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테루의 『금수』는 10년 전 이혼을 한 남녀가 주고받는 편지 형식의 소설이다. 갈라선 지 10년이면 그저 덮어두고 싶을 법도 한데, 우연히 마주친 어느 날 이후 두 사람은 여러 차례 긴 편지를 주고 받는다. 이혼도, 이혼 후 10년이라는 세월도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아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거리를 둔 채 읽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아 좋다, 하고 말을 내뱉게 되었다. 아 하는 순간에는 숨을 조금 들이 마시고, 좋다 하는 순간에는 조금씩 길게 내쉬게 되는 그런 아 좋다 였다. 내 안의 내가 이 대화의 무언가에 감응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두 사람의 대화에는 깍듯함과 정중함이 깊이 배어있다. 머리매무새와 옷고름을 반듯하게 매만진 두 사람이, 조심이 무릎 꿇고 손을 가지런히 한 채 앉아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때 대체 왜 그랬는지, 왜 우리는 이혼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후 각자는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 억센 감정이 섞여들 수 밖에 없을 대화를 나누면서도 감정은 10년의 시간만큼 적당히 뒤로 물러앉아 있다. 원인과 책임에 대한 공방 보다는 그 이후 서로가 겪었을 힘겨움에 예를 갖춰 공감하고 그간의 삶을 진솔하게 털어놓는 이들의 대화는,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아련하게 고양시킨다. 감정의 과잉 없이, 섣부른 판결 없이, (편지이다 보니) 말허리를 자르는 일 없이 상대가 충분히 얘기하도록 허락하는 대화가 너무도 아름답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대화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경로에 대한 답답함과 아쉬움이 깊게 배어있다. 서로 헤어지게 된 데는 두 사람의 책임이 있지만, 무엇보다 두 사람은 서로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헤어지고 ‘싶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헤어지게 된 것은 몇 가지 원인으로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다. 헤어진 이후 각자의 삶이 겪는 불운들은 더욱 더 명료한 설명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두 사람은 내 인생이 어디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되물으며 살아왔다. ‘업보’라거나 ‘나와 만나는 사람은 불행해진다’ 같은 자의적인 법칙을 세워놓고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려는 시도도 해보지만, 인생이란 ‘불가사의한 법칙과 구조를 숨기고 있는 우주에 놓여있는 것’ 이라는 생각 외엔 적절한 설명이 불가능해 보인다.
불가해한 인생에 대한 속 깊은 대화. 두 사람의 대화가, 가늠하기 쉽지 않은 인생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내 마음을 깊게 건드리는 부분에 대해 비로소 짐작해 본다. 겉으로 어떤 표정을 지으며 살든 대개 인생에 대한 나름의 두려움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두려움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을 적당히 무마해 버리는 우리들. 그러다 정말 가끔, 속 이야기를 차분히 풀어놓을 기회를 우연히 누리게 되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따뜻한 충만함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감동이다. 마음 속 두려움이 단 1그램도 줄어들지 않더라도, 그런 대화를 속 깊게 나누는 것만으로 우리는 겉 표정이 아닌 속 표정으로 웃게 된다. 바로 그 웃음이, 이 소설을 읽고 내가 길게 내뱉은 아 좋다 와 같은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의 주인공과 우리의 인생이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막막한 인생에 대한 속 깊은 교감의 순간은, 그저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우리의 마음까지 아련하고 애틋하게 고양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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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미야모토 테루 저/송태욱 역 | 바다출판사
20세기 후반 일본 순수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미야모토 테루는 [환상의 빛]에서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현대 일본 서정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환상의 빛]을 “시간의 소금기가 묻어 있는 아름답고 쓸쓸한 문장들”이라고 표현한 이유다. 《금수》는 [환상의 빛]을 모티브로 삼은 본격 서간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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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광
다행히도, 책 읽는 게 점점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