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넷플릭스 <에놀라 홈즈> 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셜록 홈즈가 ‘주홍색 연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사건을 해결한 지 3년 뒤인 1884년의 어느 날, 고향의 어머니가 실종되었다는 전보가 날아온다. 직장, 하숙집, 디오게네스 클럽만 왔다 갔다 하며 사는 형 마이크로프트와 함께 기차역에 내린 셜록 앞에 나타난 것은 어릴 때 헤어져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열여섯 살 여동생 에놀라다. 잠깐, 셜록 홈즈에게 여동생이라니 금시초문이라고? 당연하다. <에놀라 홈즈>는 코넌 도일이 아니라 낸시 스프링어가 쓴 패스티시 소설 ‘에놀라 홈즈’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인 『사라진 후작』 을 각색한 작품이다.
딸의 이름을 ‘에놀라(Enola, 철자를 거꾸로 쓰면 ’홀로’라는 의미의 ‘Alone’)로 짓고, 그 시대 여성의 덕목이었던 자수 대신 화학, 천문학, 양봉, 양궁, 테니스, 펜싱, 격투, 체스를 가르치며 “어떤 사람이 되어도 괜찮다”고 했던 유도리아 버넷 홈즈(헬레나 본햄 카터)는 에놀라(밀리 바비 브라운)에게 최고의 스승이자 친구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직접 만든 꽃말 카드를 생일 선물로 남기고 사라지다니! 혹시 나쁜 일이 생겼을까 걱정하던 에놀라는 어느 순간 엄마가 스스로 자신의 곁에서 떠났음을 깨닫고 상심한다.
오랜만에 만난 오빠들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코넌 도일의 원작에서 셜록 홈즈가 “나보다 훨씬 더 풍부한 소질을 타고났다”고 인정했던 마이크로프트는 에놀라 홈즈의 세계에선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으면서 신분과 평판에 집착하는 오만한 남자로 그려진다. 심지어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존 스튜어트 밀의 저서 <여성의 종속>을 발견하자 “페미니즘이잖아! 정신이 나갔거나 노망 난 게지.”라며 질색하고, 에놀라를 억지로 기숙학교에 집어넣어 ‘신부 수업’을 받게 하려는 흔한 여성혐오자이기까지 하다. 마이크로프트보다는 다정하지만, “네 보호자는 형”이라며 은근슬쩍 한발 뒤로 물러나는 셜록도 멀리서 ‘천재 오빠’를 동경해온 에놀라를 실망시킨다.
그렇다면 용감한 소녀의 갈 길은 어디겠는가. 엄마가 남긴 단서에서 암호를 풀어 “우리의 미래는 우리에게 달려 있어”라는 문장을 발견한 에놀라는 직접 엄마를 찾으러 런던으로 떠난다. 19세기 영국 여성의 독립과 해방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서프러제트(여성 참정권 운동가)의 존재는 <에놀라 홈즈>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로 쓰인다. 기존의 영국법에서 기혼 여성은 남편의 법적 소유물로서 남편이 아내의 모든 인격과 권리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결혼한 여성이 자신의 재산과 수입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기혼여성재산법이 통과된 것은 영화의 배경으로부터 2년 전에 불과한 1882년이다.
남편이 사망한 후 유도리아가 장남 마이크로프트에게 거짓말을 해가며 생활비와 에놀라의 교육비를 받아내야 했던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1884년에는 농장 노동자에게까지 참정권을 확대한 주선거권법안이 입안되었지만, 21세 이상의 모든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참정권을 얻은 것은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인 1928년이다. 유도리아의 서프러제트 동지이자 여성 주짓수 도장을 운영하는 이디스(수전 워코마)는 어머니의 활동을 냉소적으로 여기고 정치는 너무 지루해서 관심이 없다는 셜록 홈즈에게 ‘당신은 권력 없이 사는 인생이 어떤 건지 모른다’며 말한다. “당신은 세상을 바꾸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기 때문이에요. 본인에겐 이미 딱 좋은 세상이라서.”
결국 ‘홀로’ 세상에 나온 에놀라는 가출한 소년 후작 튜크스베리(루이 파트리지)의 목숨을 구해주고, 총을 가진 악당과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으며 오빠보다 먼저 사건을 해결해 세상을 조금 바꾼다. 결정적 순간 보호받는 소녀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던져 꽃 같은 미남을 보호하고 여성 억압의 상징인 코르셋을 일시적 위장복이자 전대쯤으로 여기는 에놀라의 모험은 경쾌하고 활기차다.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에서 신비로운 힘을 가진 ‘일레븐’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밀리 바비 브라운은 에놀라가 되어 ‘제4의 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스크린 너머의 관객을 향해 말을 건넨다. 마침 ‘에놀라 홈즈’ 시리즈는 여섯 권이니 이번을 시작으로 다음이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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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칼럼니스트)
대중문화 웹 매거진 <매거진t>, <텐아시아>, <아이즈>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등의 책을 썼다.
Ho
2020.10.03