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내 이름을 걸고 작은 의원을 연 지 두 달째다. 개원하고 처음 한 달은 무척 불안했다. 남들 다 한다는 인터넷 광고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병원 홈페이지조차 없어서 ‘과연 누가 나를 찾아와줄까’ 하며 걱정했다. 그전에 큰 대학병원에서 근무할 때는 (그런 경우는 없었지만) 환자를 한 명 보든 백 명을 보든 월급은 꼬박꼬박 나왔고, 전기료나 병원 관리비를 따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는데, 독립해서 진료하다보니 ‘환자가 적어서 임대료와 직원 월급도 못 주면 어쩌나’ 하는 불길한 상상이 불쑥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운이 좋은지, 얼마 전부터 ‘망하지는 않겠구나’ 하고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방심은 금물이라고 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진심을 다하면 나를 찾는 분이 꾸준히 있겠지’라는 믿음도 강해졌다. 의사도 생활인인지라, 적자 걱정에서 벗어나니 진료라는 본질에 더 충실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다 보니 상담을 하며 보내는 시간을 점점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즐긴다는 표현을 써서 환자분들께는 죄송하지만, 그만큼 내가 상담에 더 몰입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즐거움을 넘어 감동을 느낄 때도 많아졌다. “환자에게 도움이 되어야지, 의사 자신이 감동을 느낀다니 그게 말이 되냐!”고 언짢아하실 분도 있겠지만... 한 세션이 끝났을 때 벅차오르는 듯한 감정이 느껴질 때가 분명히 있다. 고통을 해결해주지도 못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내담자에게 선명한 길을 보여주지도 못 했는데, 뭐라 표현하기 힘든 벅차오름을 그가 느꼈다는 것이 전해질 때가 있다. 무슨 거창한 해석을 내놓은 것도 아닌데 환자 스스로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빛이 달라지는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모든 환자에게 다 적용할 수 있는, 또 모든 치료자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일정한 치료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의사는 환자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든 일단 따라가 보는 게 중요하다. 그의 이야기를 이런 저런 각도에서 살펴보고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서로에게 비춰주다 보면 어느 순간 ‘이거구나’ 하는 게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과연 상담이란 게 도대체 무엇 때문에 효과를 발휘하는 걸까? 오서독스한 정신분석이든 카운슬링이나 코칭이든, 그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면, 그게 도대체 어떤 기전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건 심리 전공자라면 누구나 궁금해 하는 주제다. 나도 그렇다. 언젠가 꼭 책으로 엮고 싶은 것도 “무엇이 우리 마음을 치유하는가”이다. 이미 잘 알려진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내용이 아니라, 어떤 두 사람의 만남이 치유적일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신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요리로 치자면 잘 알려주는 레시피가 아니라, 셰프가 몰래 쓰는 조미료를 밝혀내 보고 싶은 것이고. 의도하지 않은 우연이 일으키는 긍정적 변화를 포착해내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아무리 설명하려고 해도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고, 그 무엇을 깨닫게 되어도 말로 이야기해낼 자신이 없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정말 훌륭한 상담이란 뭘까를 말과 이야기로는 절대 다 보여줄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폴 데스몬드와 게리 멀리건의 「Two of a Mind」 를 듣다가 ‘아 어쩌면 의사와 환자가 나누는 치유적인 대화란 이런 음악일지도 모르겠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두 대의 색소폰이 대등하게 음을 주고받으며 음악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 한 시간짜리 상담을 압축해 놓은 것 같았다. 클라이막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흥분을 시키는 것도 아니다. 슬쩍 슬쩍 음을 던지면, 다른 한 대의 색소폰이 뚜르르 하고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한 대의 색소폰이 독백처럼 길게 음을 늘어놓으면 다른 색소폰이 아무 소리도 없이 기다려준다. 그러다 이게 정말 끝인가, 하며 여운을 남기고 음악은 닫혀 버린다. 뚜렷한 결론이나 매듭도 없지만 다 듣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두 대의 색소폰은 정해진 악보대로 규칙을 따라 가는 게 아니라, 언제 솔로 연주를 시작해야 하는지, 그리고 언제 뒤에서 받쳐주어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듯했다.
한 시간 상담으로 묵직한 전율이 느껴질 때는 아르보 패르트(Arvo Part)의 「Spielgel im Spiegel」에 흐르는 피아노와 첼로 소리가 연상된다. 흐느끼는 첼로와 그런 첼로의 울림에 보조를 맞추는 피아노. 피아노는 첼로가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도록 섬세하게 뒤를 따른다. 절대로 앞지르는 법이 없다. 다그치지도 않는다. 몰아가지도 않는다. 나는 이 음악을 들을 때마나 첼로는 환자, 피아노는 의사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한다. 과연 나는 내 진료실에 앉아 「Spiegel im Spiegle」의 피아노처럼 연주하고 있을까, 하고 내 모습을 떠올려 보곤 한다. 과연 나는 제대로 의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반성하게 만드는 음악이 바로 이 「거울 속의 거울」 이다.
치유는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켜놓겠다는 목표 지점에 도달했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 그 자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치유는 어떤 목적을 갖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풍부하고 활발한 화학작용이 일어날 때 생기는 부산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그러니 우리가 고달픈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나를 무엇인가로 바꿔놓으려 목적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이야기의 목격자가 되어줄 누군가가 필요한 겁니다. ( 『당신이라는 안정제』 중에서)
김병수(정신과의사)
정신과의사이고 몇 권의 책을 낸 저자다. 스트레스와 정서장애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진료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교수 생활을 9년 했고 지금은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의 원장이다.
hsryutt
2018.04.06
iuiu22
2018.04.05
이 문장에 밑줄 치고 갑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