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광장』 을 발표함으로써 일찍이 한국 문학사에서 거대한 봉우리로 우뚝 선 작가 최인훈. 그를 실제로 아버지로 둔 사람은 아버지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회색인의 자장가』 는 최인훈의 딸인 최윤경이 아버지와 함께했던 날들을 추억하는, 고백적이면서도 섬세하고 치열한 분석력이 돋보이는 산문집이다. 책 속에는 저자가 읽어낸 ‘소설가 최인훈’과 ‘아버지 최인훈’ 사이의 심연이 살갑고도 애틋하게 그려져 있다. 동시에 이 책은 한 사람이 닮고 싶어 하면서도 극복하고 싶어 했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고투하며 삶을 이어가는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담은 책이기도 하다. 영문학을 공부했고 책도 쓰게 되었지만, ‘독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사는 삶’을 행복한 인생일 수 있다고 말하는 최윤경 저자를 서면으로 만나 보았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간간이 이렇게 인터뷰하고, 주변 지인의 독후 감상을 들으며 뿌듯해합니다. 지인들은 대개 좋은 말을 해주고 저는 칭찬을 좋아하니까 힘이 납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살림하며 지내지요.
소설가의 딸로 산다는 것은 어떠셨나요?
끝없는 ‘깊이에의 강조’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기력을 빼앗기는 일이 많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의지가 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최인훈의 딸로 살았던 시절의 정신적 자양분이 없었다면 어떻게 견뎠을까 싶은,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었던 시간들을 돌아볼 때 더욱 그렇게 느낍니다.
아버지와 오랜 시간 함께한 기억들이 많기에 오히려 더 집필하기 어려우셨을 것 같은데요,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아버지를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만났던 분 중에, 아버지를 사랑했던 분들을 위해 아버지를 위한 글을 써 달라고 했던 분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는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 못 했는데, 책이 나왔네요.
기억이 자꾸 사라진다는 공포감도 컸습니다. 책에 “하루가 지나면 하루보다 많은 것들이 사라져갔다.”고 적었는데요, 결정적으로는 망각이 진행되는 현실에 ‘겁이 나서 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님은 어린 시절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미화하지도 슬프게 그리지도 않으셨어요. 특별히 이런 태도를 취하신 이유는요?
아마 개인적인 취향 때문일 겁니다. 배우가 먼저 너무 울어버리면 관객이 울 수 없겠지요. 제 경우에, 쓴 이의 감상이 너무 가득한 글에는 오히려 감흥이 잘 일어나질 않아요. 담백하게 전달하는 내용에서 읽는 분들이 각자의 경험을 떠올리며 저마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길 바랐습니다. “우리 아버지와 다른데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 생각이 났다. 우리 어머니와 다른데 어머니 생각이 났다.”는 말을 들을 때, 그래서 더 기뻤습니다.
불광동 집, 갈현동 집 등 유독 ‘장소’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옵니다. 작가님께 장소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1차적으로는 집필 공간이 사라졌다는 데 대한 아쉬움, 그러니 글로라도 남겨 두어야겠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또, 집과 아버지는 뗄 수 없는 한 몸같이 자연스럽게 한 이미지로 떠올랐어요. 워낙 아버지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으니까요. 아마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요.
이 책의 또 하나의 재미는 아버지와 딸의 대화입니다. 아버지가 선문답 같은 어려운 말을 건네시면 딸은 ‘네/아니오’하는 단답형 대답을 하거나 침묵(말줄임표)을 지키기도 해요. 그러나 그런 대화가 차갑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애정이 느껴져 웃음을 짓게 됩니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어렸을 때도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아버지와의 지금 이 대화가 어렵긴 하지만, 무척 중요하고 귀한 순간이다.’라는 자각이 있었어요. 그 어려운 시간이 저에 대한 아버지 방식의 관심과 사랑 표현이라는 것도 충분히 알 수 있었고요. ‘평범하지 않은 아버지의 특이하지만 절절한 사랑 표현을 좌절시키고 싶지 않은 딸의 마음’을 그리고 싶었는데, 애정이 느껴지셨다니 다행입니다.
이 책은 최인훈 작가님에 대한 책이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성장 기록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에게 ‘문학’이 중요했다면, 작가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맞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인 이 책은, 곧 정신적, 육체적, 경험적 DNA를 공유하고 있는 저의 진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혼자만의 충전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한 내향형 사람이고, 인간관계는 퍽 어려운 것이지만, 그 어려운 관계에서 어떤 애정과 지지, 격려를 주고받았을 때 느낄 수 있는 희열은 대체 불가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만약 조금이라도 ‘성장’이라는 것을 했다면, ‘사람의 중요성’, ‘나도 남도, 모두 특별하며 동시에 평범하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어, 티끌만큼이라도 전보다는 겸손해진 결과일 거예요.
한 사람의 책장은 그 사람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와 작가님의 책장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었나요?
공통점이라면 좋아하는 책의 성향, 관심 있는 분야가 겹친다는 점이겠죠. 그래서 저희 집에 오시면 한두 권씩 마음에 드는 책을 가져가시는 때가 종종 있었어요. 다른 점이라면 저는 좀 더 쉽게 읽히는 책을 좋아합니다. 같은 책을 읽어도 아버지가 원서를 읽으셨다면 저는 우리말 번역본을 열심히 찾는 편이죠. 문학서가 아니면 번역본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제 마음대로 쉽게 타협하는 편입니다.
