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도 많고, 주요 캐릭터는 대부분 더블, 트리플 캐스팅이다 보니 기자들은 보통 인터뷰가 예정된 배우의 무대를 관람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찾아간 수많은 공연장에서 뜻하지 않게 자주 보게 된 배우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지난 2년여 간 이 배우의 무대를 가장 많이 봤지 뭡니까. 그래서 호시탐탐 인터뷰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꺼리’를 만들어 주는군요. 공연 기간도 거의 겹치는 뮤지컬 <팬레터>와 <에드거 앨런 포>에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캐릭터로 이름을 올린 겁니다. 이 정도면 누군지 알겠죠? 바로 배우 김수용 씨 얘기인데요.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팬레터> 연습을 끝낸 김수용 씨를 직접 만나봤습니다.
“생각하니까 걱정이 돼서 열이 오르네요(웃음). 사실 두세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에요. <나폴레옹> 말미에 결정된 건데, 두 작품 다 처음인 데다 동시에 연습하고 동시에 무대에 올라야 하는 험난한 길이 열렸죠.”
그러게요, 보통 두 작품을 하더라도 조금은 간격을 두고 참여하게 되는데 공연 기간 자체가 거의 같더라고요. <나폴레옹>이 끝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이게 가능한가요(웃음)?
“막공 날짜가 같아서 뒤풀이도 양쪽으로 다녀야 해요(웃음). 연습도 월수금은 <팬레터>, 화목토는 <에드거 앨런 포>를 하고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결정된 뒤에 대본을 좀 일찍 달라고 요청했는데 헛짓이더라고요. 대본이 계속 수정돼요(웃음).”
이른바 ‘겹치기’를 잘 안하는 편이잖아요?
“저는 <나폴레옹>과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같이 하기 전까지는 두 작품을 동시에 해본 적이 없어요. 그나마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초연 때 원캐스트로 했기 때문에 몸이 기억하고 있어서 참여할 수 있었던 거죠. <팬레터>는 트라이아웃 전 리딩 때부터 얘기가 있던 작품인데, 매번 다른 공연이 있어서 함께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번에도 함께 하자고. 그만큼 저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얘기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뭐라고’ 하는 생각에 욕심을 냈죠. 그때까지는 <에드거 앨런 포>에서 그리스월드 역이라서 두 작품을 함께 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고요. 그런데 제작사에서 제가 넘버를 ‘원키’로 부른 모습을 보고 그냥 포를 하자고(웃음).”
김수용 씨가 노래를 잘 하는 건 알았지만, 포로 캐스팅된 걸 보고 ‘저분이 노래를 그렇게 잘했나?’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더라고요(웃음). 포는 뮤지컬배우라고 모두 도전할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잖아요. 워낙 음역대가 고음이라서.
“이 얘기를 제 입으로 하기는 좀 그렇지만, 자랑 좀 하자면(웃음) 선배님들이 노래할 때 힘든 척 좀 하라고 해요. 제가 노래를 편하게 부르니까 쉬운 노래라고 생각하거든요. 실제 불러보면 그렇지 않은데.”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김태원, <페스트>의 코타르, <광염소나타>의 K, <나폴레옹>의 탈레랑 등으로 다양한 무대에서 뵐 수 있어 좋긴 했지만, 대부분 좀 포악하고 센 캐릭터만 맡아 와서 아쉬운 면도 있었는데, 이번에 두 작품을 통해 전혀 다른 인물로 무대에 서네요?
“거슬러 올라가면 2014년 <모차르트!>에서 콜로레도 주교를 맡을 때부터였는데, 그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저에게 악당 역할을 주지 않았어요. 그전에는 진중하거나 시니컬한, 또는 스윗한 캐릭터였죠. 그러고 보면 캐릭터도 사이클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캐릭터 안의 방향성은 다 달라서 매력적이고 재밌고요. <팬레터>나 <에드거 앨런 포>에서는 지금까지의 캐릭터와는 판이하게 다른 역할이라 욕심이 나기도 했어요.”
포악하게 내지르던 그간의 캐릭터, 그리고 고음의 포까지, 많은 사람들이 김수용 씨의 튼실한 성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만의 관리 비법은 영상으로 확인해 보시죠!
<에드거 앨런 포>가 가창력에 좀 더 집중된다면 <팬레터>는 김해진이라는 굉장히 복합적인 캐릭터를 표현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초연 때부터 반응이 좋아서 부담도 될 테고요.
