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김인선의 글에서는 냄새가 난다
김인선을 아는 사람들은 <샘이깊은물> 기자 시절을 그가 가장 빛났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그 기억들을 재구성해 지면에 싣는다. (오간 이야기를 모두 실을 수 없어 발언 순서와 내용을 편집했음을 밝힌다.)
글ㆍ사진 출판사 제공
2019.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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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철의 습한 기운이 가득한 어느 날,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의 저자 김인선의 옛 동료 열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참석자들은 80년대의 몇 해 동안, 잡지사 <샘이깊은물>에서 김인선과 같이 일을 한 사람들이다. 메디치 출판사의 강의실에 둘러앉았을 때, 누군가 불쑥 “편집회의 할 것 같은 분위기야”라고 말했고, 그 말에 나머지 사람들이 동조하듯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김인선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김인선은 <샘이깊은물>을 비롯한 몇몇 잡지사와 출판사에서 일을 하다 마흔이 넘어 세상에 등을 지듯 경기도 산자락에 자리를 틀었다. 여러 해에 한 번씩, 그가 불쑥 전해오는 소식에 익숙해졌을 때쯤, 옛 동료들은 갑작스러운 부고를 접해야 했다. 지난해 5월이었다.

 

김인선을 아는 사람들은 <샘이깊은물> 기자 시절을 그가 가장 빛났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그 기억들을 재구성해 지면에 싣는다. (오간 이야기를 모두 실을 수 없어 발언 순서와 내용을 편집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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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었다면 아직 나오지 않았을 책

 

김현종(편집부) : 몇 해 전에 집에 찾아갔더니 경기도 장흥에 헛간 같은 곳에서 월 10만 원으로 살고 있더라고요.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눈물이 좀 났지요. 생활비와 취재비 명목으로 10개월쯤 지원을 했을까? 결국 원고는 못 받았어요. 나중에 이야기 듣기를, 김인선한테 글 받으려면 원고료를 먼저 주면 안 된다, 원고 받고 돈 줘야 글을 쓰는 사람이다 하대요. 그렇게 잊고 지내다 작년 5월, 갑자기 타계했다는 연락을 받고 가서 유언을 들었습니다. 자기 죽으면 원고는 김현종한테 보내라고, 책으로 내고 싶으면 내라 하라고. 그렇게 해서 이 책이 나오게 됐습니다.

 

김형윤(초대 편집장) : 처음, 사무실에 이 사람이 들어오는데 키가 껑충하고 뭔가 부실해 보이는 인상이었어요. 책은, 오래 전에 받았던 그 느낌이랑 다르게 표지도, 편집도 화려한데, 그게 또 어찌 보면 김인선 씨랑 어울리네요. 어쨌든 책이 나온 것 자체가 위로가 돼요. 무엇보다 이렇게 두꺼운 책으로 나올지 몰랐는데, 이 사람이 그동안 맘먹고 글을 썼구나, 그런 열정이 있었구나 하는 걸 느낍니다.

 

임선근(편집부) : 죽고 나서야 맺음이 되었구나 생각했어요. 그런 사람이었죠. 일단 일이 요만큼이라도 진척이 되면 바로 다음 거, 그다음 거를 생각하기 바쁜 사람이었어요. 시작하고 맺는 게 중요하다기보다 요샛말로 이노베이터였죠. 벌여놓고 수습은 관심 없는. 편집회의 할 때면 주변 사람들을 다 뽕 맞은 기분으로 만드는. 다른 출판사에서도 김인선 씨에게 책 내라며 노트북도 사주고 채근하는 사람도 붙이고 했는데 그 바람을 붙잡을 수는 없었죠. 김인선이 살아 있었다면 과연 책이 나올 수 있었을까? 아니, 그가 죽었기에 비로소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고 보는 게 맞는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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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까짓, 마감

 

