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 기질은 모든 인간 사회에서 인정되는 특징이다. 그러나 특정 정당과 정치운동이 보수를 자처하는 모습은 대체로 영어권 국가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 흥미로운 현상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점은 관습법에 기초한 영국식 통치의 전통을 물려받은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사이의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심각한 차이다. 영국과 미국은 서로 공통된 역사를 예민하게 의식하면서 현대 세계에 들어섰다. 이후 두 나라는 20세기의 정신적 충격을 이겨냈고, 서로를 하나로 묶는 문명을 지키기 위해 협력했다. 그리고 영국이 자국민의 전반적인 불만을 무릅쓰고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에 가입한 오늘날까지도 대서양동맹Atlantic Alliance(북대서양조약기구의 별칭-옮긴이)은 여전히 대중의 호감을 얻고 있다(2016년 현재, 영국은 6월 23일에 이뤄진 국민투표 결과, EU 탈퇴가 확정되었다-옮긴이). 이것은 우리가 여전히 의식주 차원을 뛰어넘는 어떤 것을 지향한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바로 그 어떤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대처Thatcher와 레이건Reagan 시절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낱말로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자유. 그러나 자유라는 낱말에는 맥락이 필요하다. 과연 누구의 자유를 어떻게 행사하고, 어떻게 제한하고,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최근에 어느 미국인이 중세의 인신 보호 영장(백성을 구금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 백성을 풀어주도록, 혹은 국왕의 법정으로 보내도록 국왕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문서-옮긴이)에 헌정하는 책을 썼다. 그 책의 저자는 정부를 시민의 주인이 아니라 하인으로 여기는 그 문서의 지속적 타당성이 미국적 자유의 기초라고 주장한다. 영어권 밖의 그 어느 지역에도 인신 보호 영장에 버금가는 유산이 없는 반면 영어권 국가의 사람들은 그것의 범위와 효과를 줄이려는 모든 시도에 거부감을 느낀다.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바로 이와 같은 차이에서 영국식 관습법을 통해 조성된 통치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독특한 관계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 독특한 관계는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의 이름으로 지지하는 것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나는 보수주의를 설명하고 옹호할 때 기본적으로 영어권 세계의 독자들을 염두에 둔다. 나는 관습법적 정의, 의회민주주의, 개인적 자선, 공공심, 자원봉사자 소집단 등을 시민사회의 기본적인 태도로 여기는 독자들, 하지만 근대 복지국가를 흡수하려고 애쓰는 초국가적 관료제뿐 아니라 근대 복지국가의 하향식 권력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독자들을 상정한다.
보수주의는 형이상학적 보수주의와 경험적 보수주의로 나뉜다. 전자는 신성한 것에 대한 믿음에, 그리고 신성모독을 막고 싶은 욕구에 자리하고 있다. 신성한 것에 대한 믿음은 모든 역사적 지점에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고, 앞으로도 항상 인간사에 막강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몇몇 장에서 나는 다시 형이상학적 보수주의로 시선을 돌릴 것이다. 그러나 그 앞의 여러 장에서는 실질적인 사안에 주목할 것이다. 경험적 징후로서 보수주의는 형이상학적 보수주의보다 더 분명하게 근대적인 현상이다. 즉 그것은 종교개혁과 계몽주의에 따른 폭넓은 변화에 대한 반작용이다.
앞으로 내가 옹호할 보수주의에 따르면 우리는 훌륭한 유산을 물려받았고 그것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서양 문명과 그 일부인 영어권을 물려받은 우리는 그 훌륭한 유산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뜻대로 살 수 있는 기회, 고충에 응답하고 피해를 보상하는 공정한 법의 확실성, 특정 이해당사자들 마음대로 점유하거나 파괴할 수 없는 공유 자산인 환경의 보호,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개방적이고 탐구적인 문화, 대표자를 선출하고 법을 통과시키는 민주적 절차 등이다. 앞서 언급한 유산을 비롯한 다른 여러 훌륭한 유산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지금 위협받고 있다. 그리고 보수주의는 그런 위협에 대한 합리적 반응이다. 그리고 그 반응에는 평범한 수준을 뛰어넘는 이해력이 요구될지 모른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새롭게 떠오르는 현실에 화답하는 유일한 반응이다. 이 책에서 나는 보수주의 이외의 사상을 수용하는 것이 왜 비합리적인 선택인지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말하고자 한다.
보수주의는 모든 성숙한 사람들이 선뜻 공감할 수 있는 생각, 즉 훌륭한 유산은 쉽사리 파괴되지만 쉽사리 창조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특히 우리에게 공동의 자산으로 주어지는 훌륭한 유산, 즉 평화, 자유, 법, 공손함, 공공심, 재산 및 가정생활의 보장 등에 적용되는 말이다. 이 모든 것을 누리려면 우리는 타인의 협조에 기댈 수밖에 없으며, 혼자 힘으로는 무엇 하나 누릴 수 없다. 훌륭한 유산을 파괴하는 작업은 빠르고 수월하고 신나지만, 창조하는 작업은 느리고 힘들고 지루하다. 이것은 20세기의 교훈 가운데 하나다. 아울러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이 여론에서 손해를 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은 진실하지만 따분하다. 한편 반대자들의 입장은 흥미롭지만 진실하지 않다. 수사적 측면에서 생기는 손해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은 한탄의 언어로 주장을 펼칠 때가 많다. 혁명의 문학이 우리가 이루어놓은 빈약한 세계를 휩쓸어버리듯이 한탄은 예레미야의 애가처럼 모든 것을 압도할 수 있다. 그리고 한탄은 때때로 필요하다. 프로이트Freud가 설명했듯이 한탄의 과정이 없을 경우 마음은 잃어버린 대상에서 그것을 대체하는 대상으로 넘어갈 수 없다. 하지만 보수주의를 위한 주장은 굳이 비탄의 어조를 띨 필요가 없다. 보수주의는 잃어버린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대상, 그리고 앞으로도 그것을 유지하는 방법과 관계 있는 사상이다. 내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나는 한탄을 삼가는 고별사로 이 책을 마무리할 것이다.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밥 그랜트Bob Grant, 알리차 게스친스카Alicja Gescinska, 샘 휴즈Sam Hughes 등의 비판적 논평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아내의 격려, 회의적 태도, 신랄한 문제 제기가 없었다면 아마 내 지론은 책에 담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그 결과물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바친다.
-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로저 스크러튼 저/박수철 역 | 더퀘스트(길벗)
정치 선진국 영국을 대표하는 보수 지식인의 책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는 유서 깊은 보수주의 철학을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경제, 외교, 환경, 교육, 문화 등 우리의 삶을 둘러싼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보수주의의 근본 철학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