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표기식
김영민 교수에게 한국은 “무관심해질 수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이 애증의 대상을 잘 들여다보겠다는 건 오래된 생각이었죠. 그러다 12.3 계엄 사태를 마주했습니다. “이 사태의 여진은 오래, 아주 오래갈 것”(13쪽)이라고 진단한 김영민 교수는 『한국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한국을 이해할 언어를 새롭게 발명”(15쪽)해 보자고 말합니다. 효율과 과로, 스펙터클과 강자 숭배를 잠시 멈추고 우선 순위를 재배치해 보자고 말합니다. 쉽진 않겠지요. 그렇지만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넓고, 깊게, 천천히 보아야 할 때
지극히 현재적으로 읽히는 책이에요. 지금 한국 사회가 중요한 도전 앞에 놓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 책의 역할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이 책으로 어떤 제안을 하고 싶으셨나요?
한국에 대한 책을 쓰겠다는 생각은 전부터 있었어요. 다만 시기가 늘 공백 상태에 있었는데요. 지난 12월 계엄 선포 이후에 책을 내야겠다 생각했죠. 책을 쓰면서 확실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우리가 겪는 이 사태를 미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이 사태를 넓고 깊게 바라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고요. 그러는 데 이 책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쨌든 책이 ‘탄핵이란 무엇인가’는 아니잖아요. 『한국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 안에는 우리가 겪는 더 큰 문제에 접근해 보자는 저의 기본적인 생각이 담겨 있어요.
사실 지금도 그렇지 않은 시도가 훨씬 많은 것 같아요. 헌법의 특정 조항을 지우면 된다거나 어떤 집단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얘기들 하는데요. 부분적으로 맞는 이야기지만 좀 더 넓고 크게 봐야 해요. 많은 일들을 겪었으니까요. 그것들을 천천히 들여다 보아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이 책의 배경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시기를 지나면서 숙의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 것 같아요. ‘나중에’라고 하지 말자, 충분하게 논의하자면서 굉장히 다양한 이슈들을 얘기했잖아요. 이 시기는 그런 욕구가 광장에 분출되는 때였다고 해도 좋을 것 같아요.
네, 정치인들도 그렇게 느껴야 할 텐데 말이에요. 자칫 선거를 어떻게 치를지, 하는 이슈에 다시 압도되기 좋은 시절이잖아요. 그러다 보면 몇 개월이 또 가버릴 거예요. 부디 사람들에게 이러한 소망이 있다는 것에 정치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면 좋겠어요.
생각해 보면 몇 년 전에는 탈조선이니 헬조선 같은 담론이 많았잖아요. 반면 최근에는 한국이 너무 싫지만 너무 좋아서 깨끗하게 빨아서 쓰고 싶다는 이야기들을 해요.
한국 사람들은 절대 나라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은 것 같아요. 말이 탈조선이지 나가봐야 반겨주는 데도 없고요.(웃음) 만화 『베르세르크』에도 ‘도망쳐서 도달한 곳에 낙원은 없다’는 얘기가 나오잖아요. 게다가 한국은 상당히 중독성이 높은 나라 같거든요. 외국에 체류하고 있는 분들도 보면 SNS 등을 통해 한국에 엄청난 관심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볼 때 한국은 일정 기간 살면 애증의 감정이 느껴지는, 중독되는 나라 같아요.
“성군이라니, 인간이 그토록 대단한 존재일 수 있는 것일까.”(75쪽)라는 문장이 시사하는 바가 컸어요. 한 사람에 기대는 정치가 아니라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주의에의 열망이 계엄 정국을 지나며 더욱 커졌다고 느끼는데요.
사실 한국은 민주주의를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취하고 실현한 나라죠. 그것이 우리의 긍지이기도 하고요. 그 점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해요. 그 자부심이라는 게 결국 선거일 텐데요. 선거라는 제도가 보장해 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것 같거든요. 선거라는 건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뽑는 거잖아요. 그 행위 자체는 민주적인 게 아니에요. 많은 사람을 대신할 ‘잘난’ 사람 한 명 뽑겠다는 아이디어에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생각과 충돌하는 지점이 있어요.