백승기(사진부) : 독특한 사람이었죠. 글에서 자기 냄새를 풍기는 사람. 나중에 어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글을 읽는데, 이건 딱 김인선인 거야. 그래서 댓글을 남겼지요. “너 김인선이지?” 처음엔 잡아떼더니 나중에 연락이 오더라고요. 자기라고, 김인선 맞다고. 그래서 그때 저도 장흥엘 찾아가 보게 된 거예요. 출판사들이 그 사람 글에 관심을 가진 건 당연한 일이죠. 검증이 필요 없는 글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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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일 (편집부) : 김인선 씨는 군대 시절 고참 병장처럼 느껴졌어요. 86년 가을에 처음 입사하고 편집장이 입사 바로 위 선배인 김현종 씨에게 “잘 가르치라”고 하니까 김인선 씨가 “가르치긴 뭘 가르쳐. 소설 쓴다고 안 했어요? 그냥 쓰면 돼요.” 편집장 듣는 데서. 소대장의 말도 먹어버릴 줄 아는 고참 병장 같은. 앞뒤로 앉아서 서양 철학자들에 대해 귀찮을 만큼 길게 말하던 기억도 나요. 이번에 책을 보니 이렇게 좋은 글을 쓰는 이가 얼마나 남아있을까 싶네요. 위악적인 말투, 페이소스도 좋고요.

 

김연옥(편집부) : 내게 김인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번번이 마감을 안 지켜서 애먹었던 거예요. 마감이 지나면 아예 출근을 안 해 버려요. 집에 전화하면, 책에도 여러 번 나오는 그 어머니가 받으셔서는 바꿔준다고 하셨다가 바로 또 없다고 하셔요. 따지듯이 바꿔주신다면서요, 하면 쩔쩔매시며 방금 나갔다고, 자전거 타고 나갔다고 둘러대시던 거 생각나요. 나중에 이런저런 사이트에서 기자 아닌 김인선 씨가 마감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쓴 아름다운 글들을 읽으며,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었구나 감탄했어요. 마감 없는 글은 못 쓰는 사람도 많은데 그 사람은 마감 따위, 없어야 잘 쓸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건지?

 

임선근 : 책 말미에 친구 분의 해제 글에 보면 <샘이깊은물> 시기가 그의 가장 빛나는 시절이었다 했는데, 그 당시 본인에게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어요. <뿌리깊은나무>의 후신인 <샘이깊은물> 은 잡지 등록 분류상 여성지였고, 그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의식주 관련 고정 화보가 앞쪽에 배치되어 있었잖아요. 고인은 그중 〈볼 만한 집치레〉 칼럼 필자였는데, 마감 때면 아주 스스로 주리를 틀면서 글을 짜냈어요. 부르주아들의 집 꾸며 놓고 사는 이야기에 넌더리난다며. 그렇지만 막상 취재 단계에선 그 집의 주인장들과 고담준론에 빠져들었을 게 뻔하죠. 억지로 썼다는 글은 충실하고 빼어났고.

 

이용주(미술부) : 마감도 자기 글이 마음에 내켜야 지켰던 사람이었죠. 마감 재촉 받으면 그 순간 모면하려고 대충 던져놓고, 실은 이거 아니라고, 언제까지 다시 내겠다고 날짜를 미루고 그러는 거야. 그런 데 능한 사람이었죠. 나중에 회사 관두고 내가 하는 디자인 사무실하고 일을 했는데, 당장 경제적으로 곤란하니까 일을 시작하지만 계약금 받아서 여유가 좀 생기면 그때부턴 자기 생각에 빠지는 거야. 머릿속으로는 종일 여행하는 것 같았어요. 
 
박영신(미술부) : 김인선 씨는 현실을 자기 마음속에서 판타지로 만들어내는 사람이었어요. 글이 먼저가 아니라 이미지가 먼저인 사람이랄까? 그 이미지를 담기 위해 꾹꾹 눌렀다가 허겁지겁 글을 쓰는 인상이었죠. 인선 씨 글을 보면 아주 조그만 것도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요. 아주 요만하게 작아져서, 정말 밀착해서 대상을 보거나 아니면 안 보이는 걸 보려 하거나. 김인선의 이미지는 보통 사람 스케일은 아니었어요.

