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를 할 때마다 무너질 것 같은 책장 앞에서 아내는 말한다.
“다 본 책, 좀 버려요.“
못들은 척 딴청을 피운다. 올 8월 새 집으로 이사할 때 잔소리는 정점을 찍었다. 버려라, 버려라, 먼지 풀풀 나는 책을 백지 같은 새 방에 놓고 싶지 않다며 노래를 불렀다.
“글 쓸 때 언제든 찾아봐야 해서 버릴 수 없어.”
궁색하지만 여전히 단호하게, 녹음 테이프 돌리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래도, 성의 표시는 해야 했기에 오래 된 잡지, 골프 책과 같은 취미 서적, 시절이 하수상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노망난 듯한 소설가의 책 정도를 현관 밖에 내놨다.
자료가 필요하면 구글신에게 물어보면 된다. 읽은 책을 들척이며 뭔가를 찾은 것은 일년에 한 두 번이나 되려나? 그러니까 책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책 욕심이다. 단출한 삶, 버리고 비우는 삶을 꿈꾸면서도 책은 늘 예외다.
책 욕심에 더해 책과 관련해서는 성격도 유난스러워진다.
있어야 할 곳에 그 책이 있지 않으면 불안하다. 책 찾느라 다른 일을 못한다. 처남이 집에 놀러 와서 말도 하지 않고 책 몇 권을 가지고 갔을 때 의절할 정도로 나는 책에 예민했다. 누군가 내 책장을 구경하면 책 빌려달라고 할 까봐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안절부절이다. 그러면서 남의 집을 가서는 가장 먼저 보는 것이 집주인의 책장이다. 그 사람의 취향을 관음하며 나와의 독서 취향이 비슷하면 더 정답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에 대한 새로운 호기심이 생긴다. 주인이 혹시 나처럼 불안해할까봐, 몰래 본다.
후배 P의 집들이 때 나는 왜 이런걸 찍고 있을까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한 것처럼, 책이 너무 좋아서 책 욕심이 나는 것 뿐이고, 책이 좋은 이유를 꼽으라면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은 다 동원할 수 있겠지만 나이 들면서 추가된 애호에의 이유는, 책이 내 우울에의 처방이 되더라는 것이다.
회사에 돈이 떨어지고 미래에의 불안감이 도질 때 나는 책 쇼핑을 한다. 내일이면 보고 싶은 책이 박스로 온다는 상상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소주 한 잔 마시고 집에 들어가 책장의 수북이 쌓인 책을 보면 부자 된 기분이다. 도서관과 서점에 가면 기분이 그렇게 좋다. 남들은 여행가면 책을 버리고 온다는 데, 나는 남들이 버리고 간 책도 줏어 담아 오며 득템한 듯 뱃 속으로 희희낙낙이다.
독서 습관도 책 욕심을 닮았다. 나는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을 읽는다. 소설을 읽고 있으면 사화과학 책이 궁금하고, 시집을 보고 있으면 경영서가 또 아쉽다. 그래서 내 침대 주변에는 늘 네댓 권의 책이 놓여있다. 지금 슬쩍 눈을 돌려 보니, 200쪽까지 읽은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130쪽까지 읽은 『구글의 미래』, 70쪽까지 진도가 나간 『전복과 반전의 순간』, 마무리가 얼마 남지 않은 『종의 기원』, 처음 몇 쪽을 넘긴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놓여 있다. 프로이드나 융이 이런 것을 분석의 재료로 삼는다면, 무슨 말을 할지 문득 궁금해진다. ‘새로운 것에 쉽게 질리는 성격’이라고 하려나, ‘과도한 지적 욕망의 표현’ 이라고 하려나, 아무렇게나, 그게 나다.
또 하나의 책 읽기 습성은 느리게, 그리고 메모하면서 읽는 것이다.
이는 『책은 도끼다』를 통해 박웅현이 반복해서 권유하는 독서법인데 나는 본의 아니게, 오래 전부터 천천히 읽고 많이 메모했다. 그것은 내 의도라기 보다는 글자를 따라가는 내 눈동자의 느림 탓이다. 내가 읽는 책에는 늘 연필과 메모지가 끼어져 있다. 복잡한 소설은 인물들의 관계도를 그리며 읽고, 감흥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한다.