또 선거라는 것이 민주주의와 연결되어 생각하기 시작한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죠. 선거라는 것은 원래 상당히 귀족적인 측면이 있고요. 결국 우리가 왕을 뽑는 게 아니라는 것, 여러 사람이 손을 들어 군주를 뽑는 게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해요. 우리가 뽑는 사람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 권한을 위임시킬 사람이고요. 바로 이 점에서 ‘뽑는다’는 행위도 더 숙고가 필요한 거죠. 기본적으로 대의민주주의를 하는 상태에서 선거는 중요하고, 불가피하지만 그 자체로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보장한다고 보기 힘들어요. 갈 길이 멀죠.
선거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씀처럼 들려요.
정치학에 ‘어카운터빌리티(accountability)’라는 개념이 있어요. 무언가를 하기로 했으면 제대로 하는지 계속 점검을 받아야 해요. 그것을 요구할 권리도 우리에게는 있거든요. 결국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건 없고, 지속적으로 뭔가 하고 살아야 되는데요. 그 과정에서 실현되는 것이 민주주의이지 않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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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가 왔다는 무거운 경고들
“한국은 과로에 젖은 사회다.”(159쪽)라는 평가에 많이 공감했어요.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가 여기서 파생되지 않나 싶거든요. 빠른 정답과 결론을 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거고요. 그렇다면 숙고를 가능케 하는 지구력과 공동의 지성을 이끌어낼 체계적 과정을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합의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고민이 돼요.
한국은 근대화를 비롯한 여러 성취를 ‘빨리빨리’로 해결했어요. 차근차근 무엇을 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회죠.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예요. 한국에서 강조되는 건 대개 속도와 효율이에요. 물론 그건 불가피하지만, 저는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꼴을 하고 살려면 그래야 해요.
그러니 사회적으로 합의해야 할 것 중 하나는 생애 주기 가운데 그 시간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 라는 문제예요. 누구나 살면서 효율이나 속도, 성과 등으로부터 집중적으로 자유로워지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데요. 지금 한국은 생애 주기 어디에도 그 시간이 없는 식으로 사람들의 인생이 설계되는 것 같아요. 대학에 진학한 사람에 국한된 얘기지만, 과거에는 대학이 그런 역할을 했어요. 적어도 대학교를 졸업하면 높은 확률로 취직이 된다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대학에서의 4년 동안은 다양하게 모색해 보고 당장의 효율에 쫓기지 않는 뭔가를 시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었죠. 그러나 이제는 대학조차 입시학원과 비슷하게 되어가고 있잖아요. 저는 젊었을 때 그 시간을 갖는 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요. 그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봐요. 그러지 않으면 모두 괴물이 되거나 지쳐 빠진 상태로 굉장히 흉한 꼴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해요.
학교에 계시니까 더더욱 이런 생각을 많이 하시겠어요.
그럼요, 안타깝습니다. 그렇다고 학생들을 도덕적으로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할 때는 그게 합리적이거든요. 지금 여기서 놀다가는 인생을 망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게 합리적이도록 사회를 설계해야겠죠. 엉뚱한 데 예산 쏟지 말고 생애 주기를 재구성하는 데 투자가 됐으면 좋겠어요.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이야말로 사회적으로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장기적으로 보는 것이 정말 중요해요.
저는 한국 사회가 지금의 한계를 인식하고 변하지 않으면 계속 어딘가 부서지고 여러 가지 문제가 터져 나올 거라고 봐요. 지난 12월부터 우리가 겪은 이 모든 사태 또한 갑자기 겪게 된 돌출적인 사건으로 이해하지 말고, 한국의 근현대사의 시각에서 보길 바라고 있는데요. 일련의 일들이 한국 사회가 인간과 삶과 언어를 모두 학대해 온 결과로 나온 증상이라고 이해하면 우리 앞에 놓인 과제가 단순히 정권 교체에 그치지 않을 거예요. 거듭 강조하지만 전반적으로 한국을 재점검하고 모색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예요.
