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SBS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과 요시다 아키미 만화 『바나나피시』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작품 제목) 혹시 새드엔드인가? 새드면 그냥 안 보려고.” 최근 SNS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길 보았다. 나는 이걸 보고 약간 의아했는데 작품이 새드로 끝날지 해피로 끝날지, 그도 아니면 ‘3년 후’ 엔딩일지 열린 결말일지를 처음부터 알고 보면 그건 그냥 작품의 핵심을 완전히 찌르는 스포일러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낮수1 #찐따수2 좋아하니까 그런 취향 같은 건 작품 페이지에 길잡이처럼 써놓을 순 있다 쳐도 이 작품이 어찌 끝날지를 써놓으면 결말을 어느 정도는 알고 보는 건데(이를테면 로맨스인데 새드엔드일 경우 적어도 메인 주인공이 함께하는 결말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건데) 그렇게 보면… 재미가 있을까? 내가 이런 이야길 하니 듣고 있던 웹소설PD 친구가 진지하게 말했다. “새드로 끝날지 몰랐다고 여태까지 결제한 회차를 환불 요청하는 독자가 종종 있어…”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결말이 새드일지 해피일지 각이 설 정도면 읽을 만큼 읽으셨을 텐데 새드엔드가 맘에 안 든다고 환불해달라 한다고… 아니, 작가가 처음부터 그렇게 끝내리라 맘을 먹었거나, 혹은 개연성에 따라서 슬프게 결말을 내야 할 때도 있고 심지어 끝내주는 새드엔드를 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근데 그냥 새드라서 싫다, 새드라서 환불해달라? 오호통재라…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닌 듯했다. (애초에 웹소설PD가 얼마나 바쁜 분들인데 저런 없는 이야길 왜 지어내고 있겠는가.) 나로서는 해피고 새드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작품 페이지에 결말을 못박아두면 스포일러 하지 말라고 CS를 보낼 것 같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 마침 모 인터넷 커뮤니티에 ‘내 돈 내고 보는 건데 우울한 건 싫음! 무조건 해피엔드파 VS 여운에 잠기는 건 슬픈 게 최고! 새드엔드파’라는 제목의 게시글이 있길래 살펴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해피엔드를 선호하는 경향이 예상 이상으로 주류였고, 심지어는 아무리 재밌고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 해도 새드엔드면 절대 보지 않는다, 모르고 봤는데 새드엔드면 사기당한 기분이 들 정도로 싫다, 나이 먹을수록 슬픈 결말을 멀리하게 된다, 현실이 너무 힘들고 팍팍한데 돈 쓰고 우울해지는 게 싫다는 반응들도 있었다. 하물며 작품 페이지 하단 리뷰란에 ‘스포일러 댓글’로 새드엔드일 경우 이를 알려주는 댓글을 달아두는 것까지 보았다.
그뒤 새 작품을 준비중인 작가님과 이런 이야길 나누었다. 지금 준비하는 신작이 처음으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걸 관철할 작품이라서 너무 중요한 작품이 될 것 같다, 그럼에도 한 가지 고민이 있는데 결말이 새드엔드라 걱정이라는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고민을 다른 작가님께도 들은 적이 있었다. 로맨스인 차기작은 죽음이 예견된 주인공에게 별다른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죽는 결말인데, 나는 그런 슬픈 이야기가 취향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해피엔드에 비해 우울한 작품을 선호하지 않으니 조금 걱정이라고. 나는 작가님들께 이야기했다. 결말 바꾸지 마세요,
“그 작품으로 새드 면역을 길러드리는 겁니다.”
나라고 해서 가슴 찢어지게 슬프고 우울하고 찝찝한 것만 골라 보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감정 이입을 심하게 하는 편이고 새드엔드가 주는 고통과 후유증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최근 본 가장 슬픈 결말은 연애 프로그램 <나는 SOLO> 26기였다. 최종 선택에서 원치 않은 커플이 성사되었는데, 아… 납득하기 힘든 결말이 주는 파괴력과 답답함을 실감했다. 근데 누가 누구랑 사귀는지 그런 건 내 알 바가 아니고 그분들 인생이 그대로 엔딩을 맞이해 끝난 것도 아닌데 지금 잠시 커플 성사된 게 새드일지 해피일지 어떻게 알아? 그렇게 생각하니 마흔 가까이 된 성인들이 시청자 맘대로 이어지지 않는 것 정도는 새드 축에 끼지도 못하겠군… 허나 ‘작품’은 좀 다른가보다. 누군가가 시작하여 끝이라는 매듭을 지을 수 있는 ‘작품’이란 건 마침표와 함께 그대로 한 세계가 닫혀버리는 일이고, 그 세계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감상자들은 도저히 내가 좌우할 수도, 미칠 수도 없는 닫힌 세계 안에서 아끼던 인물들이 고통과 슬픔에 절여져 남겨질 것을 생각하면 새드엔드가 괴로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약해.