“초연 때부터 참여했던 배우들한테는 아직 못 미치죠. 김해진은 김유정이라는 실존 작가가 모티브잖아요. 김유정이 괴짜였다고 하는데, 대본에서는 그런 면보다는 폐병 환자, 천재적이지만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사랑에 빠진 순애보를 담았더라고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정신 상태는 범인이 범접할 수 없는, 확실한 그만의 세계가 있는 것이라서 그 세계를, 사랑에 빠져 있는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까, 또 그 세계가 무너졌을 때 거기서 느끼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를 표현하기가 어려워요. 서브 텍스트가 너무나 많아서 어렵지만, 그걸 잘 파헤쳐서 보여줬을 때 또 다른 해진이 되지 않을까.”
시대도 국적도 캐릭터도 전혀 다른 두 인물을 동시에 연기해야 하다니...
“하지만 두 사람 다 문인이죠! 그리고 스스로 천재성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고요. 대본을 읽고 처음에는 김해진이 약간 반듯한 사람이려니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제정신은 아닌 거예요(웃음). 히카루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면서 혼자 여자라고 생각하고 좋아하는 거잖아요. 포도 캐릭터가 복합적인 인물이라서 욕심났거든요. 그래서 양쪽 연습이 재밌어요. 격일제로 연습하는 것도 잘했다 싶은 게 그때그때 새로운 걸 얻으면서 공유하게 되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김수용 씨처럼 대극장과 소극장을 오가며 공연하는 배우도 드뭅니다. 대극장 공연을 주로 하게 되면 대학로에서 만나기 힘든데, 나름의 소신이 있는 건가요?
“주변에서도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저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건데(웃음). 저는 ‘믿음’이 중요해요. 연출이나 제작진이 나를 믿는다고 하면 배우 입장에서는 안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밖에도 작품을 선택하는 여러 기준이 있는데, 이 작품이 정말 재밌다거나 아주 잘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어도 캐릭터가 정말 재밌을 때, 정말 유명하고 좋은 작품. 또 사람들과의 의리,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을 때, 물론 직업이니까 페이가 높을 때 등 여러 면에서 한두 가지가 맞으면 참여해요. 연기하는 게 재밌잖아요.”
오래 연기하셨는데, 아직도 그렇게 재밌나요(웃음)?
“네! 어렸을 때는 연기가 재밌는 줄 몰랐죠. 연기가 재미있다는 걸 안 지는 오래 안 된 것 같아요, 연기해온 시간에 비하면. 배우는 시간이 약이 되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도 하거든요. 좋은 측면에서는 경험이 자산이 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밝게 빛날 수 있는 시기가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더 소중하고 확신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후회하기 싫어서.”
참여했던 작품이나 아직 참여하지 않은 작품 중에 탐나는 캐릭터가 있나요?
“<가위손>이 뮤지컬로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에드워드를 정말 해보고 싶어요. <모차르트!>에서 콜로레도할 때는 모차르트가 하고 싶었고, 내년에 <노트르담 드 파리> 한국어버전 10주년이라는데 그랭구와르는 다시 하고 싶죠. 오디션 필요 없이 바로 데려다 쓰면 되는데(웃음).”
내년 2월 4일 <팬레터>와 <에드거 앨런 포>가 끝나면 뭘 하고 싶나요?
“쉬어야죠, 집에서 자고 싶어요. TV 켜놓고 과자 먹고, 고양이랑도 놀고(웃음).”
마지막으로 그렇게 쉬어본 게 언제인데요?
“글쎄요, 기억이 안 나요. 매번 작품 끝날 때마다 쉰다고 했는데 꼭 다른 공연이 잡히더라고요. 이제 동료들이 안 믿어요(웃음).”
김수용 씨는 뮤지컬 <햄릿> 이후 6년 만에 인터뷰로 만나는 건데, 당시에도 열정적이고 자신감 넘쳤지만, 지금은 배우로서 어떤 안정감까지 느껴졌습니다. 김수용 씨는 연습 중이라 캐릭터를 찾아가는 과정에 푹 빠져 있고, 그래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목표가 명확해서 다른 것들이 들어올 틈이 없어서라고 했는데요. 그렇게 줄곧 몇 년을 살아왔으니 배우로서 좀 더 확고한 모습이 비치는 건 당연한 거겠죠? 뮤지컬 <팬레터>와 <에드거 앨런 포>는 각각 11월 10일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11월 17일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개막합니다. 초연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일 두 무대에서 김수용 씨의 새로운 변신을 직접 확인해 보시죠. 두 작품이 끝난 뒤 그의 행보도요!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