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삼인행, 필유아사언(三人行, 必有我師焉)이라고 고등학교 시절 한자 시간에 배웠다. 세 사람이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는 공자의 유명한 말씀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타산지석과 반면교사가 있다. 운전을 하면 이러한 고전적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 실생활에서는 이렇게 늘 겸허하게 배우는 마음으로 살지 않지만, 운전을 시작하고서는 한동안 운전하는 사람 모두에게서 팁을 얻었다. 3명 중 한 명이 스승이라면 운전 스승은 얼마나 많겠는가. 이때 발견한 사실, 사람은 남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기회만 있으면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들 내게 운전을 기꺼이 가르치려 했다.
다행히도 나는 배울 수 있다면 무엇이든 꺼리지 않는 기질이었다. 내게 필요한 걸 알려준다면 약간의 잘난 척도 받아줄 수 있다. 이런 마음가짐을 내비치면 세상에는 스승이 널려 있다. 특히 운전처럼 많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기술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중에서 가장 쓸모 있는 가르침을 주는 직업군은 단연 택시 기사님이었다. 즉, 나는 차를 사고 연수를 받은 후에도 한참은 택시를 타고 다녔다는 뜻이다. 운전을 할 줄 안다는 것과 운전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다른 행위이다. 나는 운전을 하는 법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쉽게, 자주 할 수는 없었다. 일단 대도시 도로에는 차가 너무 많았다. 그 차들 틈에 끼어 차선을 바꾸는 것도 어려웠고, 뒤에서 차들이 다가오거나 옆에 정차된 차가 있을 경우에는 재빨리 대처하기도 버거웠다. 붐비는 도로는 용기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운전 초기의 나는 택시를 타면 선생님들에게 팁을 묻곤 했다. 택시 기사님들은 여러 노하우를 전수해주었지만,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서초동에서 강남역으로 갈 때 만난 기사님이 한 말이었다. “운전 어려울 거 하나 없어요. 옆에서 어떻게 하든 자기 길만 쭉 가면 돼요.”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생각해보는 말이다. 자기 길만 쭉 가는 것, 기사님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처럼 말했지만, 이만큼 어려운 일이 드물다. 한 차선에 머물며 직진만 하려 해도 차들이 내 앞을 가로막아서 피해야만 할 때도 있다. 무엇보다 초보는 내 길이 무엇인지 영 알 수가 없다. 쭉 가는 건 편하지만, 언제나 여기에 머물 수 있을까? 이 길이 정녕 맞는 결정일까?
돌아보면 내가 이제껏 내린 결정들도 그러했다. 일이든 인간관계든 무언가 한번 정하면 쉽게 바꾸기 어려웠다. 가급적이면 바꾸지 않아도 되는 길을 찾았다. 지금 시작한 일이 내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더 맞는 일로 옮겨 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지금 찾은 길을 쭉 간다고 해도, 옆에서 나를 밀어내거나 끌어낼까 불안했다. 늘 두리번거리면서 차선을 바꿀까 고민했지만,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는 잘 보이지 않았다. 옆에서 다른 사람이 무어라고 말해도 흔들리지 않고 앞을 보고 간다는 건 습득하기 어려운 비법이었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는 언뜻 보기에는 한길에 쭉 머물러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이다. 1910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윌리엄 스토너는 열아홉 살의 나이에 군(郡) 지원을 받아 컬럼비아에 있는 미주리 대학 농과에 입학한다. 친척 집에서 일을 거들며 고학하던 스토너의 인생이 완전히 바뀐 계기는 2학년 때 교양 수업으로 들었던 ‘영문학 개론’ 강의다. 그때까지 문학을 진지하게 접해본 적 없었던 스토너는 아처 슬론 교수에게 셰익스피어 소네트의 의미를 질문받고 할 말을 찾지 못한다. 그 이후 그는 농과 대학의 수업을 듣지 않고 철학과 고대역사, 영문학 강의를 신청한다. 문학 속 인물들이 일으킨 강렬한 환상 속에서 그는 앞으로 걸어갈 길을 자기도 모르게 발견한 것이었다.
400페이지에 달하는 『스토너』 는 윌리엄 스토너라는 한 인간의 삶을 그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 사건도 없는 소설처럼 보인다. 농부의 길을 걸을 것 같았던 그는 결국 영문학과 대학원생으로 남고, 많은 이들이 명분을 지키기 위해 자처했던 군 입대도 거부한다. 그 이후에는 말단 강사에서 종신 교수로 이동, 짧았던 사랑과 불행한 긴 결혼, 누구보다 아끼는 아이의 탄생과 멀어짐, 학과 내 갈등, 평생에 딱 한 번 찾아온 사랑과 이별, 그 모든 걸 잃은 후의 시간이 이어진다. 보통의 인생처럼 수 없이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극적인 사건은 없는 고요한 삶이다.
