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의 한 장면
사춘기란 내 앞에 놓인 세상이 자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의문을 품는 순간 시작되는 게 아닐까. 가장 가깝고 가장 기꺼이 사랑할 수 있는 가족이야말로 나를 가장 많이 상처 입히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았을 때의 충격이나, 하나도 훌륭해 보이지 않는 어른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가르침을 열렬히 설파하는 순간의 위화감 같은 것들. 단단한 실체를 지닌 것처럼 보이던 세상이 겉모습과는 달리 복잡한 무늬를 그리며 끊임없이 흔들리는 이들의 총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아이는 그간 배워왔던 세상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세상 모든 것에 시니컬하게 반응하는 이들을 두고 ‘중2병’이라 말하는 건 쉽지만, 중2가 세상을 환멸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란 사실을 우린 자주 잊는다.
영화 <벌새>(2017) 속 은희(박지후)가 경험하는 1994년의 중학교 2학년 또한 폭력적인 모순으로 가득한 세계다. 오빠는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툭하면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학교 선생님은 노래방을 다니거나 이성교제를 하는 학생을 ‘날라리’라고 부르며 그게 대단히 큰 죄인 것마냥 색출작업을 일삼는다. 가장 친한 친구들은 돌연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언제든 기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엄마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렇다면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그런 세계 안에서 우리는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답은 그렇게 쉽게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을 믿게 된다. 그리고 은희가 다니는 한문학원에 새로 출강을 나온 영지 선생님(김새벽)이야말로 그런 어른이다.
영지 선생님이 한문학원 책상 위에 올려 둔 책들은 온통 그가 나름대로 세상의 답을 찾아 헤맨 흔적들로 가득하지만, 정작 그가 은희에게 알려준 지식의 대부분은 세상에 쉽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내용이다. 얼굴을 아는 친구가 아니라 속마음까지 아는 친구는 과연 몇이나 되겠냐고, 겉으로 보기에 딱하다고 해서 함부로 동정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고. 은희는 영지 선생님의 가르침에 의지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세상의 모순 속을 조금씩 통과해 간다. 어찌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몰려올 때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손가락을 움직여 보면서, 자기보다 조금 먼저 그 모순을 받아들이려고 발버둥친 어른의 발자국을 좇으며.
그래서 <벌새>는 1994년에 사춘기를 맞이한 관객뿐 아니라, 자신의 사춘기를 기억하는 모든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영화다. 우리 모두에게도, 나를 그처럼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걸어주고 자신도 헤맸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던 영지 선생님 같은 사람들이 있지 않았냐고.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며, 조심스레 모순 속에서도 살아갈 만한 이유를 이야기해주는 이들이 있지 않았냐고.
이승한(TV 칼럼니스트)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
찻잎미경
2019.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