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본>의 주인공인 미국인 제이슨 본(맷 데이먼)과 <나의 산티아고>의 주인공 독일인 하페(데비드 스트리에소브)가 2016년 여름, 스페인 세비야의 한 카페에서 마주친다. 두 사람은 초면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서로의 영화를 보았다. 둘 사이에 대화가 시작된다.
<제이슨 본>의 제이슨
<나의 산티아고>의 하페
하페: 올라(Hola―안녕). 제이슨.
제이슨: 반갑소. 하페. 영화보다 살이 좀 붙은 것 같소만.
하페: (멋쩍게 웃으며) 산티아고 길을 걸은 뒤 이것저것 먹었더니 체중이 도로 불은 것 같아요. 제이슨, 당신은 어떻게 지내죠?
제이슨: 나는 다시 CIA의 추적을 피해 다니고 있소. 조직에 돌아가지 않으면 제거돼야 하는 게 그 세계의 법칙이니까.
하페: 당신은 왜 조직에 돌아가지 않은 거죠? 조직 안에 있어야 안전하고, 인생이 편해지고.
제이슨: (미간을 좁히며) 조직? 조직은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소. 조직은 조직의 논리로 움직일 것이고, 끊임없이 내 생각과 다른 임무를 맡길 것이고, 나는 나와 아무 관련 없는 누군가를 향해 총구를 겨누게 될 것이고. 그래서 결심한 거요. “다른 삶을 찾아보겠다”고.
하페: 하지만 조직은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 불안한 숨바꼭질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까요? CIA 국장 로버트 드웨이(토미 리 존스)도 당신에게 말했잖아요. “마음의 평안을 얻고 싶으면 네가 누군지 받아들여야 한다”고. 당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지금까지 당신이 걸어온 CIA 비밀요원의 길, 당신의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제이슨: 나를 도우려 했던 동료 니키(줄리아 스타일스)의 말이 생각나는군. “기억한다고 다 아는 건 아니지.” 기억이 이끄는 대로만 살 수는 없소. 기억에 속지 않으려면 기억 뒤에 감춰진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하오. 내가 암살요원이 됐던 건 거짓말에 속았기 때문이오. 내 삶을 더 이상 조직의 거짓말에 맡길 수 없소. 리어왕의 대사처럼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알기 위해 찾아다녔지만 그것은 바로 나였소. 오직 나만이 내가 누군지 말할 수 있는 거요. 당신이 산티아고 길로 떠난 것도 당신을 잃었기 때문 아니었소?
하페: 맞아요. 제이슨. 당신도 알다시피 코미디언인 나는 무대 위에서 쓰러지고 말았죠. 휴식도 없이 일정에 끌려 다니다가. 그게 번 아웃 증후군이란 걸 뒤늦게 알았어요. 그동안 ‘멈추면 쓰러진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았던 것 같아요. 대중의 박수와 환호 속에 살면서 내가 누구인지 잃어버리고 말았던 거예요.
제이슨: 나는 킬러이고, 당신은 코미디언이란 것만 다를 뿐, 둘 다 자기 자신을 잃은 채 맡은 일, 맡겨진 일로만 살았던 삶이었소. 하페. 당신은 정말 신(神)이 있는지 알고 싶었소?
하페: (한숨을 내쉬며) 그래요. 하지만 영화에서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신은 어찌 알 수 있느냐”고 했잖아요. 순례길 초입에 있던 푯말이 말하고 있더군요. ‘당신이 누군지 아십니까?’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푯말이 물은 건 내 직업이나 무대에 서 있는 나, 남의 눈에 비쳐진 내가 아니었어요. ‘하페’라는 예명으로 불리기 이전의 나, 한스 페터였던 나,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서 자라난 아이였던 나, 어려서부터 남을 웃기고 싶어 했던 나. 그렇게 내가 산티아고 길에서 만난 건 나였어요.
제이슨: (컵을 응시하며) 아테네, 베를린, 런던, 라스베이거스…. 내가 세계의 도시들을 방황하며 나를 기억해냈듯이 당신도 산타아고 길을 걸으며 당신을 기억해낸 거로군. 그것이 꼭 산티아고 길이어야 했소?
하페: “산티아고 길은 수많은 길 중 하나”예요. 중요한 건 순례길에서 만난 스텔라(마르티나 게덱)가 던진 말대로 “목표에 도달하려면 혼자 걸어야 한다”는 거죠. 광활한 자연과 끝없이 이어진 길 위에서 내가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절감하고, 땀 흘리면서 한 호흡 한 호흡을 느끼며, 나의 육체성과 정신성을 동시에 확인하는 것.
제이슨: 나도 알지. 그 느낌. 관념이 아니라 땀과 눈물, 발바닥의 물집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면서.
하페: (제이슨을 바라보며) 제이슨. 조직도 그렇지만 대중의 박수도 영원하지 않아요. 결국 나만의 리듬을 찾아야 하죠. 하페로 살면서 동시에 한스 페터의 삶을 찾아가야 하고, 제이슨 본으로 살면서 데이비드 웹의 삶을 찾아가야 해요. 내면의 목소리를 놓치면 모든 것을 잃게 되죠.
제이슨: 그렇소. 하페. 요구 받은 대로 살다보면 나는 증발되고 말지. 남들의 ‘좋아요’가 우선이 돼선 안 되오. 내 생각의 결정권, 내 삶의 결정권은 내가 쥐고 있어야 하오. 그래야 함께 갈 수 있고, 끝까지 갈 수 있지.
하페: (제이슨의 말을 반복한다) 그래야 함께 갈 수 있고, 끝까지 갈 수 있다.
제이슨: (시계를 보며) 이제 떠날 시간이오. 부디 당신의 길을 끝까지 걷길. 부엔 카미노(Buen Camino―좋은 여행을).
하페: (손을 흔들며) 부엔 카미노.
제이슨이 창 밖 거리를 살핀 뒤 카페를 빠져나간다. 하페는 수첩을 열고 연필로 뭔가를 적는다.
‘오늘의 교훈: 남들이 당신을 설명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라.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또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남들이 말하게 하지 마라.’(마사 킨더, 은유의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재인용)
권석천(중앙일보 논설위원)
1990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2007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법조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앞에 놓인 길을 쉬지 않고 걷다 보니 25년을 기자로 살았다. 2015년에 <정의를 부탁해>를 출간했다. 이번 생에는 글 쓰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
상댕
2016.08.23
책사랑
2016.08.19
그렇습니다.. 새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