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여 년 동안 프리랜서로 활동해왔다. 언제나 혼자서 일을 한다. 혼자서 방송에 나가고 글을 쓰고 강의를 한다. 그런데 이 일은 무척 변덕스럽다. 잘나갈 때는 그래도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일을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잊힌 외톨이가 되기 십상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정치적으로 배제되는 인물이 되어 방송 일이 거의 끊겼을 때, 내가 이렇게 사라져가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것 같은 시절이었다. 그 무렵 혼자 독서실 구석에 처박혀서 니체를 읽었다.
그때 위로가 되었던 것은 누구보다 고독했던 니체로부터 발견한 강한 힘과 용기였다. 니체는 살아가는 데 고독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고독함으로써 가장 깨어 있고 충만한 정신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가장 고독했을 시간에 그는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책을 펴냈다. 외롭다는 것은 생각만큼 나쁜 것이 아니다. 외로운 사람이 약한 것은 더욱 아니다. 니체는 내가 가장 외로웠을 때 시공을 초월하여 함께했던 둘도 없는 동지였다.
하지만 니체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도시를 떠나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나의 제자들이여, 이제 나 홀로 나의 길을 가련다. 너희들도 이제 한 사람 한 사람 제 갈 길을 가라! 내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진실로 너희들에게 권하거니와 나를 떠나라.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에 저항하여 스스로를 지켜라. 더 바람직한 일은 차라투스트라의 존재를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그가 너희들을 속였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믿지도 말고 숭배하지도 말라고 했다. 자기와 상관없이 각자의 길을 가라고 말했다.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제자들에게 했던 그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내가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길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의존하여 다른 사람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나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자기의 얼굴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어떤 것도 자기의 모습과 다르게 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는다”라고 했던 니체의 삶이 그런 것이었을 게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 그리고 세상은 언제 달라질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만큼 오래 가는 것은 없다. 니체는 혼자 힘으로 살아가라고 거듭해서 말한다.
"어느 누구도 네게 삶의 강을 건너게 해줄 다리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오로지 너 혼자만이 그럴 수 있다. (『반시대적 고찰 Ⅲ』)"
니체는 나의 동지였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운명은 쉽사리 행복을 내주지 않는다. 살다 보면 기쁨보다는 걱정과 어려움이 많다. 그러니 낙담하기 쉬운 것이 우리네 삶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또한 살아오면서 여러 번 어렵고 힘든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어려움이 닥쳤을 때 내 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 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삶의 벼랑 끝에서 더는 물러날 수 없다는 절박감은 삶에 대한 긴장을 한껏 끌어올렸고, 내가 직면한 상황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각오와 함께 새 길을 열어갈 의지가 솟구쳤다. 시시포스가 형벌의 고통 속에서도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려는 순간에 의식이 깨어나듯이, 자신의 고통과 마주 보고 앞길을 개척하는 시간은 의식이 깨어나는, 그래서 운명을 이겨버리는 순간이다.
시련은 우리를 단련시켜 더 강하게 만들어준다. 창백한 얼굴의 연약했던 한 인간은 삶의 시련을 거치며 운명의 무게 속에서도 자신을 가볍게 만드는 법을 익혀왔다. 세상을 향한 분노의 무거움을 온유함의 가벼움으로 바꾸어가는 지혜를 깨우쳐가고 있다. 인간은 그렇게 스스로를 극복해가며 새로 태어난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1882)에서 “신은 죽었다. (……) 우리가 그를 죽였다”라고 선언했다. 신이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은 인간이 믿어왔던 중심이었다. 신의 죽음은 그 중심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동안 믿고 숭배해온 기존의 가치들이 모두 전도된 것이다. 모든 가치가 무너진 그 자리는 비어 있다. 절대적 가치에 대한 믿음이 붕괴한 그 자리를 우리는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니체는 신이 죽은 바로 그 자리에 인간을 살려내려 한 것이다.
처음에 꺼냈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 사실 그는 대단히 논쟁적인 인물이다. 니체가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 유형인 ‘초인(Ubermensch)’은 범인(凡人)들이 따라가기 어려운 경지일 것이다. 또한 니체는 개인주의자이며 귀족주의적인 사고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는 민주주의자가 아닌 엘리트주의자다. 그는 자기도취적이고, 병을 앓은 탓인지 종종 변덕스럽다. 그런 점에서 니체의 철학은 우리가 가까이 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니체를 읽는다. 사는 게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그럼에도 삶을 사랑하고 싶어서, 그리고 지금의 나를 극복하고 뭔가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니체를 읽는다. 그래서 니체는 시련에 빠진 나를 단련시키고 강하게 태어나도록 이끌어준다. 나도 니체를 읽으며 그렇게 성장했던 기억이 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언제나 변덕스러운 것은 나의 마음이다. 지난밤 그렇게 절망스러웠던 세상의 색깔이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환해보이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내 마음이 뿌연 회색빛에 젖어 들어가던 날이면 니체의 책을 펴서 그의 잠언들을 읽곤 했다.
“우리는 동요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거나 새로 얻은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우리는 낡은 것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우리는 이미 배를 불태워버리고 말았다. 용감해지는 수밖에 없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내가 힘들었을 때, 그는 나의 동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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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유창선 저 | 사우
단순히 인문학 고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자신의 내면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오늘 이곳에서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유창선 (시사평론가)
진보적 시사평론가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요즘은 인문학 작가이자 강연자로 살고 있다. 쓴 책으로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