한국 사회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장면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아이를 안 낳죠. 인구가 줄고 있다는 건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예요. 기대되는 삶이라는 게 낙관적이지 않다는 의미거든요. 이곳에서의 삶이 비참해 보이는 거죠. 그것도 역시 도덕적으로 지탄할 문제는 아닌데요. 아이를 안 낳는 게 합리적으로 느껴지는 상황인 거니까요. 게다가 저출생 문제에도 단기적인 처방만 나오고 있어요. 어느 시에서는 젊은 남녀의 만남 행사 같은 것을 하잖아요. 사람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지, 싶은데요. 그게 아니라 아이를 낳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도록 해야 되지 않나요? 국민 소득이 얼마든 사회가 얼마나 선진국이든 세계에서 케이팝을 얼마나 좋아하든 지금과 같은 저출생은 이 사회가 문제가 있다는 의미예요. 인구가 막 늘어날 필요는 없겠지만 세계적으로 보아도 눈에 띄게 출생률이 낮으니까요. 이것을 사회의 한계가 왔다는 무거운 경고로 봐야 해요.
교수님은 한국인이 “정신적 허허벌판이 된 ‘선진국’”(174쪽)에 서 있다고 진단합니다. 어쩌면 정신적인 성숙이야말로 지금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일지 모르겠어요. 거리에서 민주화를 달성했다고 자동으로 주체적 시민이 되는 건 아니라고도 하셨는데요. ‘주체적인 개인’이 되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요?
확신을 버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각자가 품은 지나친 확신을 버리는 그때 생각이 시작되거든요. 정치적 판단을 비롯해 기본적으로 가진 여러 생각이 있는데요. 그에 대해 지나치게 확신하면 생각을 안 해요. 그래서 저는 덜 확신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저 자신의 생각을 ‘잠정적’으로 갖고 있으면 돼요. 반응과 판단은 다르거든요. 지금은 나라에 일종의 화재가 난 상황과 비슷한데 사회가 불타고 있을 때 ‘앗, 뜨거워!’ 하는 건 반응이에요. 한편 불타는 상황을 보는 건 판단이죠. 판단에는 반드시 생각의 과정이 필요하고요. 생각은 훈련해야 하는 거예요. 훈련을 통해서 선택지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 진짜 생각, 이것들이 가능해지는 거죠. 어떤 경우의 수가 있는지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 말이에요. 그래서 책이 중요해요. 다양한 독서를 통해 경우의 수를 많이 상상할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는 선택지를 비교도 할 수 있어요.
또, 공포에 질리지 않아야 생각이 가능한 것 같거든요. 공포에 질리면 바로 반응하는 데 골몰하게 돼요. 뒤집어 말하면,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면 공포에 덜 질릴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비록 긴 과정이긴 하겠지만 주체적인 개인이 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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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터클, 강자 숭배가 가리는 것
확신에서 자유롭고, 적은 선택지에 갇히지 않으려면 다양성에 열려 있는 분위기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이제 한국의 정체성을 생각하는 방식을 바꿀 때가 오고 있다.”(202쪽)고 하신 부분처럼, 이미 한국은 다문화, 다민족 국가라는 점을 받아들일 때가 됐어요. 관련해서, 더는 지체해선 안 될 사회적 합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가요?
따져 보면 한국은 옛날부터 단일 민족이 아니었어요. 막연한 신화처럼 사람들이 그걸 믿은 거죠. 최근에는 별로 안 믿는 것 같은데요. 일단 주변에서 아주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잖아요. 유사한 맥락에서 예전에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말을 자주 했고요. 통일이란 거의 사회적 합의에 가까운 것이었지만요. 지금은, 특히 세대가 젊을수록 통일의 필요성을 과거처럼 절대적으로 공감하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점점 한국을 한국으로 묶어주는 공통 분모가 사라지고 있는 거예요.
결국 하나의 아이디어가 중요할 것 같아요. 미국 같은 경우가 그렇죠. 다양한 이민자들이 모여 나라를 만들었고, 헌법 등 기본적인 자신을 자신으로 만드는 생각에 대해 고민하고 논의를 해왔거든요. 이것이 한국도 불가피하다고 봐요. 과거에 우리를 묶었던 신화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니까요.
최근 문형배 헌법재판관과의 인연으로 김장하 선생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시민사회의 영향력을 개인의 영달로 잇지 않은, 끝까지 공적인 역할을 지속한 이 같은 분이야말로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일 텐데요. 이 지점에 정치계의 아이러니가 있는 것 같아요. 일종의 하향 평준화가 일어나는 곳이라는 점에서, 이 공백을 시민들이 어떻게 줄여나갈 수 있을지 고민이 들어요. 정치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마땅히 해야 할 사람 사이의 공백 말이에요.
