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을 오래 취재하다 보니 재밌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때로는 초연보다 재연의 부담이 큰 것처럼 인터뷰 역시 첫 번째 만남보다 두 번째 만남이 더 긴장된다는 겁니다. 대화를 나눈 시간은 똑같지만, 기자는 인터뷰 뒤에도 녹음한 내용을 다시 듣고 기사를 쓰면서 인터뷰이에 대한 나름의 이미지가 좀 더 깊게 형성되죠. 또 그들이 출연하는 공연을 보면서 객관적인, 또는 주관적인 정보가 누적되다 보니 두 번째 인터뷰 길에는 상대를 조금은 알고 있다는 반가움과 오랜만이라는 설렘이 생깁니다. 특히 데뷔 즈음에 만났던 인터뷰이를 오랜만에 다시 만난다면 감정은 훨씬 복잡해집니다. 기자는 쭉 지켜봤으니까요.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은 무려 10년 만에 다시 만나는 겁니다.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당시에는 ‘주목받는 배우’였는데 언젠가부터 ‘주역’만 꿰차고 있는 배우입니다. 뮤지컬 <나폴레옹>에서도 타이틀 롤을 맡은 배우 한지상 씨 얘기인데요. 폭우가 쏟아지는 한낮, 한남동의 한 카페에서 한지상 씨를 직접 만나봤습니다.
“연습기간이 참 힘들었어요. 라이선스 작품인데도 처음에는 뼈대에 불과했거든요. 그 사이를 채우기 위해, 개연성과 캐릭터를 위해 배우들이 반은 창작을 하지 않았나. 이 작품 사랑하려고 엄청 노력했어요(웃음).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됐죠. 지금도 다들 고삐를 늦추지 않고 열심히 달리고 있고요.”
일단은 성토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지난 7월 국내 초연된 뮤지컬 <나폴레옹>. 나폴레옹이라는 매력적인 인물, 화려한 무대세트와 의상, 웅장한 음악에도 불구하고 개연성이 부족한 극의 전개로 배우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거든요. 극도 극이지만, 영웅이면서 동시에 폭군이라는 평을 받는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부담도 컸을 테고요.
“나폴레옹은 정말 매력적인 인물이죠. 수많은 면모를 갖고 있잖아요. 핵심은 밑바닥 출신이 황제가 되는 여정이에요. 하급 인물이 어떻게 황제가 돼 가는지, 힘을 갖게 되면서 이 사람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어떻게 파멸을 맞는지. 1막이 성공을 위해 달리는 나폴레옹이라면 2막에서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카리스마 넘치고, 진보적인 면도 있고, 한편으로는 한 여자만을 사랑할 정도로 순수하지만 그 사랑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거기에 처음과 끝이 맞닿아 있는 것처럼 마지막에는 빈털터리로 돌아가는 허무함. 너무 인간적인 것 같아요.”
뮤지컬 <나폴레옹>에서는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사랑이 극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데요. 한지상 씨가 생각하는 정선아, 박혜나, 홍서영 조세핀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영상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죠!
나폴레옹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하셨어요?
“일단 불가능이 없는 모습을 극대화하고 싶었어요. 그런 모습 있잖아요. 어디에 내놓아도 살아남으려는, 어떤 상황이든 이겨내고 극복할 것 같은 의지,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엄청난 집착, 야망, 근거 없는 자신감... 저한테도 비슷한 면이 있거든요. 원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 심해서 진짜 하고 싶은 건 나폴레옹처럼 끝까지 가는 깡이 있어요.”
그러고 보면 최근작들만 봐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유다, <프랑켄슈타인>의 앙리 뒤프레, <데스노트>의 라이토, 그리고 나폴레옹까지 캐릭터가 강하기도 하지만 다 반전이 있는 인물이네요. 이제 작품이나 캐릭터를 선택하실 텐데, 이런 복합적인 캐릭터를 선호하는 건가요(웃음)?
“선택이라는 행위를 조금이나마 하게 된 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어요(웃음). 저는 조연도 오래 했고, 정말 한 계단 한 계단 걸어왔거든요. 그런데 여러 자아와 만나는 인물의 상태와 상황에 관심이 많긴 해요. 그래서 제가 했던 캐릭터를 다 좋아해요. 사람 안에 많은 자아가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면 저처럼 내성적이고 평범한 사람은 절대로 배우를 할 수 없었을 거예요. 내가 또 다른 나를 발견했을 때의 느낌, 그 느낌이 정말 감사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의리를 계속 지키고 싶어요.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좀 복합적인 캐릭터를 맡나 봐요.”
실제 성격이 그렇게 복합적이지는 않죠(웃음)?
“누구랑 있느냐에 따라 좀 달라요, 낯을 가리는 편이라서. 어떤 시점이냐, 누구와 시간과 공간을 나누느냐에 따라 다르죠. 친한 사람한테는 편하고 만만하고 쉬운 사람이에요. 평소에 친한 사람들 말도 잘 듣고(웃음). 다만 원하는 것이 있고 필요한 상황에서는 고집을 피우죠.”
