라고 합니다. 필립 로스의 작품 중에서 현재까지 번역된 건 1/3 정도가 될 것 같은데요. 일단 중요한 작품들은 웬만큼 소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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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감자돌이
2015.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