누군가는 스토너에 대해서 ‘딱히 별다른 것을 하지 않은 인생’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는 불행한 결혼을 아내의 뜻대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아내가 딸을 그에게서 빼앗았을 때에도 어쩌지 못했다. 그를 미워한 학과장이 그에게 불이익을 주었을 때도 그저 견뎠다.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274쪽)인 사랑을 드디어 찾았지만, 그 소중한 감정을 주위의 모함으로 잃었다. 그때도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의지를 따른 듯 보였다.
그렇게 참고 버티면서 이어가는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것이 『스토너』 의 이야기다. 『스토너』 는 마음 아프지만 슬프지만은 않다. 그는 다른 사람에 맞춰서 살아간 것처럼 보였으나 그의 원칙은 늘 한결같았다. 자신의 안위는 양보할 수 있지만, 고전과 문학에서 발견한 가치에 어긋나는 건 용납하지 않았다. 조용한 스토너의 내면에서는 치열한 파란 불꽃이 타고 있었다.
『스토너』 라는 소설이 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공교롭게도 이 소설의 정신과도 유사하다. 나는 이 책의 존재를 2013년 줄리언 반즈가 〈가디언〉에 쓴 칼럼을 보고 알게 되었다. 1965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묻혔다가 2006년에 재출간된 후 이름을 얻고, 2013년에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꼽혔다. 줄리언 반즈의 표현을 빌리면 이 책은 “신성한 내면의 공간”에 관한 소설이다. 그 안에는 학문에 대한 갈망이 있고, 타인과 나 자신을 이해하는 관찰이 있고, 자기 자신의 핵심을 지키는 의지가 있다. 그리고 작가가 “세상”이라고 칭한 것이 이 모두를 뒤흔든다. 세상은 우리가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게 간섭하는 외부의 힘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세상에게 진 채로 끝나지 않는다. 스토너는 아주 사소하지만 모든 이에게 존재했던 열정을 파고드는 자기 길을 갔고, 궁극에는 많은 사람에게도 가닿았다. 줄리언 반즈가 이 소설을 위대하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이 위대하고 무엇이 사소한지 말로는 쉽게 가를 수 없다. 일단은 자기가 정한 방향대로 갈 수밖에. 그러다가 언젠가 우리는 다다르게 된다. 그곳에 다다르게 될 거라는 약속이 없더라도, 사소한 삶도 결국엔 위대하다.
이런 태도가 우리가 말하는 ‘자기 길을 쭉 간다는 것’이 아닐까. 나는 한길만 쭉 갈 수 있는 용기를 부러워했지만, 한편으로는 한길에만 머무르는 사람을 겁쟁이라고 생각했다. 필요할 때는 바꾸어야 한다, 삶에는 ‘머무르기’와 ‘옮겨 가기’라는 두 가지 다른 용기가 필요하다. 세상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로 가지 못하게 방해하고 감시한다. 하지만 결국에 이리저리 길을 옮겼다고 해도 그를 이어보면 하나의 선이 된다. 우리는 그렇게 길을 정하고 계속 쭉 온 것이었다.
운전이 익숙하지 않았던 그때, 나는 똑바로 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조차도 버거웠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기가 힘들었다. 잠깐의 방해에도 흔들렸다. 하지만 좀 더 빨리 가려고 조급해하지 않으면, 옆 사람의 속도에 신경 쓰지 않으면, 너무 괴로워하지 않으면 자기 길을 갈 수 있다. 아직은 이 길이 맞는지 몰라서 걱정스럽지만 시간이 오래 쌓인 후에는 맞는 길로 가는 게 아니라 가는 길이 맞도록 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지금도 내 길을 확실히 안다고 자신할 순 없지만, 그날의 택시 기사님의 충고를 지금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쭉 가는 게 아니라, 쭉 가려면 남의 눈치만 봐서는 안 된다고. 머무르는 것도 옮겨 가는 것도 자기 원칙대로 해야 한다. 요새는 도로 위의 무법자 택시들이 거칠게 다가오거나 선을 넘어 껴들어도 겁먹어 옆으로 밀리지 않고 꿋꿋하게 내 차선을 지킬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때의 기사님을 도로 위에서 만난다고 해도 나는 밀리지 않고 나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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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존 윌리엄스 저/김승욱 역 | 알에이치코리아(RHK)
스토너의 삶이 그렇듯 인생의 어떤 부분은 스러지고, 어떤 부분은 끝까지 살아남아 우리 자신을 상징할 것이다. 마지막까지 굳건히 지켜갈 우리 인생의 기둥은 무엇인지, 이 소설은 묻고 있다
박현주(번역가)
소설을 번역하고 에세이와 로맨스 추리 소설을 쓴다. 그리고 드라마를 본다.
sybille
2018.10.02
꽃사슴
2018.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