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개를 데리고 지나가다가 슬그머니 할머니들이 없는 틈을 타서 의자에 책을 두고 도망칠까.
글ㆍ사진 조영주(소설가)
201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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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6월, 이사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있었던 일이다. 평소와 같이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어느 집 담장 밑에 일렬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제각각 생긴 의자, 왜 이 의자들이 이곳에 놓였을까. 나는 신기하다는 생각에 사진을 한 장 남겼다. 그러고는 산책을 마저 하다가 또 일렬의 의자를 발견했다. 사능천변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의 시작 지점 부근, 어딘가 가정집에서 남는 식탁의자를 가져다 나란히 놓은 듯한 풍경이 나타났다. 왜 이런 곳에 의자가 있는가, 나는 한 장 더 사진을 넘긴 후 길을 떠났다.

 

두 장의 사진에 얽힌 의문은 산책을 끝내고 돌아올 무렵 자연스레 풀렸다. 다시 만난 담장 아래 의자에 할머니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까지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사이가 좋은 것만큼은 분명했다. 아니라면 어린아이처럼 이를 보이며 깔깔 웃지는 않을 테니까.

 

할머니들의 담소는 대부분 지나가는 사람에서 시작했다. 예를 들어, 내가 개를 데리고 다니면 갑자기 한 할머니가 말을 꺼낸다. “나는 개가 싫어. 저거 똥은 잘 치우나 몰라.” 그러면 바로 옆에 앉은 할머니가 말을 받는다. “저 아래 왜 진돗개 있잖아, 진돗개 풀어놓고 키워.” 보통의 경우, 다음 타자는 진돗개에 대한 이야기를 잇겠으나 할머니들의 수다는 좀 다르다. “그런데 예전에 살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대?” 개 이야기 하다가 웬 사람 이야기? 이쯤 되면 귀가 쫑긋해진다. 나는 개에게 발맞춰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척 발을 멈추고 슬그머니 귀를 기울인다. 할머니들은 이런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말을 잇는다. 마을에 어린 사람들(할머니들 눈에는 3~40대가 청년이었다)이 대거 유입되면서 예전 이웃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정에 연이어 이야기는 당연하다는 듯(제 3자가 보기엔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데) 동네 땅값이며 비닐하우스에서 키우는 유기견들의 사연으로 번진다. 나는 이 두서 없는 담소를 적당히 끊어 들으며 의자들의 정체를 어슴프레 짐작할 수 있었다. 아, 그러니까 이 의자들은 ‘간이 사랑방’ 혹은,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전원일기>를 보던가 하면 나오는 대청마루인 모양이군.

 

누군가는 이사를 가고, 또 누군가는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꽤 숫자가 줄었지만 할머니들은 날이 밝으면 이곳 의자들로 나왔다. 지나가는 젊은이들(사실 젊은이라고 보기엔 나이가 많지만)에게서 이야깃거리를 찾았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옛날 이 동네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으리라. 나는 그런 할머니들을 보며 상상했다. 할머니들이 말하는 옛날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하고 말이다.

 

일단 아파트는 없었으리라. 어딜 가도 논과 밭이 보이고, 개들은 신이 나서 뛰어 놀았으리라. 하지만 평생을 도시에서만 살아온 내 비루한 상상력으로 이 이상의 연상은 무리였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떨까는 소설 자료 찾듯 도서관을 뒤져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궁금하다. 누가 좀 알려주지 않으려나 하고 안타까워하던 차에 우연히 “바로 이거야!” 싶은 그림을 발견했다.

 

페이스북에 72세의 할머니 그림이 연달아 올라왔다. 대중 목욕탕이라던가 옛날 혼례 풍경, 장날 풍경을 들여다 보자면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 이게 바로 옛날 동네 풍경이 아닐까 싶었달까. 더불어 막연히 바랐다. 누군가 이 그림들을 책으로 내주면 좋겠다, 그렇다면 나도 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조금이나마 옛날을 느낄 수 있을 텐데, 하고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바람은 이뤄졌다. 정말 이 책이 출간이 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72세 화백의 이름은 이재연, 데뷔작 그림책의 제목은 『고향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다.

 

나는 망상 해본다. 이 책이 나오면 다시 의자를 기웃거려 볼까. 개를 데리고 지나가다가 슬그머니 할머니들이 없는 틈을 타서 의자에 책을 두고 도망칠까. 이 책을 발견한 할머니들은 어떤 대화를 나눌까. 어쩌면 내가 개와 함께 지나갈 즈음 “누가 이걸 두고 갔는가”에 대한 흥미진진한 대화를 펼칠지도 모르겠다. “아, 나도 그림책이나 하나 내볼까.”라는 식의 대화라도 오간다면 한동안 내내 즐거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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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연 내친구김순경과아카시아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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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연 마당에모여델레비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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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연 새참먹기

 

 

 

 


 

 

고향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이재연 글그림 | 소동
논과 들판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모내기부터 추수와 탈곡, 물레방앗간, 새끼 꼬기 등 농사일은 어떤 순서로 진행되는지,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노는지 그림으로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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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산책 #할머니 #담소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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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518

2019.01.24

의자가 그냥 비어 있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누군가 앉고 거기에서 이야기 나누어서 의자가 쓸쓸하지 않겠습니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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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주(소설가)

별명은 성덕(성공한 덕후). 소설가보다 만화가 딸내미로 산 세월이 더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