나약하다구.
그런 건 너무 나약하다구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새드엔드가 준 충격을 떠올리면 만화보다는 드라마가 떠오르는데 하지원, 조인성, 소지섭이 출연한 SBS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이었다. 이 드라마는 하지원을 두고 조인성과 소지섭이 어마어마한 삼각관계를 이루는데(조인성과 소지섭이 격전을 벌인다기보다는 하지원이 정말로 조인성과 소지섭 두 사람을 다 사랑한다), 하지원은 마지막에 소지섭과 함께 발리로 떠난다. 하지원을 너무도 사랑했던 조인성은 배신감과 울분에 차 두 사람을 찾아가고 총으로 나란히 누워 있던 소지섭을 쏴버린다. 이어서 하지원까지도. 그때 총을 맞고 죽어가는 하지원은 조인성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한다. “사랑해요.” 내가 그토록 사랑한 그녀 또한 자신을 사랑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조인성은 터덜터덜 발리의 해변으로 향한다. 방금 막 사랑하는 사람을 제 손으로 죽인 그는 그녀를 쏘았던 총으로, 마찬가지로 자신의 머리를 쏴버린다. 총성과 함께 원경에서 까만 실루엣만 잡힌 조인성의 쓰러지는 모습… 지금까지 <발리에서 생긴 일>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나(초등학교 3학년)……
다 죽자 결말이 초등학교 3학년에게 알려준 것.
“사랑 빼면 시체라고? 그걸 어떻게 알지?”
“사랑을 빼봐.
그리고 진짜 죽는지 아닌지 니 두 눈으로 지켜봐봐.”
(아직도 눈을 감으면 하지원의 고백부터 조인성의 자살 장면까지가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렇게 강인하게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도대체 왜 그래야 했을까. 둘에게 그게 정말 최선이었을까? 주말드라마로서 다가오는 월요일을 맞이하기에 이런 결말 정말 괜찮았던 걸까? 좀더 행복한 결말은 불가능했던 걸까? (그래도 마지막에 가서야 조인성이 하지원의 진심은 알게 됐고 하지원도 자기 마음을 전했으니 된 거 아닌가ㅎㅎ 라고 생각했는데 정확히 이 드라마 새드엔드인 이유를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라는 가사처럼 나 아닌 타인을 사랑하는 일에서 오해와 엇갈림은 필연적이며, 사랑을 포함한 인생이란 게 늘 최선, 아니 그냥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조차 굴러가지 않는 법인데다가, 이 모든 것들의 무대인 세상은 이탈의 욕망을 자극하다가도 제자리로 돌아오라는 귀환의 저주를 반복하는 곳이다. 그 흐름 속의 인간은 (하물며 다 알고도) 행복으로 여겨지는 지름길을 등진 채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예술은 행복뿐만 아니라 이러한 삶의 진실까지도 다룬다. 아니 다루어야 한다.