조연 얘기를 잠깐 하셨는데, 제가 10년 전에 뮤지컬 <밴디트> 때 한지상 씨를 처음 만났거든요. 당시에는 ‘주목받는 배우’라고 기사를 썼던 기억이 나는데, 언젠가부터 당당히 주역만 꿰차고 계시잖아요. 전환점이 된 작품, 캐릭터가 있겠죠?
“배우라면 자신의 장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을 만날 때가 있죠. 작품과 캐릭터, 배우의 궁합이 잘 맞아 떨어지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운도 필요하거든요. 저는 아무래도 유다가 아니었을까. <넥스트 투 노멀>, <프랑켄슈타인> 등 탄탄한 이야기와 주옥같은 노래가 있는 작품에서 저에게 잘 맞는 캐릭터를 만나서 감사하죠. 물론 그 운을 잡기까지는 스스로 험난한 싸움이 있는 긴 여정이 있었어요.”
예전에도 노래는 잘 부르셨지만, 유다부터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노래를 너무 잘 하니까 얄미울 정도더라고요(웃음). 어떤 노력이 있었을까요?
“성대를 단련한 건 있죠. 따로 레슨을 받지는 않았지만, 혼자 연구하고 개발을 많이 했어요. 나폴레옹 같은 집착으로(웃음). 사실 대학 때만 해도 뮤지컬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데뷔하는 차원에서 2005년 <그리스>에 참여했어요. 그런데 뮤지컬은 일단 노래 오디션에서 합격해야 연기를 보일 수 있더라고요. 그리고 2007년에 <스위니토드> 초연을 하게 됐는데, 그때 가왕들이 즐비했어요. 저와 더블이 (홍)광호, 그리고 (류)정한이 형, (양)준모 형, (임)태경이 형, 박완 형은 팝페라 가수예요. 제가 어땠겠어요. 노래 실력을 키워야겠더라고요. 그래서 도둑질 많이 했죠(웃음). 광호는 어떻게 하나, 다른 배우들은 어떻게 하나. 이것저것 훔치고 섞어서 저에게 맞게 만들어가다 유다까지 간 거예요. 물론 뮤지컬을 하면 음악감독이라는 존재를 만나니까 도움을 받기도 하고요. 그런데 솔직히 지금은 예전처럼 노래가 되지는 않아요. 사람은 관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부분에서 성장하게 되잖아요. 지금은 배우라는 큰 틀의 꿈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노래보다는 작품과 인물에 맞는 톤과 창법을 찾는 데, 내 안의 어떤 나를 끄집어내느냐를 고민하는 데 더 공을 들이죠.”
이제 가창력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도달한 면도 있죠. 무대는 <데스노트> 이후 오랜만이잖아요. 드라마에 이어 영화 <마차 타고 고래고래> 등 말씀하신 것처럼 배우라는 큰 틀의 꿈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계신데, 그럼에도 무대를 다시 찾게 되는 이유는 뭘까요?
“무대는 중간에 시동을 끄지 않는다는 거죠. 카메라 예술과 달리 인터미션 빼고는 3시간 동안 시동을 끄지 않고, 그 안에서는 편집도 저희가 해요. 라이브, 그야말로 배우예술이잖아요. 사실 방송이나 영화는 메커니즘이 너무 다르니까 각오를 했는데도 충격이 컸어요. 그런데 돌아보면 ‘편해졌다, 즐기고 놀 수 있다’는 점에서 뮤지컬은 이들 매체보다 시간이 더 걸렸던 것 같아요. 지금이라도 제가 원하는 작품이고 제 장점을 좀 더 드러낼 수 있는 캐릭터라면 오디션을 보고 싶어요. 떨어지더라도 오디션에 참여할 각오가 돼 있습니다.”
10년 뒤에 다시 만난다면 그때 한지상 씨는 어떤 배우일까요?
“저는 다양성, 인간의 긴 여정에 관심이 많아요. 사람은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지만, 한번 변하면 무섭거든요. 그래서 가장 무서운 것도 나인 것 같아요. 나를 이기는 게 가장 큰 숙제가 아닐까. 전 아직 어리다고 생각해요. 10년 뒤에도 저 자신과 싸우고 있는 철들지 않는 배우였으면 좋겠네요.”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테이블 너머의 한지상 씨가 정말이지 조금 어려 보였습니다. 무대 위에서는 무척이나 커 보이고, 비현실적이고, 무엇보다 참 특이한 캐릭터들만 연기했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10년 전 인터뷰를 어색해하던 신인 시절의 모습이 살짝 엿보였다고 할까요. 한 걸음 한 걸음 배우로서 치열하게 달려온 시간이 느껴져 왠지 뿌듯하기도 하고, 앞으로의 10년이 궁금하기도 하고요. 이 역시 공연을 오래 취재하면서 발견하는 또 다른 재미죠. 뮤지컬 <나폴레옹>은 샤롯데씨어터에서 10월 22일까지 공연됩니다. 한지상 씨를 비롯해 배우들의 힘으로 한결 매끄러워진 무대를 직접 확인해 보시죠!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