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이 ‘기본값’인 많은 분야들 중에서도 게임판은 특히 더 기울어져 있다.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는 그 기울어진 세계에서 버틴 여성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부터 게임을 해오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차별의 기억들, 게임 업계와 커뮤니티를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알게 된 여성 혐오의 패턴들을 짚어보며, 이런 피해가 왜 사라지지 않는지에 대한 고민들을 담았다.
그렇다고 체념하는 것은 아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변화의 조짐을 발견하고,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며 연대해온 페미니스트 게이머들의 노력을 소개한다.
첫 책을 출간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책을 받아보신 기분이 어떠신가요?
드디어 끝났구나! 하는 안도감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가급적이면 최근의 사건까지는 싣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거든요. 마지막 교정을 할 때 즈음에 유비소프트의 핵심 임원의 성추행 사건이 밝혀져서 해당 사건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었고요. 조판이 들어가고 며칠 있다가 책 안에 사용되었던 자료인 『게임 이용자 실태 보고서』의 2020년도 버전이 발표되어 아쉽기도 했고요.
필명을 ‘딜루트’라고 지으셨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요?
20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포장하고 다녔어요. 자기주장도 좀 강한 편이었고, 인터넷상에서 말도 좀 세게 하는 편이었고요. 제가 즐긴 것들에 대해 ‘편견’ 없이 인정받고 싶었던 게 그런 방식으로 표출되었던 거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자신을 돌아보니 누구한테 인정받으려고 이렇게 애를 쓰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딜루트는 희석된다는 표현이잖아요? 원래 그전에 쓰던 닉네임에 딜루트를 붙였었고, 이제는 딜루트만 남았네요.
게임 업계에서 ‘젠더 갈등’, ‘페미니즘 사상검증’이 지금까지도 논란이고 화두입니다. 작가님께서 게임 업계를 둘러싼 이야기와, 게이머로서의 이야기를 쓰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게임에 관해 가장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꼭 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그저 제가 게이머로서 자라오면서 경험하고 보고 들었던 것들을 써오기 시작한 거죠. 그러나 성별로 인해 생기는 많은 일들을 전부 없던 일로 할 순 없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여성 게이머가 게임을 할 때 겪어왔던 일들이 전부 페미니즘과 무관한 일이 될 수 있을까요? 책 속에서 가급적이면 제가 플레이했던 다양한 장르를 다루려 했는데, 모든 장르에 여성 게이머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책을 읽고 게임 회사에서 만드는 게임 자체에도 많은 젠더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작가님께서 많은 여성 팬을 모았던 『프린세스 메이커』에 대해 이야기하신 대목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책에서 말씀하셨듯이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문제가 많았던 게임이었더라고요. 여성의 삶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게임인 것 같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평가할 때, 그것이 나왔을 당시의 시대상을 무시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초기 『프린세스 메이커』가 남성 게이머를 주된 판매 대상으로 하여 출시되었지만, 여성을 원하는 대로 성장시킬 수 있다는 측면 탓에 많은 여성들이 대리만족 할 수 있었어요. 당시엔 그런 게임조차 드물었으니, 그런 관점에서 접근했을 때 분명 의미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었죠. 그 시대 관점으로요. 그러니까, 199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사이요.
2020년도에 그런 구식 결혼관이나, 강간 장면이 나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낡고 구식인 이야기라고 비판을 받겠죠. 문제는, 『프린세스 메이커』는 새로운 게임기기나 플랫폼이 나올 때마다 자주 재발매된다는 거예요. 일부 선정적인 일러스트는 그 과정에서 수정되긴 하지만 안의 내용물은 바뀌지 않죠. 오히려 무삭제본이라며 예전에 국내에서 심의를 했을 때 없어졌던 이야기들이 더 노골적으로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면서 ‘옛날 게임인데 뭐 어때’ 하면서 모르는 척하는 태도는 얄미울 수밖에 없죠.
게이머들 사이에서도 여성 게이머를 무시하는 문화와 여성 혐오가 만연하다는 경험 사례들을 책에 많이 담으셨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이 무엇인가요?
‘게이머게이트’ 사건이 한국에 처음 알려졌을 당시만 해도 국내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조이 퀸과 아니타 사키시안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부정적이었어요. 그 이유는 가해자 측, 즉 4chan과 래딧의 주장을 그대로 번역해왔기 때문이었고요. 몇 년이 지나 해당 사건들이 혐오 세력에 의한 사건임이 밝혀지고 나서, 한국 게임 업계의 페미니즘 관련 이야기가 나왔을 때 아니타 사키시안의 이야기가 함께 나왔었는데요, 그때 거기 달린 댓글이 “페미니즘을 하면서 게임 비평을 할 거면 저 사람처럼 해야지, 한국 페미니즘은 가짜다”라는 글이었어요.
물론 아직도 가해자를 옹호하는 사람 또한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라지진 않았어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가해자의 주장만을 그대로 수입해 아니타 사키시안을 비판하던 때와는 달리, 그의 주장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분명 눈에 띄게 증가했어요. 게임을 플레이하고 다양한 시각으로 게임을 분석하고 있는 여성 게이머 분들이 많기도 하고요. 지금 이런 움직임들이 고되고 더디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이야기들을 언젠가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님은 “게임을 접진 않았다.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 하겠는가?”라고 선언하시며 게임을 계속 하고 계십니다. 최근에 재밌게 하고 계신 게임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한 달 전쯤에 <엑스컴: 키메라 스쿼드>의 엔딩을 봤습니다! <엑스컴 : 키메라 스쿼트>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엑스컴> 시리즈에서 캐릭터적인 요소와 시나리오 부분을 좀 더 강화하고 좀 더 가볍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든 작품이에요. 플레이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부대는 외계인과 지구인이 섞여 있고, 유색인종의 비율도 굉장히 높아요. 소위 말하는 ‘스테레오 타입’이 별로 없는 특수부대죠.
다른 부대, 즉 대부분이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외계인에게 빚이 있는 사람들은 이들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러다 보니 게임 속에는 사회적 약자에 관한 이야기나, 자신이 아닌 낯선 타인을 대하는 것에 대한 메타포가 곳곳에 등장하고 있고요. 이런 것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어요. 게임적인 재미는 물론이고요.
앞으로 게이머로서, 그리고 작가로서의 활동 계획이 궁금합니다.
매년 3~4분기 시기가 다가오면, 연말에 있을 각종 수상식(GOTY-Game of the year, 올해의 게임)을 노리고 많은 게임들이 발매되곤 합니다. 그런 게임 중에 소개할 만한 인디 게임을 찾아보고, 개인적으로 기다리던 게임도 플레이하게 될 것 같아요. 또 개인적으로 외국의 미디어 콘텐츠들을 찾아보는 것도 좋아해서, 기회가 되고 충분한 자료가 쌓이면 그런 칼럼도 써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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