요즘, 그러니까 너무나 수많은 작품이 존재해서 안 보려면 평생 안 보고 살아도 되는 것들이 즐비하고 보고 싶지 않으면 굳이 안 봐도 되는 작품이 넘쳐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과연 예술이 선사하는 ‘슬프기’를 택할 수 있는 사람일까? 행복하게 결말을 내는 것이 쉽다거나 해피엔드 가치를 낮추는 이야기가 아니다. 개연성 없는 해피엔드로 끝날 작품을 떠올려보시길. 다들 행복하게 잘 살았대요. 어떻게 잘 살았는데요? 그냥 뭐 좋은 게 좋은 거다 하면서 잘 살았겠죠? (포털에 ‘애정촌 엔딩’을 검색해보시길.) 이런 식의 해피엔드를 보고 있으면 행복한 맺음 또한 무척 어렵고 오히려 어떻게 끝낼지 모르겠어서 인물들을 다 죽여버리는 새드엔드가 편리할 수도 있다. 때로는 오로지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등장인물들을 다 죽인다든지 하는 개연성 없는 결말을 내는 작품도 있다. 하여간 나는 지금 행복과 슬픔 중 무엇이 더 쉽고 어려운지, 가치가 있는지, 어떤 결말에 명작 비율이 높은지 이야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새드엔드를 그리는 작가와 그것을 읽는 독자의 줏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힘든, 어쩌면 누구도 반기지 않는 새드엔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작가와 그 길을 좇아 걸어가는 독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로 유명한 요시다 아키미 작가는 일본에서 『바나나피시』라는 작품으로 먼저 그리고 더 크게 이름을 알린 만화가다. 『바나나피시』는 1973년의 뉴욕을 배경으로 ‘바나나피시’라고 불리는 수수께끼의 약을 뒤좇는 천재 소년 애시와, 장대높이뛰기 선수를 그만두고 사진 공부를 위해 미국에 왔다가 애시를 만나게 된 일본 소년 에이지의 사랑 이야기다. 애시가 마피아, 갱단과 같은 위험한 존재들과 쫓고 쫓기며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가 중심이고 그 어떤 만화보다도 마약에 대해서 진지하게 그린 작품이지만, 애시라는 기구한 거리의 소년이 스스로 강해지는 것 말고는 살아갈 수 없었던 아픈 사연이 드러나며 이 만화를 이야기할 땐 가장 먼저 사랑, ‘순정만화’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줄거리와 작품에 대한 소개만 잠깐 들었을 땐 비상한 머리와 뛰어난 전투력을 가진 애시가 위험한 일을 쫓게 되면서 그에 휘말린 에이지라는 순수 소년을 지키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다.
“난 대체 왜 그렇게 널 지켜주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이 대사는 에이지가 애시에게 하는 대사다. 누구도 믿지 않고, 성장하는 방법이라곤 소중한 것을 하나씩 잃는 것뿐이었고, 약해지는 방법을 몰랐던 소년이 드디어 자신을 지켜줄 소년을 만난 것이다. 나는 숨도 못 쉬고 단번에 『바나나피시』 전권을 읽었는데 서로를 지키기 위해 멀어져야 했던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지키기 위해 재회까지 거쳐야 했던 수많은 우여곡절을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이런 슬픈 작품을 읽으면 정말로 가슴 부근에 물리적 아픔이 느껴진다. 이럴 때 잠깐 책을 놓고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눈동자에 고여 있던 맑고 뜨거운 물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관자놀이로 흐르는 게 느껴진다…) 이렇게 해서 너희에게 남는 게 오직 사랑밖에 없는 거면 지금 너희가 겪어야 하는 고통은 너무 크지 않니? 고작 사랑 때문에 이러는 거면 너희는 대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 거야?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한 두 소년을 보면서 나는 이 모든 개 같은 고통 끝에는 팔이 한쪽 없든 얼마나 너덜너덜해졌든 간에 애시와 에이지가 함께하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젠 다시 만나지 않을 거야. 이제 못 만난다고 하더라도… 생각만 하는 것도 안 되나?”
그리고 애시가 죽었다. 에이지는 애시가 없는 세상을 살아갔다.