한국에는 스펙터클에 대한 선호, 강자에 대한 숭배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다큐 <어른 김장하>를 보면서 그분의 특징적인 삶의 태도가 ‘언더스테이트먼트(understatement)’라고 생각했어요. ‘삼가 말하기’라고 번역을 하면 어떨까 싶은데요. 스펙터클이나 승자 숭배는 과장하고 목청을 높이고 한자리를 차지하는 것들과 관계된 감성이거든요. 근데 그 모든 것과 거리를 두는 거죠, 그분은. 한자리를 안 할뿐더러 말도 조용히 하세요. 그 다큐에서 한 장학생이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한 점을 얘기했더니 그걸 바란 게 아니었다고 하시잖아요. 그런 태도 자체가 일종의 언더스테이트먼트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이 가치가 한국 사회에서 더 중시돼야 해요. 그러나 정말 어려운 과제죠.
예를 들어 시국 선언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어요. 만약 날마다 시국선언이 나온다면 아무도 거기에 귀를 안 기울이는 상황이 될 거예요. 물론 시국선언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상황이 더 문제지만요. 말을 잘 안 하던 사람이 발언을 할 때 더 힘이 실리고, 평소 느리게 움직이던 사람이 뛰면 더 눈에 띄잖아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누구나 확성기에 대고 얘기해요. 그것이 궁극적으로 시민사회를 약화시키는 데 기여할 가능성이 있거든요. 왜냐하면 다 힘 있는 자리에 가려고 하니까요. 그보다 어떻게 말할 것인지, 어떤 형식으로 전할 것인지, 확성기를 활용할 적시는 언제인지 같은 고민을 하기 위해서는 김장하 선생님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언더스테이트먼트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일단 레퍼런스가 너무 적어요. 세게, 크게 말해서 높은 자리로 가는 경우는 많이 보이거든요. 뉴스만 해도 그렇잖아요. 때문에 김장하 선생의 삶의 태도, 철학을 더 많이 보고 얘기하고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도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
맞아요, 중요한 레퍼런스가 생긴 거라고 생각해요.
조금 더 거창하게 얘기하면, 우리 각자 또한 자신의 자리에서 레퍼런스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것도 필요할 거고요.
예, 당연히 그렇습니다.
지금의 이야기와 관련해서, 교수님도 고민을 하시나요?
어쨌든 힘이라는 것이 반드시 크게 소리를 질렀을 때 생기는 게 아니라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크게 소리내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능히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순간’에 생기는 힘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아주 섬세한 이야기이긴 한데요. 화를 낼 수 있지만 안 낼 때, 소리를 지를 수 있지만 안 지를 때의 힘을 생각하죠. 한국 사회가 좀 길게, 찬찬히 뭔가를 구상한다면 그런 감수성이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고민해 봤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어쨌든 김장하 선생만 해도 본인이 지켜온 원칙, 도덕성을 결코 굽히지 않잖아요. 한자리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네가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을 야단치지 않아요. 길게 봐서는 거기에서 더 큰 힘이 나오는 거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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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태의 여진은 아주 오래 갈 것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할 것인가?”(65쪽)라는 질문을 지금 함께 해야 해요. 24년 12월 3일 이후 현재에 이른 우리가 망각에 저항해 반드시 기억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스펙터클은 노력하지 않아도 기억될 것 같아요. 언론에서 보도한 것들은 망각을 걱정 안 해도 될 텐데요. 저는 각자 개개인한테 스쳐 지나가는 경험이었지만 소중한 것들을 기억하는 게 관건이라고 봐요. 극히 미시적인 차원의 사건들 말이에요.
예를 들면 어떤 것일까요?
