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마지막 주, 대학로에서 펼쳐지는 <2016 서울국제작가축제(한국문학번역원 주최)>의 주요 프로그램은 ‘작가들의 수다’와 ‘낭독과 공연’이다. 서로 다른 언어로 각자의 문학을 하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시인들의 수다는 무슨 내용일까. 그리고 그 깊이는 어느 정도일까. 궁금증을 가지고 미리 시인 이수명을 만나 보았다.
시인 이수명이 추구하는 시 세계를 설명해주신다면?
무엇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추구하고 어디로 가려는 것은 그럴 듯한 일일 수는 있는데, 글쎄요. 시는 그렇게 무엇을 명확하게 알고 움직이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보다 시는 아직 오지 않은 어떤 것을 향한 서성임이랄 수 있어요. 다른 모든 것은 목표가 있고, 모르던 것을 알려고 하고, 알게 되어 지나 가고자 하는 정복에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면, 시는 그러한 회로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눈앞에 무엇인가가 쓰여도 여전히 쓰이지 않은 것, 읽을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 오지 않은 것에의 감지와 서성임이지요. 시는 그러한 미지의 것들을 지나치지 않고 그 앞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가 해요. 저는 제 시를 읽는 독자들이 무엇을 읽어내고 추구하려 하기보다는 그 서성임을 호흡하고 느끼고 각자의 방식대로 상상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각자의 방식이라면, 독자들의 새로운 해석도 환영하신다는 말씀인가요?
물론입니다. 시인은 시를 쓸 뿐이지 그것을 어떤 식으로 접하느냐는 독자들의 몫이죠. 저는 제 시가 독자나 평론가들에 의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읽히고 흘러 다니는 것을 즐깁니다. 그래서 제가 쓴 시가 낯선 옷을 입고 다시 제게 올 때의 거리감이 좋습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시도 일정하지 않고 불확실한 산물이거든요. 그것은 계속 다르게 보이고 그래야 합니다.
“시는 현실에 대한 것도, 비현실에 대한 것도, 꿈도 이상도 들려주지 않는다”(이수명 시론집 『횡단』)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독자들은 시에서 어떤 것을 기대해야 하는 건가요?
시의 언어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 언어가 아니라, 그냥 ‘보여주는’ 언어라고 생각해요.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입장을 갖는 것이죠. 시는 입장이 없습니다. 그냥 세계와의 접촉에서 나오는 파문 같은 것이에요. 사물과 세계가 그 자체로 경이로운 것이어서, 그 경이로움이 주는 충격을 맞이하는 것이라 해도 되겠네요. 시는 그러한 충격이 빚는 감각의 무늬겠지요. ‘보여주는’ 언어라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에요.
또 “과거에 쓰여졌어도 결코 나이를 먹지 않으면 현대시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월이 지나,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이 시는 참 ‘현대시’다 싶은 시가 있으신지요?
모든 시대마다 나이를 먹지 않는 시들이 있어요. 1930년대 ‘이상’의 시가 그래요. 이상의 시는 늙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추종자들이 생겨나고 연구들이 쌓이는 거죠. 이상의 시처럼 어느 시대가 되었든 그 시대에 갇히지 않는 시들이 있어요. 시대의 감각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실은 시대에서 비롯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넘어, 역사를 넘어서, 일종의 극지로서 존재하는 시들이지요. 이것이 실로 ‘현대시’가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문학사는 이러한 현대시들에 의해 주요한 흐름을 형성해 왔다고 할 수 있어요. 이상뿐 아니라 김수영, 김구용, 김종삼 등이 그랬구요.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탐험적인 현대시들이 계속 나타나서 시대의 경계에 갇히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시간을 읽어낼 수 없는 이런 시들이야말로 새로운 무언가를 창출한다는 의미에서 첨단에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방가르드’라는 말은 이를 가리키죠.
일상적인 어법이나 고정관념을 전복시키는 시인이라는 평을 듣고 계시는데요. 특히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나무는 도끼를 삼켰다」)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하고 그것을 전복시키는 것 같아요.
항상 ‘새로운 방식으로 보거나 말하기’에 관심이 많아요.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는 세 번째 시집 『붉은 담장의 커브』에 실려 있는 것인데, 나무가 도끼나 번개를 삼키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나무는 더 이상 정적이고 무언가를 수용하기만 하는 존재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더 크고 위험하고 험악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정적인 것에서 동적인 것으로 위치만 바뀐, 반사적인 우월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삼킨다는 동력이 사실은 도끼에 찍히거나 번개에 찔리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나무 안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대립적 방향, 또는 이상한 균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어요. 나무는 가만히 있는 듯 보이지만, 좀 더 넓은 모순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존재는 그 자체로 모순의 날카로운 결집 같은 것으로 보여요. 제가 이런 묘사들을 그동안 많이 했는데 최근에는 전복보다, 전복시키지 않으면서 전복하는 작업에 관심이 있어요.
‘전복시키지 않으면서 전복하는 작업’은 어떤 걸 말하는 거죠?