『바나나피시』는 잔인하다. 아니 이걸 그린 요시다 아키미는 정말 잔인하다. 애시에겐 에이지만 있으면 됐다. 에이지만 옆에 있으면 애시는 살아갈 수 있었다. 에이지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였는데 아키미 작가는 정말로 그거 하나를 이루어주지 않았다. 끝끝내 애시를 죽이고 심지어 애시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에이지의 모습까지 그려주었다. 나는 작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애시의 관 뚜껑을 한참 보고 있다가, 비로소 작품에서 빠져나오면서 생각했다. 나는 대체 왜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이길 바랐던 걸까? 작가가 낸 결말과 다르게 애시와 에이지가 함께하는 결말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그건 그거대로 이견 없다. 『바나나피시』가 해피엔드였어도 이 만화는 훌륭한 작품이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이 정도로 상처받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과정과 바라는 대로 맺어지지 않은 인물들을 그 자리에 놓아두고 떠나와야만 했던 경험이 나에게는 진정한 상처였고 영혼의 훼손이었다. 작품이 이렇게 슬플 수도 있고, 이렇게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라고 예상한 결말로 가지 않는 것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도 알았다. 그런데 애초에 모두가 바라고 예상하는 결말이라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그런 건 꼭 그 작가가 아니더라도 혹은 그 작품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상상할 수 있고 으레 낼 수 있는 결말이란 뜻이다. 그래서 그 파괴적 결말은 내가 좌우할 수 없는, 작가와 작품이 갖는 절대적인 힘에 대한 굴복이기도 했던 것 같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다. 작가가 그렇게 끝내버렸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는 동안 어느 날 문득 두 소년이 떠오르는 날에 ‘에이지에게 애시는 어떤 존재로 남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슬퍼질 줄 아는 사람일까? 슬픈 건 나쁘고 힘들기만 한 걸까? 슬픈 게 싫다, 슬퍼지고 싶지 않다, 슬퍼하며 살지 않겠다. 그건 꼭 불완전한 삶처럼 들린다. 슬픔이 없는 삶은 없고 예술은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그린다. 그 감정에는 당연히 외면하고 싶은 어둠, 우울, 슬픔, 고통도 있다. 예술은 우리가 느껴야 하는 모든 것들을 그리는 것이다. 슬퍼야만 완전해지고, 때로는 바라지 않는 결말에 독자들을 도착시켜야만 예술의 소임을 다 하게 되는 그런 작품이 있다. 그런 작품을 만나면 나는 이야기 속의 캐릭터에 불과한 자들을 두고 그들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지 상상한다. 그 상상은 오직 내 머릿속에서 평행 세계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와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슬픔의 전조를 느끼며 가슴이 찢어질 준비를 한다. 애시와 에이지가 어떤 모습이어야 행복해질지 나는 잘 안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본다… 봐버린다.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내가 공들여 만난 슬픔이다. 그렇게나 슬퍼했으니 이 결말은 너무나 완벽하다. 나는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슬픔을 만나는 기쁨을 누린다. 삶의 두께를 늘리는 이해와, 행복을 알기에 슬픔도 알 수 있다는 (그리고 그 반대도 너무도 당연하다는) 희로애락의 진실이 나를 조금 더 완전하게 만든다. 이 감정 속에서 나는 기쁘고도 슬플 줄 아는 사람. 혹은 슬프고도 기쁜 사람이 된다.
그런 의미로 이제 막 나온 새드엔드 만화를 하나 추천합니다. (지금부터는 광고입니다. 소정의 경제적 지원은 받지 않았고요, 그냥 제가 편집한 책입니다.) 『오후의 광선』은 마찬가지로 두 중학생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엄마의 새 연인을 둘러싸고 집안 문제로 고뇌하는 요도이와 트라우마로 인해 그로테스크한 것에 성욕을 느끼는 무라세가 그 주인공입니다. 요도이는 해부 실습중 배 가른 개구리를 관찰하며 흥분한 무라세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버리는데, 그뒤 무라세는 이상한 놈으로 찍혀 양아치 무리의 표적이 되어버립니다. 어느 날 참다못한 요도이가 괴롭힘당하는 무라세를 구해주고 그날을 계기로 둘은 아픔을 나누며 점차 가까워지지요. 저는 이 작품을 처음 읽고 울었는데, 같이 읽은 동료 편집자님도 울고 번역한 번역가님도 울고 식자 작업을 한 디자이너님도 울었다고 해요. ‘담당자가 울었다’라는 이야기는 일종의 마케팅적 문구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울어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결말을 알리는 데 노했던 저였으니 『오후의 광선』에 대해 짧게 소개하고 얼른 글을 마치자면, 한 소년이 한 소년을 영원히 기억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랍니다.
1,2 '자낮수'는 '자존감 낮은 수'의 줄임말로 자존감이 낮은 캐릭터를, '찐따수'는 '찐따 같은 수'의 줄임말로 어수룩하고 찌질한 캐릭터를 의미한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김해인
만화 편집자. 출판사 스위밍꿀에서 에세이 『펀치: 어떤 만화 편집자 이야기』(2024)를 냈다. 집 가서 만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