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흔히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고 하지만, 에드거 앨런 포(1809-1849)의 소설 속에선 죽은 자들이 심심찮게 말을 한다. 죽었던 줄로만 알았던 이가 살아서 실제로 돌아오기도 하고, 살해당한 사람이 매개체를 통해 살인자를 고발하기도 한다. 이렇게 포의 작품 속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하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 이르러서도 산 사람을 사망한 것으로 오진한 사건이 이따금 뉴스에 등장하곤 한다. 하물며 근대 이전에는 사망 진단이 틀린 경우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며, 우리의 3일장 풍습 역시 고인을 매장하기 전에 사망 여부를 확실하게 확인하고자 하는 목적이 컸을 것이다. 그러니,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거나 산 사람을 죽은 것으로 착각하고 생매장하는 괴담 자체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난 근거 있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죽은 자를 불러내는 또 한 가지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죽은 자가 우리의 생명을 탐내리라는 원초적 두려움에 더해, 포의 소설 속에서는 살인자의 죄책감이 죽은 자를 대신하여 입을 열고 스스로를 벌한다. 표제작 『일러바치는 심장』 에서 화자는 자신이 죽인 노인의 ‘심장 고동’을 환청으로 듣고 혼자 조바심치다 결국 자백하고 만다. 마찬가지로, 『검은 고양이』 에서 아내를 죽인 화자는 시신을 지하실 벽 속에 은닉할 때 그만 검은 고양이를 함께 넣고 벽을 막아버리고, 결국엔 그로 인해 죄상이 드러나고 만다. 경찰들이 지하실을 둘러보고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헛되이 발길을 돌릴 때, 굳이 아내가 묻힌 벽 부분을 지팡이로 두들긴 화자의 오만함 뒤에는 자기파괴적인 충동이 엿보인다.
포는 만 두 살에 어머니를 폐결핵으로 잃었을 뿐만 아니라, 아내인 버지니아 역시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하고 만다. 작품 전반에 드리워진 죽음의 이미지는 아마 그의 그런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기묘하게도 그런 포의 죽음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포는 40세가 되던 해 어느 날 외출했다가 실종되었다가, 며칠 후 헛소리를 일삼는 인사불성 상태로 발견되었고, 그대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사망했다. 평소와 다른 남루한 차림새에서부터 행적이 밝혀지지 않은 실종 기간, 불확실한 사인에 이르기까지, 그의 죽음은 많은 억측을 낳았으나 그중 무엇 하나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현대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평가되는 포의 생애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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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바치는 심장에드가 앨런 포 저/박미영 역 | 스피리투스
전혀 다른 공간에서 전혀 다른 문학적 세계를 창조했지만, 위대한 세 작가는 우리에게 까마귀라는 이름과 함께 날아왔다, 우연이지만 필연적으로. 그리하여 이제 문득, 세 번째 까마귀에 대해, 세 번째 까마귀의 노래에 대해 전하게 되었다.
박미영(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