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새벽에 보았던 것이 생각났다. 벌떡 일어나 이불 끝자락을 확인했다. 이불 커버와 솜, 매트리스 커버까지 고양이 토사물로 젖어 있었다. 세 가지를 한꺼번에 돌리기에 우리 집 세탁기는 작았고, 이불 세 개를 말릴 만한 공간도 없었다. 어쩌지, 고민하다가 만날 지나다니지만 들어가 본 적 없던 빨래방이 생각났다. 이불을 돌돌 말아 빨래 바구니에 넣고, 저금통에서 동전을 뭉탱이로 집어 들었다. 잠옷을 입은 채로 집을 나와 빨래방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얼마 전, 친구가 그 빨래방 옆 건물에 있는 술집에 데려갔었다. 간판도 잘 보이지 않는 곳인 데다가 지하에 있었다. “나는 이 동네에 사는데도 전혀 몰랐던 곳인데 이런 곳을 어떻게 알았냐.” 물었더니 근처에 사는 다른 친구가 데려온 적이 있다고 했다. 친구의 친구는 빨래방에 왔다가 그 술집에서 맥주를 한 잔 마셨다. 빨래를 기다리다가 우연히 발견한 술집이 마음에 들었고 그 뒤로 친구들을 데려가기 시작했던 거다. 덕분에 내게도 단골 술집이 생겼다. 그 술집이나 빨래방 앞을 지날 때마다 친구의 친구가 빨래방 앞을 어슬렁거리다가 술집을 발견하는 장면을 상상해보곤 했다.
이불들은 무거웠다. 가까운 거리였는데도 몇 번이나 바구니를 내리고 들기를 반복했다. 빨래방에 들어서자 후, 하고 한숨이 흘러나왔다. 벽면에 붙은 빨래방 이용 안내문을 읽으며 숨을 골랐다. 대형 세탁기에 이불을 넣으려고 하는데 먼저 와 있던 남자가 “그거 고장 났어요.”라고 일러주었다. 동전을 표시하는 창에 에러를 알리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옆의 중형 세탁기 두 개에 이불을 나눠 넣었다. 오백 원짜리 동전 몇 개를 넣었더니 20분이 걸린다고 표시되었다. 친구의 친구처럼 술집에 가보고 싶었지만, 이른 아침이라 문이 닫혀 있었다. 새벽에 토를 발견했을 때, 바로 갖고 나왔으면 빨래를 기다리며 맥주 한 잔을 마셔볼 수 있었으려나. 게으름을 피운 대가로 아침 빨래방에 와버렸지만 이른 아침, 빨래방도 괜찮았다. 어쩐지 들뜬 기분으로 의자에 앉았는데 금세 지루해졌다. 일단 집으로 갔다. 아침으로 먹을 두부를 부치다 보니 집에 온 보람없이 빨래 시간이 끝나갔다. 혹시 누군가 내 빨래를 꺼내 놓거나 가져가면 어쩌지, 싶어서 종종걸음으로 다시 빨래방으로 향했다.
빨래는 시간에 맞춰 끝나 있었고 건조기 쪽으로 이불을 옮겼다. 건조기는 자주 열어 빨랫감을 뒤집어주는 게 좋다고 적혀 있기에 이번에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한 여자가 고장 난 세탁기에 이불을 넣었다. 아까 그 남자처럼 뭔가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여자는 동전을 넣고 몇 번 기계를 훑어보다가 고장임을 인지하고 옆으로 이불을 옮겼다. 이불을 넣은 여자는 내 옆에 앉았다. 말해주지 못한 일이 못내 아쉬웠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여자는 핸드폰을 보기 시작했고, 나는 여자를 의식하길 그만두고 이불들이 동그란 구멍 안에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선풍기랄까. 관람차랄까. 그런 것들이 일정한 속도를 갖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았던 어느 날들이 떠올랐다.
건조를 끝내는 알림이 울렸다. 기계에서 이불을 꺼내는데 잘 마른 이불이 따뜻했다. 햇볕에 바삭하게 말린 이불을 걷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고 다른 방식으로 행복해졌다. 이불들을 빨래 바구니에 쌓아 들어 올리니 거기에 얼굴을 묻어야 안전하게 들고 갈 수 있는 자세가 되었다. 따끈한 빨래에 얼굴을 묻고 집에 돌아가는 기분이란 것도 있구나. 오래전에 빨래터나 개울에서 빨래하는 사람들을 떠올려봤다. 드라마나 민화에서나 볼 수 있던 장면들. 저마다 사소한 일에서 갑자기 찾아오는 행복에 마음을 빼앗기는 날이 있었겠지. 그중에는 오늘 내가 느낀 것과 비슷한 류도 있었으려나. 이불을 갖고 집에 들어가자 고양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밥그릇 앞에 앉아 울고 있었다. 가득 담아주며 아침에 일어나서 얘를 원망했던 일을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이 고양이 덕분에 몰랐던 것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 종종 토요일 아침에 와야지. 빨래방.
그때마다 찬성은 이상하게 태어나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엄마 대신 에반이 떠올랐다. '에반도 이런 데서 산책하면 좋을 텐데' '에반도 저런 간식 주면 흥분할 텐데' 아쉬워했다. 에반은 요즘 찬성이 다가가도 쳐다보지 않았다. 흐릿한 눈으로 멍하니 허공만 응시했다. 찬성이 밥에 날계란을 풀어주고, 할머니 몰래 참치 통조림을 얹어줘도 고개 돌리는 날이 많았다. '요새 내가 자꾸 집을 비워 삐진 걸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최대한 돈을 빨리 모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66쪽)
- 김애란 『바깥은 여름』 중에서
-
바깥은 여름김애란 저 | 문학동네
친숙한 상대에게서 뜻밖의 표정을 읽게 되었을 때 느끼는 당혹스러움, 언어의 영(靈)이 들려주는 생경한 이야기 등이 김애란 특유의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로 펼쳐진다.
박선아(비주얼 에디터)
산문집 『20킬로그램의 삶』과 서간집 『어떤 이름에게』를 만들었다. 회사에서 비주얼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kireuke
2019.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