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더’ 만이 답은 아니다 : 나영석 연대기 (1)에서 이어집니다.)
나는 앞서 쓴 글에서 ‘사람’이 예능의 본질이란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물론 누군가는 물을 수 있다. ‘사람’이 본질이란 이야기, 누구는 못 할까? 결국 모든 예능은 사람 보는 재미를 추구하지 않나? 남자들이 떼로 나와 미션을 수행하는 종류의 예능은 멤버들 간의 팀워크를,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은 재능을 선보이고 선택을 갈구하는 인간의 드라마를, 군대 리얼리티 쇼나 육아 예능은 예상치 못한 고난 앞에 당황하고 깨지는 이들의 성장담을 제공한다. 사람이 만드는 모든 콘텐츠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내가 던진 화두를 스스로 부정하기 위해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더 적확하게 쓰기 위해 하는 말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지난 몇 년 간 한국의 리얼리티 쇼는 물량공세라 해도 좋을 만한 기세로 그 덩치를 키웠다. 최대한 많은 종목의 미션을 수행하고(MBC <무한도전>), 더 많은 이들을 등장시켜 게임의 규모를 키우고(Mnet <프로듀스 101>), 등장하는 이들의 갈등을 최대한 잘게 쪼개어 자극적으로 보여주고(Mnet <쇼 미 더 머니>), 극한의 환경 안에 던져진 인물의 민낯을 탐식하는(SBS <정글의 법칙> 시리즈, tvN <더 지니어스> 시리즈) 방식으로 말이다. 드라마의 스케일은 확장하고 콘트라스트는 강조하는 일련의 흐름.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나영석은 그 반대 방향을 향해 갔다.
더 많은 사람, 더 격한 드라마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더 깊게 들어가는 법
게임과 레이스를 제거하고 여행 일정을 무던히 따라가는 <꽃보다 할배>가 주목하는 건 어르신 멤버들 간의 대화와 상호작용이다. 당연히 처음 떠난 여행에선 빡빡한 일정이나 처음 보는 풍광 앞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이들의 반응, 일상적이지 않은 대화와 감정들이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여행이 익숙해진 후엔 지난 몇 십년의 일과 우정과 인생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80 노인들의 이야기가 주가 됐다.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나 특별하게 새로운 모습을 보기 위해 억지로 일정을 꾸리기보단,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 들어갈 수 있는 한 최대로 깊게 들어간 것이다.
후속작인 <삼시세끼>에선 한 수 더 뜬다. 농촌과 어촌 모두 정글이나 야외취침처럼 극단적인 경험을 선사하는 곳은 아니다. 고립된 것도 아니어서 필요하다면 차를 타고 정선 읍내로 나가거나, 배를 타고 가거도로 나갈 수도 있다. 조금 귀찮을 뿐 심드렁하게 해치울 수 있는 평범한 일상. 레귤러 멤버 수는 <꽃보다> 시리즈보다 더 극단적으로 줄어들어, 남자 3명이면 필요한 그림이 완성된다. 이들이 일상의 노동을 반복 수행하는 과정을 담다 보면 결국 포커스는 인간의 내면을 향할 수밖에 없다. 물론 쇼의 리듬을 만드는 건 찾아온 손님을 접대하고, 밭일을 하고, 돌돔을 낚기 위해 낚싯대를 드리우고, 새 메뉴를 고심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가장 리듬이 고조된 순간, <삼시세끼>는 개와 함께 놀아주며 나지막이 나누는 남자들의 대화, 크게 중요할 것 없는 농담 따먹기에 주목한다. 최대한 일상에 가까운 환경에 인물을 풀어둔 다음 그들이 무심코 나눈 대화 속에서 깊은 속내를 발굴해 그것을 중심으로 편집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멀찍이 떨어져 줌 인으로 담아낸 장면.
두 사람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나누는 대화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이 대목의 목표다.
