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없는 사이
내일의 나는 ‘정답’의 가면을 쓴 정의의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역시 장담할 수 없으니 마침표 뒤에는 늘 물음표를 상시 대기 시킨다.
글ㆍ사진 박형욱(도서 PD)
2020.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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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 뒤에는 늘 물음표를 상시 대기시킨다

정의 내리지 않고 사는 것은 가능한가. 살면서 맺는 관계나 상황 속에서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딱 잘라 단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잘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을까.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다. 하루도 확신할 수 없다. 무언가에 멋대로 이름표를 붙이고 성급하게 마침표를 찍어버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데 마음처럼 안된다.

그렇다고 정의가 다 나쁜 건 당연히 아니다. 설명하는 차원의 정의라면 악의가 있지 않고서야 얼마든지 문제될 것이 없겠다. 내 이런 의문의 시작은, 한번씩 나의 정의定義가 정의正義가 되는 데에 있다. 은연중 ‘이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린 정의를 깨닫고 흠칫 놀란 어떤 순간에 있다. 개인의 경험을 토대로 세운 나름의 기준, 무의식 중에 그것을 공통의 정의로 믿거나 만들어버리는 것. 특별히 왜곡하려는 의지를 갖지 않아도 고약한 마음을 먹지 않아도 그런 순간이 온다. 게다가 꼭 돌이킬 수 없을 때에 가서야 내가 한 일을 바로 보게 된다는 것, 그것이 특히 불편한 점이다.

잘 안다, 이해한다, 파악하고 있다, 라고 하고싶은 것, 그렇게 보이고 싶은 것, 그것을 누군가 발견하고 관심 가져 주기를 바라는 것이 다수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일까.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인간의 욕구가 ‘답을 가진 자’이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지는 걸까. 심지어 그것이 ‘척’일지라도 말이다. 그걸 위해서 바깥의 어떤 것을 자신의 테두리 안으로 가지고 와 몇 마디 말로 명명하고 묶어두는 것일까.



제가 학생일 때는 확신이 가득 차 거침없이 말하는 선배가 부러웠습니다. 저는 좀 위축되기도 했지요. 자신감도 부족했고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강한 주장을 스스럼없이 했던 선배들 가운데 결과적으로 틀린 이야기한 사람도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논리적으로 정당화하기 어려우면 머뭇거리는 게 정상인데, 그냥 거침없이 질렀던 게지요.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 윤태웅, 『떨리는 게 정상이야』 267쪽

누구나 각자가 가진 자로 세상을 측정한다. 어린시절 내가 가진 자는 무척 말랑한 것이었는데, 그건 시간과 함께 금세 단단해 졌지만 사실 그 속성은 조금도 변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요즘에 와서 새삼 느낀다. 바르게 정확하게 공정하게 견고해진 줄만 알았던 그 자는 뒷면에 전혀 다른 눈금을 함께 가지고 있기도 하고, 접혀 있어서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을 발견해 펼치면 별일 아닌 듯 쭉 길어졌다가 또 빠르게 짧아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실은 마음대로 늘었다 줄었다 하는, 내게만 맞춤한 자로 세상을 재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때로는 그것이 국제 규격이기라도 한 듯 굴게 되는데, 거기에서 경솔한 판단이 시작된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자주 하는 판단, 정의는 사람과 관계한 것일 테다. 그런데, 자꾸 잊는데, 아무도 모른다. 나는 아무도 모른다. 나를 아무도 모른다. 과연 그렇게 생각대로 뻔한 것이 얼마나 있을까. 누군가의 작은 표정, 사소한 행동 하나에 숨은 유구한 역사를 다난한 사연을 나는 모두 알지 못한다. 그 수많은 일들이 한 사람과 만나 빚어냈을 오묘한 빛깔의 감정과 이야기들을 나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나다운 게 뭔데’, 지금은 어쩐지 조금 재미있는 대사가 되어버린 것도 같은 이 말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오호 싶었다. 이런저런 포장을 벗기고 보면 그 말의 안쪽에는  ‘당신이 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시오.’가 들어있으니까.

함부로 정의 내리지 않고 사는 것은 가능한가. 정의 없는 사이는 가능한가. 쉽지 않겠지만 그런 사람이었으면 한다. 누구에게든 꼭 짜 맞춘 틀을 가져다 대기보다는 여지를 충분히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내일의 나는 ‘정답’의 가면을 쓴 정의의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역시 장담할 수 없으니 마침표 뒤에는 늘 물음표를 상시 대기시킨다. 의문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떨리는 게 정상이야
떨리는 게 정상이야
윤태웅 저
에이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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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욱(도서 PD)

책을 읽고 고르고 사고 팝니다. 아직은 ‘역시’ 보다는 ‘정말?’을 많이 듣고 싶은데 이번 생에는 글렀습니다. 그것대로의 좋은 점을 찾으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