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 특급 살인>, 열차는 세기의 살인 사건을 싣고
마침내 ‘범인은 바로 너!’ 외쳤으면 좋았겠으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그렇게 예상한 바대로 흘러가는 전형적인 추리물과는 다른 게 특징이다.
글ㆍ사진 허남웅(영화평론가)
2017.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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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엔트 특급 살인> 한 장면

 

* 원작 소설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정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리소설의 여왕’ 아가사 크리스티가 스스로 가장 애정하는 작품이란다. 대중적으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둔 소설이다. 이걸 영화화한다? 게다가 이미 여러 차례 스크린으로 소개된 적 있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다시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니? 이게 끝이 아니다. 아무리 원작을 영화에 맞게 새롭게 각색한다고 해도 살인자의 정체와 연관된 이 소설의 특수한 배경을 바꾼다는 건 ‘미션 임파서블’에 가깝다. 나 같으면 안 하고 말아, 포기했을 텐데 이 불가능에 도전한 연출자와 각본가가 있다. 각각 케네스 브레너와 마이클 그린이다.

 

케네스 브레너는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2002)의 질데로이 록허트 교수와 올해 엄청난 평가를 받았던 <덩케르크>의 영국군 볼튼 사령관을 연기한 배우로 유명하다. 그보다 연출가로 더 뛰어나다. 첫 장편 연출작 <헨리 5세>(1992)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고 <토르: 천둥의 신>(2011)을 연출한 적도 있다. 그에 비교해 마이클 그린은 다소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그는 올 초 개봉한 <로건>(2017)의 각본가로 현재 상한가를 치고 있다. 영원히 천하무적일 것 같던 슈퍼히어로에 거스를 수 없는 세월의 핸디캡을 부여, 현실의 결을 추가했던 그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도 현대의 관객에게 곱씹을 만한 생각거리를 던져 놓는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이야기는 개괄적으로 원작을 그대로 따른다. 에르큘 포와로(케네스 브레너)는 영국에서 급하다는 사건 의뢰를 받고 런던행 열차를 물색한다. 다행히 오리엔트 특급 열차의 회사 책임자 배려로 좌석을 얻은 포와로는 가는 동안만이라도 휴식을 취하려고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포와로가 사건을 몰고 다니는 건지, 아니면 백만 분의 일 확률의 우연인 건지 갑자기 눈사태가 벌어져 열차가 멈춰 서고 그 틈에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용의자는 모두 13명.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이 안에 살인자가 있다!” 자신하는 포와로는 열차의 인물들을 상대로 한 명 한 명 면담에 나선다.

 

마침내 ‘범인은 바로 너!’ 외쳤으면 좋았겠으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그렇게 예상한 바대로 흘러가는 전형적인 추리물과는 다른 게 특징이다. 모두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용의자들이기도 한 설정은 원작의 초판이 1934년에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도 독창적이면서 또한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런 사건을 해결하는 포와로는 그래서 위대한 탐정의 지위에 오른 것일 테고. 아무튼, 단서는, 무엇보다 케네스 브레너와 마이클 그린이 이 사건에서 주목하는 몇 가지 복선은 13명의 용의자와 숨진 사업가 라쳇(조니 뎁)의 손목시계가 멈춰진 시간 새벽 1시 15분이다.

 

결정적으로 또 하나, 탑승자들과의 면담을 마치고 어느 정도 추리를 끝낸 포와로가 이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을 때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잡는 특정 구도다. 13명의 탑승자가 테이블 뒤에  일렬로 늘어서 정면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벽화 <최후의 만찬>의 인용이다. 종교적 메타포의 함의가 짙은 이 장면에서 이성과 과학을 대표하는 특급 탐정 포와로가 13명의 용의자와 척을 지고 대결 구도를 형성한다. 어떻게? 이성 대 감성, 과학 대 종교의 갈등 양상으로 말이다.

 

이 지점이 바로 케네스 브레너와 마이클 그린이 원작을 영화로 옮기면서 부여한 현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연출의 핵심은 이 대결 구도가 누가 옳은지 그른지 선악의 개념을 따져 묻는 성격이 아니라는 데 있다. 스포일러(라고 하기 민망할 만큼 추리소설의 팬이라면 다들 알고 있는 사실 하나)를 밝히자면, 숨진 라쳇은 이 사건에서 법적으로는 피해자이지만, 도덕적으로 결코 가해자보다 우위에 있는 인물이 아니다. 이는 사실 가치 평가의 문제인데 개개의 의견이 중요하고 고도로 조직화한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이렇게 진실 여부를 분류하듯 판단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아니 수도 없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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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엔트 특급 살인> 한 장면

 

이해관계는 영원 불변보다는 헤쳐 모여의 개념에 가깝다. 상황에 맞춰 자기 뜻을 정하고 그에 동의하는 사람들과 모여 이해 집단으로 활동하는 것. 이럴 때 작동하는 건 이성과 과학보다는 감성과 종교적 믿음이다. 이성과 과학을 신봉하는 것처럼 보이는 포와로만 해도 아침으로 먹는 두 개의 달걀 크기가 같아야 직성이 풀리고 콧수염의 양쪽 길이가 일치하게 관리하는 등 균형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는 면에서 일종의 종교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영화 초반 “옳고 그름에는 분명한 구분이 존재하며 그 중간은 없다”고 단언했던 포와로는 라쳇 살인 사건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나서는 연루된 가해자, 즉 <최후의 만찬> 구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요지의 얘기를 한다. '선하거나, 악하거나 둘 중 하나인 사람은 없다. 그 중간이 있을 뿐이다.’

 

포와로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서 식사하던 중 라쳇의 요구로 그와 대면한다. 살해 협박을 받고 있다며 신변 보호를 요청하는 라쳇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시한 포와로는 읽고 있던 책을 가지고 자리를 뜬다. 그 책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다. 『두 도시 이야기』는 18세기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를 오가며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이 되었던 배경을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삼는다. 특히 이 소설의 유명한 첫 문장은 이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이해하는 일종의 지름길 역할이다.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시대였고, 불신의 세기였다.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 천국으로 가고 있었고, 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이성과 과학과 감성과 종교적 믿음은 구분되지 않고 난맥처럼 연결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기도, 방해되기도 한다. 그럴 때 선택은 수용자의 몫이다. 하찮은 인간일지라도 죽음으로 정당화돼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기도 한 포와로 역시 자신이 마주한 사건의 전모와 범인(들)의 정체 앞에서 선뜻 가해자를 공개적으로 고발하기 망설여진다.

 

아직 언급하지 않은 하나가 더 있다. 죽은 라쳇의 손목시계의 초침과 분침이 가르치는 새벽 1시 15분. 종교의 메타포 측면에서 1시 15분은 1:15, 즉 성경의 1장 15절이 아닐까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야고보서 1장 13절부터 15절까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라쳇의 욕심이 키운 죄에 대한 복수라는 대가로 죽음에 이른 결말. 당신이 포와로라면 고발할 것이냐, 말 것이냐,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두 도시 이야기찰스 디킨스 저 | 창비
작품은 프랑스 혁명기의 복잡한 정경을 화려하고 능숙하게 그려내지만, 실은 위기에 직면한 개인이 겪는 선택의 문제, 타인에 대한 연민과 자기희생, 인간의 악덕과 미덕이라는 흔하고도 진부한 주제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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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아가사 크리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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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