작가님은 아버지의 딸이자 충실한 독자이기도 하셨어요. 아버지의 작품 중 각별히 애정이 가는 작품과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희곡 「둥둥 낙랑둥」을 좋아합니다. 시적인 대사, 그 사이의 공백이 주는 긴장과 여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모티브를 가져온 극적 서사와 개인의 사랑을 선택하는 결말이, 슬프지만 아름답고 좋아요. 규모나 이야기의 성격상 좋은 기회를 얻어 해외에서 공연해도 훌륭하게 어필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글로 읽어도 좋은 희곡이지만, 공연 때는 배우들의 궁중 의상들과 배경 효과로 무대가 웅장하고 화려해요.
이 책을 가로지르는 주제 중 하나는 두 가지 현실 즉, ‘추상적인 현실’(픽션)과 ‘구체적 현실’이예요. 작가님은 ‘추상적인 현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추상적 현실’은 ‘정신적 현실’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겠는데요, 누구에게나 대단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 제약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구체적(물리적) 현실’과는 달리,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자의적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지요. 일종의 ‘추상적 현실’인 SNS의 폐해에 대해서도 많은 말이 있지만, 저는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팔로워가 2000 명이 조금 더 되는 SNS 계정이 있는데, 그 계정을 통해서 ‘구체적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 배웠고 위로도 받았습니다. 독서든 SNS든 자신만의 정신적 둥지를 마련해, 그곳에서 자신만의 리듬으로 숨 쉬고 날갯짓을 해보는 시간과 경험은 중요하지 않을까요.
작가님의 추천 도서가 궁금합니다.
우선, 쉼보르스카의 『끝과 시작』 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1996년에 노벨상을 받은 폴란드 시인의 시집으로, 쉬운 말로 편안하게 쓴 것 같은 시들인데 울림이 깊고 여운이 짙어요. 읽으면 ‘그렇지. 사람 사는 게 이런 거지 뭐가 더 있나’ 그런 생각이 들지요. 같은 저자의 서평집인 『읽거나 말거나』 도 재미있어요. 칭찬만 하는 주례사 비평이 아닌 431개의 솔직하고 짤막한 독후감들이 짜릿하게 읽힙니다. 『춘향전』에 대한 감상평은 시각이 확실히 참신해요. 다음으로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입니다. 사놓고 아직 못 읽은 책 중에 『나는 외로울 때 과학책을 읽는다』 가 있는데, 이 제목처럼 나의 삶을 과학, 특히 생물학적 관점으로 환원시켜 보면 상당히 마음이 편안해지고는 합니다. 세상에서 내가 별나지 않은 존재인지 생각하게 되고, 내 앞의 어려움도 좀 작게 느껴지면서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자비심과 용기도 생겨요. “하찮은 미물인 내가 그래도 노력하고 있으니 기특하다. 분명한 끝이 있으니 조금만 더 힘내보자.” 하는 식으로요. 『돌다리 외』에 실린 이태준의 단편들도 꼭 추천하고 싶어요. ‘소설의 정취’라는 것이 물성화하면 이 책일 듯싶고, 예스러운 문장이 제대로 감칠맛 납니다. 얘기하고 싶은 책이 너무 많네요.
책이 출간된 후 작가님의 기분은 어떠셨나요?
패닉상태였습니다. 책이 나왔으니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는데, 혹시 아버지에게 누가 되지는 않을지, 잘못 쓴 부분은 없는지, 여러 번 검토한 일인데도 겁이 더럭 나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앞으로 책을 내실 계획이 있으신가요?
써놓은 단편 소설들이 책 한 권 정도 분량 있습니다. 생각 중이거나 쓰는 중인 소설들도 있고요. 시도 모으는 중인데, 어느 것이 먼저일 지는 모르겠습니다. 다음 책을 낼 수 있다면, 정말 감사할 거예요. 책과 관련된 에세이도 꼭 쓰고 싶어요. 『회색인의 자장가』 는 책 읽기를 싫어하던 소설가 딸이 쓴 반성문이기도 한데, 읽은 분들이 “책 속에 인용된 책들을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말을 해주셔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제가 한 권의 책이 가지를 뻗어서 인용된 책들을 읽고 싶게 하는 책을 좋아하거든요.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어떤 모습의 ‘최인훈 소설가’와 만나기를 바라시나요?
책을 쓸 때는, 냉철한 지식인의 인상이 강한 ‘최인훈’의 인간적이고 따뜻한 이면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소감은 각자의 생각과 입장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사람들은 칸트의 철학을 몰라도 ‘칸트라는 철학자가 시간 관리에 철저했다’는 일화는 잘 알고 있지요. 생활의 일화를 통해 작가 ‘최인훈’을 더 많이 더 오래 기억하는 데 『회색인의 자장가』 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최윤경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동대학 국제대학원에서 국제문화교류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노력이 언제나 목표한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지만, 노력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노력하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언제나 나은 선택이라고 믿는다. 또, 작가의 딸로 태어나고 책도 쓰게 되었지만 모든 사람이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독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사는 삶은 매우 행복한 인생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명언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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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인의 자장가최윤경 저 | 삼인
최인훈의 딸인 최윤경이 아버지를 저세상으로 보내고 한 해를 맞으면서 아버지와 함께했던 날들을 추억하는, 고백적이면서도 섬세하고 치열한 분석력이 돋보이는 산문집이다.
김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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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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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