독후감 쓰기는 이 과정에서 생긴 습관이다. 나는 글쓰기 강연을 할 때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청중들에게 책을 많이 읽으라는 권유와 함께 이 방법을 꼭 말해준다. 내 블로그에는 비밀 공간이 있다. 바로 독후감을 기록하는 공간이다. 나는 한 권의 책을 다 읽으면 게시판을 열고 책의 내용을 정리한다. 밑줄 그은 문장을 필사한다. 메모해둔 낙서를 옮겨 적는다. 그 작업이 끝나야 나는 비로소 한 권의 책을 다 마무리 했다는 마음이 생긴다. 나보다 두 배는 빨리 책을 읽고, 열 배는 빨리 자신이 읽은 책의 내용을 잊어버리는 내 아내는, 나의 책 읽기 방식을 유난스러운 의식이라며 힐난한다. 아무렇게나, 역시 그게 나다.
올해 <채널예스>에서 ‘노안 이후 보이는 문장’ 칼럼을 시작했다. 줄여서 ‘노비문장’. 나이가 들면서 더 오래 시선이 머물게 되는 문장을 통해, 나는 어떻게 늙을 것인가의 태도를 말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는 책과 관련된 칼럼을 쓰고 싶었고, 결과적으로 소원 성취했다. 2주에 한번씩 돌아오는 마감이었지만, 선정한 책을 다 읽기 전에는 절대 칼럼을 쓰지 않겠다는 나의 다짐으로 인해, 가뜩이나 느리게,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사람으로서 제한된 기간 안에 책을 읽는 것이 글을 쓰는 것보다 더 버거웠다. 그러나 갑과 치르는 가부키 연극 같은 하루의 회사 업무를 마감하고 칼럼으로 쓸 책을 읽기 위해 총총총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경쾌하고 설렜다. 평론가 김현은, “가능성 있는 글을 읽는 밤은 즐겁고, 즐겁다”고 말했으나, 나는 적막한 밤에 유혹의 책 속으로 자청한 유배를 떠나는 그 시간이 너무나 행복하고, 행복했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더 나이가 들더라도 책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싶지 않다고.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좋아하는 술도, 친구도, 여행도 심드렁해지고 있음에도, 책에 대한 욕심은 줄어들지 않는 것이 더 반가운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노비 문장을 통해 우아하게 늙는 방법을 말해왔지만, 실제 나는 늙어 죽기 딱 일주일 전까지, 책을 들 수 있을 정도의 힘과, 책을 볼 수 있을 정도의 시력과, 책을 보고 두근거릴 수 있는 감성만 가질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노라 생각했다.
한 해가 간다.
책장을 둘러보니, 사 놓고 한 페이지도 읽지 않은 책들이 꽤 많이 보인다. 저걸 언제 다 읽나 하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아껴 먹느라 남겨둔 맛있는 음식을 대하는 마음으로 그것들을 본다. 저 안에 어떤 사랑과 기쁨과 슬픔과 사건과 유익함이 들어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부푼다. 서재의 빈 공간에는 또 어떤 책이 자리잡을까를 상상하는 것은, 출입문을 열고 곧 나에게 다가올 애인을 기다라는 것처럼 기대되는 일이다. 시계를 보면 우울하게 엄습하는 새해가, 책장을 향해서는 이토록 씩씩하게 다가온다.
새해에도 우리는 책을 사이에 두고, 맹렬히 교감하기를, 책과의 연애가 나날이 달달하기를, 그리고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윤용인(<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저자, 노매드 대표이사)
<딴지일보> 편집장을 거쳐 현재 노매드 힐링트래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심리에세이 《어른의 발견》,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사장의 본심》, 《남편의 본심》, 여행서 <<시가 있는 여행> <발리> 등의 책을 썼다. 또한 주요 매체들에 ‘윤용인의 심리 사우나’, ‘아저씨 가라사대’, ‘남편들의 이구동성’ 등 주로 중년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럼을 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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