 

이용주 : 김인선에게 ‘사람’ 같은 현실감이 있었다면 이런 상상력이 나오지 않았겠지.(웃음)

 

 

삶과 다르지 않았던 죽음

 

김선경(미술부) : 2014년이었나, 오랫동안 못 보다가 우연히 만났을 때 충격받았어요. 눈이 움푹 들어가서 얼굴빛도 안 좋고, 그런데 마치 어제 만났다가 다시 만난 것처럼 여유작작하게 인사하잖아요. 그런 사람이에요.

 

임선근 : 죽기 5~6년 전부터 위가 안 좋았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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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 : 언젠가는 가을에 배추 32포기, 총각무 열 단 해서 혼자 김치를 해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엄마 맛은 누가 대신 못 내주니까 동사무소 가서 아주머니들 틈에 유일한 남자로 끼어서 김장 배워서 자기가 해 먹는다고. 그러면서 자기가 하는 건 그냥 김장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제의’라고.(웃음)

 

임선근 : 어머니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직접 담근 된장 떨어지는 걸 슬퍼했어요. 평소 그와의 카톡 대화나 페이스북 일상 기록으로 미루어 나는 그가 부모님 돌아가신 뒤 혼자 살아도 나물 한 가지라도 입에 맞게 조물조물 무쳐 정갈하게 밥 차려 먹으며 지내는 상상을 했어요. 그런데 인선 씨 죽고 살던 곳에 직접 가본 분께 전해 듣자니 세간살이가 사람이 살림을 하던 세간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아, 이 사람 말년에는 삶을 놓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백승기 : 곤궁한 이야기도 너무 천연덕스럽게 하는 사람이라, 그 앞에서는 입이 딱 다물어지더라고요. “그러지 말고 가끔 글도 좀 써” 하고 말했지만, 내가 그의 생계를 뒷바라지 해주지도 못하면서 그런 얘길 한다는 게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부고를 듣고 문득, 물론 투병을 하긴 했지만, 상당 부분 그의 죽음은 어쩔 수 없었던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선택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김현종 : 완만하게 택한 자살이 아니었을까….

 

이창수(사진부) : 죽기 3~4년 전엔가 버스에 자전거 싣고 와서 술 한잔했어요. 저한텐 좀 마르긴 했어도, 원래 보던 그 얼굴이었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죽었거나 살았거나, 언제나 자신 있는 사람이에요, 김인선은. “난 괜찮아”가 입버릇인. 술 마시면서 하동 터미널에서 지리산 그 높은 데 있는 우리 집까지 자전거 타고 온 길 하나하나를 나한테 설명해주는데, 시간을 공유하려고 하는 그 열망 있잖아, 노력하는 마음, 그걸 본 것만으로도 좋았지요.

 

이용주 :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간 사람이죠. 영혼이 자유롭고, 오만 데 관심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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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이 기억하는 김인선은 ‘곤궁하게 살다 간 천재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단순화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곤궁하다고 하기에는 내면이 너무 풍요로웠고 세상과 불화한 천재라고 하기에는 세상을 너무 사랑했다. 음악이라면 욕심도 애착도 대단해서 바흐의 칸타타를 노상 흥얼거릴 만큼 종교 음악광이었고 동료의 〈아마데우스〉 비디오테이프를 빌려가서는 끝내 돌려주지 않고 버티기도 했던 사람, 마감은 그렇게 안 지키면서도 다 써내고 나면 누구에게서나 “잘 썼다!” 소리를 듣던 얄미울 만큼 빛나던 사람, 그리고 끝내는 예고도 없이 삶에 마침표를 찍어버린 사람. 그 삶이 글에 스며들어 김인선만의 냄새를 풍기는지도 모르겠다.

 

30여 년 전 <샘이깊은물> 편집회의 같았던 기억 모임을 마치고 옛 동료들은 김인선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기고 간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를 들고 근처의 김치찌개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마 거기서는 삼십 년 전에 헤어진 직장동료들 간의 홈커밍데이 같은 대화가 오갔으리라. 누군가의 말처럼 “짧지만 앞으로 몇 십 년 더 마음에 안고 갈 시간”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김인선 저 | 메디치미디어
부적응자이자 아웃사이더인 동시에 자연 속에서 천진하게 살아가는 사색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꾼, 자신마저 웃음거리로 삼는 탁월한 농담가의 면모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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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