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SF 신에서 듀나의 좌표는 누구보다 또렷하다. 1992년부터 영화에 관한 비평과 창작 SF를 쓰기 시작한 이후, 공백 없는 꾸준한 활약을 펼친 사례로는 거의 첫손에 꼽히기 때문이다. 특이하다면, 그를 수식하는 단어가 여전히 ‘얼굴 없는 작가’라는 점이다. 그의 정체를 둘러싼 분분한 해석이 오갔지만, 결론은 없다. ‘얼굴 없는 작가’인 탓에 작품 발표에 따른 그 흔한 세리머니조차 목격할 수 없는 게 아쉽지만, 어쩌면 그의 세리머니는 비평과 장르물을 횡단하며 특유의 상상력을 녹여놓은 작품을 쉼 없이 발표하는 그 자체 아닐까.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SF 전문 잡지 『오늘의 SF』 창간이 화제입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SF 장르에 속한 작품은 꽤 많이 나오지만 SF로 읽히고 비평하는 지면은 여전히 좁죠. 보편적인 문학으로 보는 관점도 필요하지만 구체적인 장르 내부의 관점도 필요해요. 『오늘의 SF』가 그 절반을 채워준다면 좋겠지요.
『한국 창작 SF의 거의 모든 것』 이라는 책 속 좌담에 이런 코멘트가 있습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내에 내로라하는 과학소설 작가는 복거일과 듀나 두 분밖에 없었어요.” 그 후로도 SF 작가로 쉼 없이 작품을 쓴 독보적 사례입니다. 소회가 궁금합니다.
그 기간 동안 활동한 작가가 저만 있는 건 아니에요. 아마 제가 가장 시끄러운 부류였겠죠. 그동안 우리 장르에 있었던 변화는 상당하다고 생각해요. 20년 전 우리가 꿈꾸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에요. 그래서 불만인 사람도 있겠지만 미래가 옛날 사람들 기대대로 흘러간다면 그게 무슨 재미인가요. 그건 정체겠죠.
SF 작가 듀나가 접한 최초의 SF 작품, 덧붙여 가장 큰 영향을 준 작가(혹은 작품)와 이유가 궁금합니다.
쥘 베른, 허버트 조지 웰스, 아이디어회관 SF 모두 어린이용 축약본이었어요. 영향을 준 작가는 프레드릭 브라운, 아이작 아시모프, 어슐러 K. 르 귄이었고요. 앞의 두 작가는 모방의 기반이 되어주었고 르 귄이 없었다면 시작도 안 했을지도 몰라요. 저만 그랬던 건 아닐 거예요.
안타깝지만, 한국 SF 신을 거론할 때면 단골처럼 등장했던 게 팬덤의 폐쇄성입니다.
한국에 SF 독자가 500명이라는 농담이 떠돌았는데, 지금은 의미가 없죠. 20년 전 한국 SF 팬덤은 모두가 서로의 이름을 아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일단 SF 문화 자체가 보편적이 되었으니까요. 일반 독자들도 한국어 SF를 읽는 것에 익숙해졌고요.
한국 SF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작가 머릿수요. 물론 늘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그 추세는 이어지겠죠. 제가 가장 기대하는 건, 지금 예상하지 못한 것들입니다. 거기에 도달할 유일한 길은 머릿수와 그를 통한 다양성이지요.
최신 과학 지식의 동향이나 그것이 담고 있는 사회적 이슈 등은 꾸준한 관심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소스를 흡수하는 통로(혹은 노하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책과 뉴스와 대화겠지요. 하지만 모든 SF 작가가 ‘최신 과학 지식의 동향’에서 소재를 얻지는 않을 거예요. 다른 사람들처럼 온갖 것에서 얻는데, 그것을 장르적인 도구를 통해 발전시키는 거죠.
‘SF답지 못하다, 과학적 정합성이 부족하다, 이런 평가 앞에 서면 우울해진다’는 SF 작가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SF 작가라는 정체성이 있다면 한 번쯤 직면할 상황 같은데, 이 작가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으신가요?
제가 늘 하는 말은 장르명이나 정의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장르명은 대부분 장르의 가능성이 충분히 발견되기 전에 지어졌고 장르는 끊임없이 변해요. 그 변화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는 거고요. SF에서 과학은 중요하지만 (아니, 어딘들 안 중요하겠어요) 이 장르가 꼭 과학에 대한 이야기만 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단지 우리가 쓸 수 있는 도구와 언어가 그 영역을 포함하고 있을 뿐입니다.
김보영 작가의 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SF 작가에겐 ‘어렵다’고 불평하는 독자들과 별개의 고민이 있다. ‘틀렸다’고 불평하는 과학자들이다.”
신경을 써야 한다면 후자일 거 같아요. ‘될 수 있는 한’ 정확한 과학을 쓰는 건 중요하겠죠. 하지만 SF에서 정확한 과학은 최종 목표가 아니에요. 심지어 최고의 하드 SF라는 작품도 다들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죠. 상당수는 직업 과학자가 썼는데도요. 어차피 몇십 년만 지나면 과학은 낡고 작품에 반영된 과학은 옛 시대의 일부가 됩니다.
작품집 『대리전』의 작가 후기에 “SF 단편들을 쓰기 시작할 무렵, 나는 앞으로 정복할 구닥다리 SF 클리셰 목록을 작성했는데”라고 적었습니다. 당시 목록에서 아직까지 정복하지 않은 구닥다리 클리셰가 있나요?
웬만한 건 다 한 거 같아요. 전 단편 작가라 잡다한 걸 다룰 기회가 많아요. 공룡이 나오는 SF가 남아 있었는데, 그것도 얼마 전에 다루었죠.
반드시 구현하고 싶은 궁극의 소재가 있을까요?
모든 장르 소재는 클리셰예요.
최근 SF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이 궁금합니다.
클레르 드니의 <하이 라이프>는 과대평가 받은 <애드 아스트라>보다 장르적으로 훨씬 재미있는 SF였어요. 드니가 그렇게 적극적인 SF 영화를 만들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영화라는 매체와 작가님의 오랜 사이를 떠올리면, SF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 듀나를 상상하는 건 무리인가요?
제 이야기들은 그렇게까지 영상에 잘 어울리지 않아요. 장식 없는 문체를 쓰는 장르 작가의 글을 ‘영화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지 않아요. 예를 들어 아시모프는 영화화하기 정말 까다로운 작가지요.
현재 쓰고 계시거나 예정 중인 작품의 내용을 미리 귀띔해주실 수 있나요?
첫 장편 『몰록』을 다듬고 있어요. 시간여행 단편도 쓰기 시작했는데, 아직 도입부라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겠어요. 전 일단 첫 문단을 쓰고 나서 수습하는 편이라.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과 이유를 알려주신다면요?
언제나 가장 최근 작품이지요. 기억력이 나쁘고 바빠서. 가장 최근작인 「대본 밖에서」는 『오늘의 SF』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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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SF #1정소연, 전혜진, 정보라, 연상호, 이다혜 저 외 16명 | arte(아르테)
고호관, 듀나, 정세랑, 정소연 작가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한국 SF 무크지로, ‘현재성’, ‘다양성’, ‘감수성’을 핵심 키워드로 삼아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 비평, 창작 등 여러 분야의 필진, 인터뷰이와 함께 보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텍스트로 독자들을 만난다.
문일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