전복이란 단적으로 말하면 표현주의나 초현실주의 이미지처럼 예술가가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서 현실의 논리를 탈골 시키는 것을 말하겠지요. 표현주의에서의 불안의 표출이나 초현실주의의 무의식의 발로 같은 것들은 부정이나 파괴와 같은 과격한 에너지의 발산과 관계가 있습니다. 저는 초기 시에서 이러한 전복과 비약을 자유의 일환으로 이해했어요. 자유는 논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세우면서 부수고 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는 생각이었죠. 이러한 발상은 지금도 제 작업의 중요한 근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그것이 너무 문학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아무리 놀라운 것이어도 전복은 문학적 수사의 화려한 변주인 면이 있고, 시인이 일그러뜨리는 데 달려 있지요. 시인이 손을 많이 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도한 액션 못지않게 시인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듯 보이는 제 멋대로의 장면들이 더 전복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시인이 건드릴 수 없고 건드릴 필요조차 없는, 태연하게 움직이는 실상이 더 극적인 면이 있기도 하구요. 시인은 단지 이 장면을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손을 대지 않는 전복, 전복시키지 않는 전복이라는 말을 한 것이에요. 현상은 언제나 우리를 유린합니다. 그 불확실성과 가변성에 의해, 무자비함과 무관심에 의해, 우리를 지배합니다. 예술 속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전복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현상은 그 자체로 전복적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전복되는 쪽은 오히려 인간이 아닌가 해요.
작품에서 신체에서 분리된 이미지들의 사용이 독특했는데요. 팔이나 머리(「부서진 계단」), 이(「이빨들의 춤」), 눈물(「누군가」) 등. 그래서 그로테스크함마저 느껴지는데요, 분리된 신체의 이미지들에 어떤 의도가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신체 분리나 절단, 훼손의 이미지들은 그동안 제 시에서 자유롭고 편하게, 자주 벌어지는 현상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비약들을 즐기고 거기서 발생하는 새로운 자극들을 작품의 자양분으로 삼곤 했어요. 이와 같이 기교나 밀도가 높은 공작성에서는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한 부분에서의 분리와 치환이 나타나지요. 전복이라는 것은 이러한 모든 작업의 효과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방금 말씀 드린 것처럼 최근 시에서는 이와는 별도로 태연한 전복, 전복시키지 않는 전복에 어울리는 시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물류창고」시리즈는 말씀하신 시들과 외형적인 액션의 밀도가 전혀 다르죠. 공작성을 최소화해서 시적인 액션을 가미하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세밀한 손질을 하지 않고 그냥 큰 화면을 떠서 이 장면이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물류창고」는 작년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제목을 그냥 「물류창고」라 하고 벌써 여러 편의 시를 발표했어요. 이 시들은 일련번호를 붙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연작시도 아니고요. 동명의 제목 하에 작동하는 여러 편의 시들을 동시에 풀어 놓은 것입니다. 각 시 속의 장면들이 스스로 산란하고 발생하고 계속 섞이면서 움직이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물류창고」라는 제목으로 언제까지 쓸지, 이 작품들이 모여 무엇을 형성할지 사실 아직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저도 이 속에서 떠다니는 기분이에요.
시론집도 내시고 시문학, 시사에 관한 여러 글을 발표하셨는데요. 시론집 『횡단』에 보면 토마스 만, 마그리트, 브네, 뒤샹 등의 예술가에 대한 글도 있구요. 요즘 관심 있으신 예술가 혹은 작품은 무엇인가요? 문학적 영감을 주는 시인 외의 예술가는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자아정체성이 사라져가는 현대 예술의 미숙함과 미결정성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특정 예술가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회화든 설치든 미술관이 아닌 거리나 임의적 공간에 일시적인 제스처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며, 아무 것도 붙잡지 않으려는 현대 예술의 비환상에 마음이 끌린다고 할까요? 정체성이란 과잉이나 결핍과 연관된 환상이죠. 그런 것이 사라진 평범한 모습으로 존재는 이제 어떠한 뉘앙스로도 가능하고 무엇으로도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그러한 점에서 지금 미술과 문학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미술에서든, 시에서든 존재는 낙서와 같이 휘갈겨질 뿐이지요.
그럼 혹시 ‘시’나 ‘미술’ 중 어느 것이 울림이 더 크다고 생각하시나요?
둘 다 울림을 주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아요(웃음). 무엇을 주려고 하는지 알기 어려워졌어요. 예술이라는 행위가 언제나 인간에 대한 의문을 존속하게 해서, 이 의문을 통해 예술은 존재하는 것 같군요. 시나 미술이나 다 강한 것이고 비교하는 일이 별 의미가 없어요. 시의 언어가 좀 더 추상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일률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없고, 또 6권의 시집을 내는 동안에 시에 대한 제 생각은 늘 불균형적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2016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가하시는 소감은 어떠신지요?
외국시인들과 만나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시 세계를 느껴보는 귀한 자리라 소회가 각별합니다. 무엇보다 언어의 장벽을 통해 나누는 대화라 한국 시인과의 대화 때보다 언어의 질감이 더 많이 감각될 것이고, 그 질감이 시의 가장 귀한 성분이겠지요. 그래서 모처럼 세계의 시들뿐만 아니라, 시, 한국의 시, 한국의 현대시를 조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서울국제작가축제
'2016 서울국제작가축제'가 9월 마지막 주, 대학로에서 그 막을 연다. 축제 준비가 한창인 8월의 어느 날. 설렘으로 잠을 설치는 소풍 전야처럼, 9월의 작가축제가 문득 궁금해진다. 작가축제에서 만나 볼 작가들의 릴레이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