제가 빼빼로 사진을 찍어둔 게 있어요. 지난 12월에 시위를 나갔는데요. 아주 추웠던 기억이 나요. 마포에서 서강대교를 건너려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계속 만원버스가 지나갔어요. 그때 누군가가 빼빼로 과자를 주변 사람들한테 나눠주더라고요. 그런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어서 사진을 찍어뒀죠. 또, 결국 버스 타는 데 실패해서 택시를 불렀는데요. 워낙 사람이 많아서 택시가 안 왔어요. 그러다 운이 좋게 제가 잡았죠. 택시를 타려는데 제 뒤에 여성 두 분이 계셨거든요. 제가 원하시면 같이 타고 가도 된다고 말씀을 드렸고, 두 분 타셨어요. 함께 서강대교를 넘어갔는데 그 순간이 좋더라고요. 사실 평소라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잖아요. 그런데 함께 탔고, 라디오 뉴스를 들으면서 짧게나마 서강대교를 건너가는 그 시간이 굉장히 강렬하게 남았어요. 그걸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렇듯 많은 분들에게 그런 체험이 있을 것 같아요. 개개인들이 기억할 것들은 바로 이런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기억을 각자의 방식으로 남기는 게 중요해요. 집회에 몇 명이 모였는지, 숫자는 언론이 남길 거예요. 하지만 개개인이 겪었을 체험의 결 같은 건 싹 사라지고 그냥 숫자로만 남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 밑에 있는 여러 가지 체험들을 기억하자고 말하고 싶어요.
“존재만큼이나 부재도” 진실을 드러낸다면 한국 사회가 집단적으로 망각한, 그러나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이 꽤나 많을 것 같습니다. 노비에 대한 사회적 망각 이야기도 하셨는데요. 그밖에 또 생각해 보자고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일제 시대 때 우리나라에 신사가 많았는데요. 지금 한국에서 신사 보신 적 있으세요? 해방 이후 신사를 다 철거하고, 겨우 주춧돌 정도가 여기저기에 좀 남아 있는 정도인데요. 신사가 아직 한 군데 있어요. 바로 소록도예요. 굉장히 상징적이라고 생각되는데요. 흥미로운 일이죠. 그곳에 있는 신사만 그대로 뒀다는 점을 잘 생각하면 굉장히 여러 가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화 <그랜토리노>를 다룬 글은 이 사회의 ‘보수’가 어떻게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글이었는데요. 글의 마지막 문장이 “중병에 걸린 자신을 버림으로써 공동체를 재건할 수 있을까.”(278쪽)입니다. 이 문장을 쓰실 때 어떤 생각을 하셨어요?
상식적으로 보수와 진보가 서로 길항관계를 맺어야 사회가 발전한다고 얘기하는데요. 이때 진보적인 입장은, 현재를 부정해도 되는 입장이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있었던 걸 갈아 엎겠다고 얘기할 수 있어요. 반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문제는 있더라도 우리에게 남겨진 현재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죠. 그렇지만 지난 12월 이래 보수는 체제 전체를 거의 부정하는 수준의 막장을 보여준 셈이 됐어요. 보수로서는 본인을 옹호하기 어렵게 돼 버린 것이죠.
한국은 보수가 뿌리내리기 어려운 토양이긴 해요. 뭐든 오래 가꾸는 문화가 아니니까요. 빨리빨리 갈아치우는 분위기에서 보수적인 입장은 기본적으로 어려움이 있죠. 그렇다면 본인들이 어렵다는 걸 인식하고, 현명하게 과거의 것을 취사선택하면서 현재를 긍정하는 태도를 지켜야 할 텐데요. 한국의 보수는 그러지 못했죠. 현재의 보수는 거의 답이 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예요. 깔끔하게 인정할 것을 인정하는 것도 보수의 역량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고요. 인정하고, 저 자신을 버리는 노력을 통해서 재탄생이 가능한 거예요. 품위 있게 본인을 부정하는 행위는 언제나 사람들한테 공명을 줄 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품위는 굉장히 보수가 지키기 좋은 가치니까요.
교수님은 “이 사태의 여진은 오래, 아주 오래갈 것”(13쪽)이라고 보셨죠. 그렇다면 계엄 이후의 한국은 어떻게 변화할까요? 희망편과 절망편으로 말씀해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원래 예측을 거의 안 하는데요. 굳이 물어보셨으니까 생각을 해보면요. 희망편과 절망편으로 말하기 불가능하게, 애매한 고통을 굉장히 오래 받을 것 같아요. 완전히 포기하기에는 뭔가 남아 있고, 그렇다고 완전히 희망적이기에는 너무 부정적이거든요. 당분간은 애매한 연옥 상태를 지나게 될 것 같아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살아야겠죠. 그게 현실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신연선
읽고 씁니다.

표기식
사진 작가.
zziinanim
2025.04.22
taehoon80
2025.04.21
벽공
2025.04.19
계엄을 통해 한국사회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들을 톺아볼 수 있겠네요. 책 사서 읽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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