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으로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극작가 사이먼 스티븐슨의 최신작 <하이젠버그> 가 국내 무대에 올랐습니다.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70대 알렉스와 40대 죠지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을 풀어낸 작품인데요. 지난 2015년 미국 맨해튼 씨어터 클럽에서 초연 이후 ‘올해 최고의 연극’이라는 평을 받으며 뉴욕과 런던에 이어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한국 무대에 올랐습니다. 나이 차가 상당히 나는 두 배우의 2인극은 국내에서는 쉽게 접하기 힘든 만큼 개막 전부터 기대와 함께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는데요. 하지만 무대에 오른 정동환, 방진의 씨를 보고 있자니 괜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습을 치열하게 했어요. 원 캐스트고 대사 분량도 많아서 정동환 선생님과 연습을 많이 했거든요. 무대도 사이즈에 맞게 갖춰 놓았기 때문에 연습 때와 큰 차이 없이 무대에 서고 있어요. 관객을 만나고, 매일 다른 반응을 접하는 것만 달라요.”
공연이 끝나고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분장실에서 방진의 씨를 만났습니다. ‘연극이 끝난 후’라는 노래가 생각나는데, 지금 어떨까요?
“좀 멍하죠. 연극이 끝나고 내려오면 이렇게 멍한 상태에서 15분쯤은 지나야 물도 마시고,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아요.”
연강홀이 작은 규모가 아닌데 2인극, 마이크도 사용하지 않고 퇴장도 없는 연극이라 상당히 힘들 것 같아요.
“처음에는 부담감이 있었어요. 무대 뒤에도 관객들이 계시잖아요. 사실 연극 자체가 아직은 저에게 많이 어렵고, 그 인물로 다가가는 과정이 고통스러워요. 제가 아니니까요. 객석에서는 어떻게 보일지 궁금한데, 지금은 최선을 다해서, 그리고 재밌게 하고 있어요.”
정동환 선생님과의 작업은 어떠셨어요? 거친 대사들도 많고, 처음에는 좀 어렵고 불편했을 듯합니다.
“처음에는 어려웠죠. 편하게 웃고 얘기했지만, 어렵지 않은 척 했던 거더라고요(웃음). 선생님은 저한테 큰 산 같은 존재니까요. 죠지 대사에 욕도 많은데, 처음에는 선생님한테 욕을 못 뱉었어요. 정말이지 연습을 통해서 나온 겁니다(웃음). 그런데 지금은 정말 편안해요. 선생님이 쿨하세요. 무대 밖에서도 잘 대해주시고, 고민도 잘 들어주시고요.”
작년에 <비너스 인 퍼>도 하셨지만, 결혼 전과 비교하면 또 오랜만에 참여하는 작품이잖아요. 연극 <하이젠버그> 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사실 대본은 결혼 전에 봤어요.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빨리 무대에 오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때 카페에서 대본을 봤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우리와 별다르지 않은 인물들로, 별다른 사건도 없이 이렇게 얘기를 재밌게 풀어낼 수 있을까. 대본을 읽고는 가슴이 먹먹한데 막상 내용을 보면 특별한 게 없어서 신기했어요.”
배우 입장에서는 특별한 사건이 없는데 감동을 줘야 하는 게 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그 지점이 가장 어려웠어요. 물론 죠지에게는 어떤 목표와 이유가 있지만, 처음에는 각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러다 그 삶이 만나는 건데. 배우로서 접근할 때는 그 삶을 살면서 뭔가를 담아내는 게 아니라 묻어나게 해야 해서 힘들었어요. 이 작품은 조금 더 나이 들어서 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래도 결혼 전에 대본을 봤을 때와는 좀 다르더라고요. 아무래도 자식이나 삶을 바라보는 모습 등은 조금 더 다가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우매한 질문입니다만, 결혼 하고 아이를 낳으니까 많이 다른가요(웃음)?
