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 깊숙한 곳에서 욕을 끌어올리라고!
숨 돌릴 틈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코끝이 찡해진다. 울다가, 웃다가, 다시 웃다가, 소리 내어 울고 싶기도 하다. 이게 다 무대 위의 네 여자들 때문이다. <헤비메탈 걸스>의 주인공들-주영, 은주, 정민, 부진은 퇴직 위기에 몰려 있다. 부진은 이제 서른세 살, 수없이 이력서를 쓰고 또 쓴 끝에 간신히 사원증을 목에 걸었지만 회사는 그녀를 가족같이 여기지 않았나 보다. 주영, 은주, 정민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걸까. 그녀들은 16년 동안 월차와 생리휴가를 반납해 가며 일했는데도 해고를 눈앞에 두고 있다.
군대에서는 줄을 잘 서야 된다던데, 회사라고 다를 것은 없다. 그녀들을 비호해주던 차 부장 역시 정리해고 대상자가 되면서 그야말로 끈 떨어진 연만 바라보는 상황이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 부장 라인을 탈 걸 그랬지’ 뒤늦은 후회를 해봐도 달라질 것은 없다. 망연자실한 그녀들에게 차 부장은 특급(?) 정보를 알려준다. 새로 부임해 오는 사장이 헤비메탈 광팬이라는 것. 사장의 눈에 띄기 위해서는, 새로운 라인을 타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이 없다. 강렬한 헤비메탈을 보여줘야 한다. 목표는 회사 워크샵의 장기자랑 무대, 남은 시간은 한 달뿐이다.
헤비메탈을 배우기 위해 학원을 찾던 그녀들은 전직 기타리스트 웅기와 드러머 승범을 만난다. 지금은 비록 허름한 연습실을 지키고 있는 처지이지만 가슴에는 록 스피릿의 불씨를 품고 사는 남자들이다. 수강생이 없어 직접 홍보 전단지를 돌려야 하는 두 남자의 현실과, 반드시 한 달 안에 헤비메탈을 마스터해야 하는 네 여자의 현실은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렇게 다섯 남녀의 특별훈련이 시작됐다.
짧은 시간 동안 그럴싸해 보이는 무대를 완성해야 하기에 악기 연습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내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F.U.C.K’와 ‘ㅆ.ㅣ.ㅂ.ㅏ’를 끌어올려 샤우팅하기 위한 욕 트레이닝이 시작되고, 잡아먹을 듯한 야수의 눈빛과 절도 있는 헤드뱅잉 교육이 이어진다. 아, 이래서야 무대에 오를 수나 있으려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들의 앞날이 걱정되는 가운데, 마음과 다르게 입 꼬리는 자꾸만 올라간다.
헤비메탈이라고는 1도 모르는 여자들과 록 스피릿 하나로 세상을 버텨내고 있는 남자들. 그들이 만들어 내는 불협화음은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한다. 헤비메탈 밴드 출신의 두 남자가 보여주는 시범이라고는 눈을 부릅뜨고, 그르렁대는 소리와 찢어지는 고음을 내고, 과장된 액션을 취하는 것뿐이다. 그것들 어디에 록 스피릿이 있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몸짓들. 그 모습을 한껏 진지한 자세로 따라 하는 어설픈 네 여자는 더 큰 웃음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비메탈 걸스>는 록 스피릿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핵심만 요리조리 피해가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정곡을 파고드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지금 살아있는 거냐, 죽어있는 거냐?
“날 괴롭히는 것들, 널 괴롭히는 것들, 그냥 다 죽여 버려” 승범은 말한다. 맹수처럼 노려보고 소리를 내지르라고. 그러나 그녀들의 포효는 승범의 그것과 다르다. “뭔가 빠졌잖아. 오만함, 건방짐, 자신감. 다 어디 갔냐고” 승범은 닦달하듯 목소리를 높인다. 이번에도 그녀들의 눈빛은 승범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너를 가두고 있는 모든 틀을 깨 부숴버려” 그는 이야기하지만, 네 여자들에게는 그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가족과 꿈을 위해 회사에서 책상을 지키느라 오만함은 위축감과 맞바꾼 지 오래다. 자신감의 뒤에는 늘 불안함이 따라붙었다. 승범은 “앞에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짖어봐”라고 말하는데, 그녀들에게는 낯선 감각일 뿐이다. 한껏 건방지게 눈을 치켜 뜨고 ‘날 괴롭히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라고 경고하고 싶지만 그런 말은 늘 삼켜왔다.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였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긴 시간 꺼내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여전히 유쾌하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처럼 무대 위 그들의 고군분투는 재미있는 에피소드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네 여자가 살아내는 현실이 객석의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들의 슬픔이 보인다. <헤비메탈 걸스>는 그것이 우리의 슬픔임을 소리 없이 이야기한다. ‘무엇을 위해서 분노를 삼키고 자신감을 갉아가면서 살아가고 있나’ 씁쓸해 지다가도 ‘그 무엇이 그렇게 큰 바람이었나. 그저 먹고 살려고 애썼을 뿐인데’ 싶은 생각에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우리 지금 살아있는 거냐, 죽어있는 거냐”라는 승범의 읊조림이 아프게 박혀버리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연극 <헤비메탈 걸스>는 웃음 속에 눈물을 감춰두고 있는 작품이다. 짐짓 무게 잡지 않으면서도 무심하게 툭툭 던지는 말들로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니, 얄미운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재미있는 이야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즐거움을 견인하는 것은 배우들의 호흡이다. 특히 김수로와 강성진이 만들어내는 케미는 놓치기 아깝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입담, 대본과 애드리브의 경계를 알 수 없는 재치, 능청스러운 표정 연기가 섞여 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코미디를 이룬다.
세상에 맞짱 뜰 배짱이 두둑했던 시절은 이미 다 지나간 것처럼 느껴진다면, 갈수록 움츠러드는 어깨를 쫙 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면, 연극 <헤비메탈 걸스> 속의 록 스피릿을 충전할 시간이다. 공연은 6월 12일까지 대학로 쁘띠첼씨어터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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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