<삼시세끼 어촌편 시즌2> ⓒCJ E&M. 2015
인간의 일상에 뿌리를 내린 채집과 발굴의 예능으로
정서의 해상도를 높이다
‘발굴’이란 표현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꽃보다 할배>와 <꽃보다 누나> 모두 사방팔방에 집요하게 설치된 무인카메라의 존재에 대해 투덜거리는 멤버들의 모습을 노출한 바 있다. 이 집요한 무인카메라 배치는 나영석이 CJ E&M으로 이적하기 전 KBS에서 마지막으로 참여했던 <인간의 조건> 파일럿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이 무인카메라들은 무슨 특별한 이벤트를 담기 위해 돌아가고 있는 건 아니다. 멤버들이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씻고, 책을 읽는 순간을 무심히 바라볼 뿐이다. 녹화 분량에서 무엇을 건지게 될지는 제작진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멤버들이 카메라의 존재에 익숙해지고 무심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그들이 무방비 상태로 대화를 나누는 순간까지 인내한다. 그리고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지나가는 대화 속에서 주목할 만한 순간을 발견하면, 그것을 중심 맥락 삼아 비로소 편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방송적 인간, 예능적 인간이 아니라 그저 ‘인간’의 속내로, 최대한 깊게 들어가는 것. 그것이 나영석이 추구해 온 방향이다.
<1박 2일> 시즌 1의 멤버들과 다시 뭉쳐 오랜만에 중국 시안으로 떠난 tvN go 인터넷 예능 <신서유기>는 어떨까? 나영석은 조금 느린 템포지만 <1박 2일>이 그랬던 것처럼 레이스를 하고 복불복을 진행하며 게임을 통해 식사를 제공한다. 도로 돌아간 것일까? <1박 2일> 시즌 1의 재회라는 맥락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늘 만나면 게임을 하고 복불복을 하던 사람들을 모아놓고 갑자기 관조적인 일상 속으로 보낸다면 이 상황에선 오히려 더 인위적인 장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신 나영석은 예전과 같은 리듬으로 게임에 임하려는 강호동에게 “형, 그거 옛날 거예요.”라고 농을 걸며 시간의 누적을 상기시키고, 처음 메신저를 배워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강호동의 설렘에 주목하며, 멤버들과 쉬엄쉬엄 차 한 잔 하는 순간의 대화를 더 길게 담는다. 기존의 멤버들을 데리고, 하던 일을 한다. 대신 템포를 늦추고 미션과 미션 중간의 쉼표에 방점을 찍어 멤버들의 깊은 심중을 힐끔 들여다본다.
멤버들과 함께 차 한 잔 나누는 순간, 벌칙 용으로 마련된 저주파 치료기를 빌미로 예기치 않았던
강호동의 인생사가 힐끔 드러난다. 애써 인위적으로 게임을 줄이지는 않는다. 그저 쉼표를 늘리고 더 오래 지켜본다.
<신서유기> ⓒCJ E&M. 2015
단순히 빼기만 해서 모든 것이 흥행할 수 있다면 세상 일이 얼마나 간단하겠나. 그러나 보통 부가적인 기능들은 그 나름대로의 필요가 있기에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을 빼고 ‘본질’만 남겨 승부를 본다고 했을 때, 중요한 건 그 본질을 얼마나 충실하게 담아내어 부가적 기능의 부재를 만회할 수 있느냐다. 나영석은 특별한 이벤트를 빼고 일상을 담아낸 자리에, 더 많은 이들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드라마 대신 제한된 인물만 앞세워 그들의 내면으로 최대한 깊게 들어가는 것으로 승부수를 걸었다. 소비자의 정서적 만족감의 해상도를 높이는 일, 이 콘텐츠를 보고 있는 내가 화면 속 저 사람과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는 유대감을 제공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것이 이서진이, 차승원이 전에 없던 수준으로 인간적 매력을 과시할 수 있게 된 비결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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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한(TV 칼럼니스트)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