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그때는 그랬다. 서른 살이 되면 어쨌거나 멋있는 여자가 될 줄 알았다. 물론 산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비교적 괜찮은 서른 살이라 생각하고 살았다. 어쩌면 지난 이십대가 너무 볼품없어서 그랬던가.
친구들과 모여 앉아 종종 이런 얘기를 했다. “그때가 더 예뻤겠지만 돌아가기는 싫어.” 그러면 친구도 동의를 했다. “나도. 구질구질했어, 20대엔.” 그래, 딱 그거다. 구질구질했다. 엄마가 보내준 용돈이 다 떨어질 무렵이 되면 한껏 너그러운 표정을 한 선배가 맥주를 사주겠다며 학교 근처 술집으로 아이들을 몰고 가고선 먼저 취해 사라져버렸다. 남은 20살짜리들이 어찌할 바 몰라 발을 동동 구르다 주머니를 다 뒤지고 몇몇은 ATM기로 달려갔다. 최소 인출금액 만 원을 맞추지 못해 천 원, 이천 원을 입금하고 다시 만 원을 꺼내는 일이 허다했다. 20대 중반이 되었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 들어간 직장은 걸핏하면 월급이 밀렸다. 사실 시키는 일도 시답잖아서 월급을 내놓으라 큰소리를 치기도 애매할 정도였다. 게다가 막 제대한 복학생 남자친구마저 책임져야 했으니 늘 가난하고 주눅든 이십대였다.
김애란의 소설집 『침이 고인다』 에 수록된 단편 「성탄 특선」이 꼭 그런 내용이다. 여자친구와 소소한 잡담을 나누고 온종일 같이 있을 수 있고 여관처럼 뒷문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는 자신만의 방을 갖고 싶은 백수 오라비와, 크리스마스 이브에 적당한 가격의 모텔을 찾지 못해 밤새 거리를 헤매는 여동생의 이야기.
우리들은 29살에 선택을 했다. 가난과 주눅이 지겨워 서른을 넘기지 않고 결혼을 하거나 가난과 주눅이 지겨워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른 선택을 한 친구와 멀어졌다. 그렇게 서른 살이 된 거였다. 제법 어른 흉내도 내 보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어리고 서툴렀다. 나는 비장하지도 않고 철학적이지도 않았다. 잘 웃고 잘 떠들었다. 화가 날 일이 많았지만 회사 상사에게는 “괜찮습니다.”로 일관했고 가족들에게는 “나 바빠. 전화 끊어.”로 일관했다. 가끔 내 30대는 왜 이렇게 부당하고 정신없고 바쁜가 절망하기도 했지만 곧 우아한 40대가 올 것이므로 괜찮다 생각했다.
얼마 전 제주 4.3문학상 수상작인 『서른의 반격』 을 읽었다. 언젠가는 본사 정직원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대기업 인턴 지혜와 임금 체불에 열정 페이를 강요당하며 살았던 규옥, 그리고 무명 시나리오 작가와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한 남자가 세상에 작고 우스운 반격을 가하는 이야기다. 나는 읽는 내내 낄낄거렸는데 그 우습기 짝이 없는 쓸쓸함의 근원은 바로 내 30대를 그대로 그려놓은 듯한 동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나는 40대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절대 우아하지 않다. 잘 웃는 사람들의 얼굴에 밴 주름이 예쁘다고 했던 말, 다 취소다. 하나도 예쁘지 않다. 왜 나는 여태 서툴까. 왜 아직 사는 게 뭔지 짐작도 못하는 걸까. 윤이재의 소설 『마흔다섯 미선 씨』 를 읽고 나서는 더욱 그러했다. 미선 씨는 18년 만에 이혼했다. 이혼까지 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돈 문제로 괴로워하며 자책하던 남편이 기어이 이혼을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심장마비로 고작 이혼 6개월 만에 죽어버렸다. 남은 것은 거의 없다. 빚을 청산하고 남은 전세금 1억 원과 남편이 아이들 이름으로 남겨준 3천만 원의 통장이 다다. 다행히도 미선 씨는 그리 불행하지 않다. 그녀 주변의 사람들은 다들 따뜻하고 다정하고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아픔을 가라앉히는 데 열심이기 때문이다. 미선 씨는 곧 괜찮아질 것이었다. 내가 이 소설에 먹먹했던 것은 미선 씨에게 닥친 불행이 드문 일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어쩌면 너무 흔한 슬픔,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다가올 우울이라는 것을 알아서였다.
“사는 게 너무 짠해. 누구라도 다 짠해.” 나는 투정을 부렸다. 나와 동갑내기 소설 속 주인공들이 나처럼 다 짠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50대 여인이 주인공인 소설은 절대 읽지 않을 테야. 적어도 내가 쉰 살이 되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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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반격손원평 저 | 은행나무
사건과 주제를 형상화시키고 도출해내는 작가의 힘, 소설미학이 돋보인다”며 “그들의 저항은 비장하거나 영웅적이거나 하지 않고, 게임처럼 경쾌하게 행해진다.
김서령(소설가)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