“다르죠. 저도 말로만 듣다 직접 경험하니까 많이 다르더라고요. 새롭게 알게 되고 경험하게 되는 감정도 있고, ‘나한테 이런 면이 있구나!’ 놀라게 될 때도 있고요. 아이에게 느끼는 감정 역시 색다른데, 긍정적인 부분도 있고 부정적인 부분도 있어요. 예전에는 제가 하고 싶은 걸 했다면 이제는 뭔가 견뎌야 하는 부분도 있고요. 제가 지루한 걸 참지 못하고, 성격도 급한데 말이죠.”
방진의 씨에게 새로운 경험을 안겨준 ‘그분’과의 이야기는 영상을 통해 직접 들어보시죠!
죠지 번스의 캐릭터를 보면 ‘다듬어지지 않은 충동적인 성격에 쉴 새 없이 재잘댄다’고 설명이 돼 있던데요. 방진의 씨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웃음).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저와 닮은 부분이 있어요. 제 안에 죠지와 맞닿는 부분이 있어서 흥미를 느끼기도 했고요. 죠지는 현재에 충실하고, 따지거나 생각하지 않고 직진하는 성격인 것 같아요. 반면 알렉스는 생각하면서 자신을 컨트롤하죠. 두 사람이 정말 다른 거예요. 극 중 죠지의 대사가 계속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도 두 레일이 함께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목적이 있고 충동적인 면도 있지만, 알렉스에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면 다가가지도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럼 이렇게 무대에서 내려와 방진의 씨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때 죠지와 가장 다른 점은 뭔가요?
“저는 죠지처럼 대놓고 말은 못해요. 사람들이 생각은 해도 말로 내뱉지는 않을 때가 있잖아요. 상대방을 배려해야 하니까. 그런데 죠지는 생각한 대로 말하죠. 속 시원할 것 같아요. 그 부분은 저와 달라요.”
<하이젠버그> 에서 가장 와닿았던 대사나 장면은요?
“지금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몰라도 제가 대본을 봤을 때는 ‘뭔가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굉장히 마음에 와닿았어요. 너무 사랑하거나 좋아하면 가까이에서 볼 수밖에 없는데, 아름다운 거리감이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 부분을 죠지가 많이 어려워한다는 것도 공감했고요. 사람에 대한 기대가 크고 집착하게 되고, 그래서 자신을 거쳐 간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든 거죠. 그런 것들이 많이 이해됐고, 슬프기도 했어요.”
이 작품에는 ‘예측 불가능한 내일이 기대되는 삶’이라는 부연 설명이 따르던데, 어떤 내일을 기대하세요?
“예측 가능한 게 없더라고요.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이 작품 하면서 더 많이 느꼈어요. 예전에는 작품 욕심이 많았는데, 작품은 만나지는 거더라고요. 지금은 천천히 좋은 작품을 만나고 싶어요. 단순하게 현재 재밌고 흥미로운 작품이요. 그리고 나이가 들어도 배우를 할 수 있다면 감사하죠. 정동환 선생님 보면서도 생각해요. 계속 연기하고, 배우로서의 삶을 살면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정말 행복한 일이라는 걸.”
특별하지 않은 두 인물이 별다른 사건 없이도 묘한 감동을 주는 연극 <하이젠버그> 는 5월 20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됩니다. 간결하면서도 독창적인 무대세트와 독특한 캐릭터 설정을 통해 이야기 자체에 좀 더 집중하게 만드는 작품인데요. 특히 별다른 사건 없이 관객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두 배우 정동환, 방진의 씨의 연기가 돋보입니다. 참, 방진의 씨에게는 <하이젠버그> 에서와는 결이 다른 에너지도 있죠? 하반기에는 오랜만에 ‘하니’한 배역으로도 무대에 설 예정이라고 하니까요. 천천히, 하지만 분명히 더욱 풍성해지고 있는 배우 방진의 씨의 행보를 함께 지켜보죠!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